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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리에 인터뷰]숲의 화가 강제순 씨 그림은 쉽다 그림은 행복하다
화가 강제순 씨의 노출 콘크리트 작업실은 맨발로 이끼를 밟는 듯 몰랑몰랑하고 따뜻한 느낌이다. 그것도 황량한 초겨울에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작업실을 지은 지 1년여밖에 되지 않아 푹 무르익지 않았다며 연신 미안해했다. 바로 그때 작업실에 어린 온기의 정체를 알았다. 그가 말을 하면서도 조몰락조몰락 손질하던 정원의 꽃나무였다.
화단에 한번 자리를 틀면 ‘달 뜰 때까지 꽃을 심는다’는 화가. 꽃 가꾸는 것을 너무 좋아해 헤이리의 이 작업실도 화초를 위한 공간을 염두에 두고 지었다. 건물 입구부터 정원으로 시작하고 ‘ㄷ’자형 건물의 중정은 잘생긴 키다리 단풍나무의 전용 공간이다. 특이한 점은 여느 집처럼 ‘정원’이라는 공간의 경계가 분명한 건물이 아니라는 것. 손톱만 한 꽃을 피우는 꼬맹이 화초인 갯모밀은 현관 앞 보도블록 사이사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누가 보지 않을 뒤란의 작은 틈에서 능소화가 기어나와 벽을 오르고 있었다. 이 콘크리트 작업실은 사시사철, 아니 매일 매일 옷을 갈아입을 것이다. 꼭 숲을 닮은 작업실이다.

사계의 변화를 묘사한 숲 마당에서 종종 연출되는 장면 하나. 남편 박경탁 씨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여보, 전시 날짜도 잡혔는데 그렇게 놀아도 되겠소?”라며 정원에서 일하는 강제순 씨 곁을 서성인다.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살았어도 남편은 늘 같은 질문을 한다. 화초를 가꿀 때부터 이미 작업이 시작되고 있음을, 정녕 모르는 걸까?

(위) 헤이리에 있는 화가 강제순 씨의 작업실 메인 홀 전경. 강제순 씨가 작업에 몰두할 때면 남편 박경탁 씨는 간식도 내주고 주변 정리도 해주는 자상한 남자다. 일곱 살 된 달마티안 ‘브랜디’와 아홉 살 된 프렌치 불도그 ‘탱’ 때문에 부부는 싸우지도 못한다. 조금만 언성이 높아지면 애견들이 하도 짖고 으르렁거리기 때문이다.


강제순 씨는 최근 오일 스틱을 사용해 순간적인 필치와 표면의 질감을 강조하는 회화 작업을 많이 했다.
1 ‘Autumn’(2008)
2 ‘Summer’(2008)


강제순 씨는 화초를 가꾸며 명상에 이른다. 몸과 마음이 이완되어 자연에 동화되었을 때, 그의 감각은 미생물의 움직임까지 감지할 만큼 민감해진다. 그 순간은 일본 시인 사초가 읊은 하이쿠와 비슷하지 않을까. “마음을 쉬고 보면/새들이 날아간 자국까지 보인다.” 이렇게 깨어난 산소 같은 감각이 캔버스에 그대로 담긴다.
반쯤 추상화하여 그린 숲을 통해 사계의 변화를 묘사한 요즘 작품들을 들여다보자. 작가는 새들이 날아간 자국은 물론 지난 봄꽃이 머물렀던 가지의 흔적, 혹은 뿌리가 땅속 깊이 내리뻗어 양분을 빨아올리는 소리도 느끼고 있지 않을까. 꽃과 잎 대신 비정형의 선과 면을 그려서 생명의 왕성한 움직임을 담아낸 것을 보면 말이다.
“숲에는 움직임이 있어요. 숲은 생명의 순환이 집약된 터전이거든요. 세포가 분열하고, 호흡하고, 태어나고, 스러지고…. 정원에 살다시피 하다 보니 이 모든 율동을 느낄 수 있어요.” 흔히 숲을 ‘고요하다’고 이른다. 하긴 숲 밖의 세간이 하도 소란스러워 숲으로 들어가면 상대적으로 고요를 느낄지 모르겠다. 하지만 숲은 언뜻 정적인 듯하지만 실은 동적인 세상이다. 온갖 생물이 살아내려 애쓰느라 분주하니까.


