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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냐고 묻거든 세계 5대 바이올린 명장 진창현 씨
바이올린 마스터 메이커로 추앙받는 진창현 씨. 올해 여든 살이 된 그는 ‘불가능’이라고 일컬어지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비밀’에 90% 정도 다가섰다. 남은 10%의 비밀은 자연의 소리에서 찾겠다며 또 다른 ‘역경’을 찾아나서는 그는 자신의 80세를 ‘아직도 발전 중’ ‘황금시대’라 부른다.


1 일본 도쿄 초후 시에 있는 ‘진공방’의 쇼룸. 진창현 씨와 그의 대를 잇는 두 아들이 만든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가 전시되어 있다.
2 현악기 프레임에 글자를 새긴 진공방의 문패.


‘나는 최고다’라고 외치고 싶은 욕구가 지글지글한 세상에서, 단지‘장이’라는 이름으로 묵묵히 사는 사람들이 있다. 바둑 두는 조훈현처럼 한 점 한 점 두다 보니 명인이 되고 기성이 된 것처럼, 바이올린 하나만 바라보고 산 ‘장인’ 진창현 씨. 유학파도, 대물림 장인도 아니지만 그는 독학으로 바이올린 제작에 매달려 ‘동양의 스트라디바리우스(17세기 이탈리아에서 살았던, 표준형 바이올린의 창시자이며 제작자. 그가 제작한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바이올리니스트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명기로 일컬어진다)’라 불리게 됐고, 전 세계에 다섯 명뿐인 ‘오르 콩쿠르Hors Concours(무감사無鑑査: ‘이젠 실력 검증을 받을 필요가 없으니 후학들을 위해 콩쿠르에는 더 이상 출전하지 말라’는 뜻으로 미국 바이올린제작자협회에서 주는 마스터 메이커 자격)가 되었다. 세상의 아홉 구비 인생이 다 그렇듯 그 영광 뒤에도 가시 울타리 같은 세월이 자리하고 있었다.

참으로 신산스러운 세월이었다. 가난 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강제 징용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간 열네 살 소년, 분뇨 수레를 끌면서 졸업한 야간 중학교, 인력거꾼으로, 부두 노동자로, 토목 인부로 일하며 이지 대학 영문학부에 입학한 조선 청년, ‘조센징’이라는 이유로 교사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어 방황하던 나날. 한겨울 바람이 홑겹의 살을 물어뜯는 것만 같은 세월이었다. 그렇게 청년이 된 어느 날, 강신 무당처럼 몸속으로 뜨거운 열기 하나가 들어왔다. 대학 3학년 때 유명한 리학자 이