1 강제순 씨는 회화 작업뿐 아니라 흙 작업도 한다. 가마로 도자 판을 구워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화분을 구워 만들기도 한다.
2 작가 최정화 씨가 디자인한 이 작업실은 두 마리의 ‘강아지 가족’이 안팎을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설계했다.



3 건물 2층에 있는 그의 회화 작업 공간. 이곳에서는 주로 대형 작품을 다룬다. 비정형으로 뚫린 사각형 창문으로 보이는 헤이리의 멋진 자연 풍광은 갤러리에 걸린 그림 같다.

숲에 드나드는 바람과 빛은 이 움직임을 극적으로 부각시킨다. 강제순 씨의 그림에 바람이 불고 햇살이 반짝이는 이유도 숲의 율동을 살려내고자 함이다. 사시사철 달라지는 숲의 색감도 화가를 들뜨게 한다.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그는 캔버스 앞에 앉는다. “요즘에는 살아있는 색을 그대로 쓰는 것을 좋아해요. 젊을 때는 이런 원색에 가까운 색이 촌스럽다고 여겨 브라운이나 그레이 톤을 많이 썼는데 말이죠.” 젊을 적의 심각한 고민이 사라지고 나니, 붓을 놀리는 손은 더 이상 관념적이지 않고 유쾌해졌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어렵지 않다. 보는 이마다 제 안에 감추어진 풍만한 감수성을 끌어내게 만든다.

누드 드로잉으로 깨우친 선의 미학 강제순 씨의 필치는 과감하며 동시에 세밀하다. 그 밑바탕에는 평생 손에서 놓지 않은 누드 드로잉 작업이 있다. 수십 권의 드로잉 스케치북을 열어보았다. 인체 드로잉 하나만으로 스케치북 한 장을 구성지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드로잉은 그림의 처음이자 끝이에요. 그중 누드 크로키는 동양화로 치면 기본기인 사군자와 같지요. 5분 내로 모든 선이 결정 나는 그림인 데다, 힘 빠진 선을 그렸다 해도 고치거나 숨길 수 없는 그림이죠.” 말하자면 누드 크로키는 모델은 물론 화가도 발가벗은 그림이다. 그는 누드 크로키를 건축, 패션, 디자인 할 것 없이 모든 예술 분야에서 최고의 세련미를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익혀야 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4 흙 작업을 하는 공간 곳곳에도 푸른 초목을 심었다.
5 건물1층에 있는 작업 공간.


그의 누드 드로잉에는 꽃과 나무와 하늘이 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인데 때때로 그 사실을 잊고 살지요. 자연 속에서 함께 순환하는 인간을 누드 드로잉으로 표현했습니다.” 꿈틀대는 몸을 속도감 있게 그리는 훈련을 해온 덕분에 숲을 읽어내는 감각도 한층 예민해졌다.
남편과 함께 오랫동안 해외 생활을 해온 터라 주로 외국에서 전시를 해온 강제순 씨가 한국에 정착한 이후 첫 개인전을 연다. 전시 제목은 <겨울, 봄 여름 가을>. “흔히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봄부터 계절이 시작된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겨울이 없다면 봄은 오지 않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계절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음을 본다.
봄, 여름, 가을의 씨앗을 품은 겨울 숲의 율동이 궁금하지 않은가. 특히나 콘크리트색 겨울을 맞이하는 도시인이라면 말이다.

강제순 씨의 개인전 <겨울, 봄 여름 가을>은 12월 13일부터 2009년 1월 18일까지 헤이리에 있는 북하우스 아트 스페이스에서 열립니다. 나무, 꽃, 새, 바람, 햇살이 80~200호의 커다란 캔버스에서 자유로이 숨 쉬는 그의 신작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문의 031-955-2094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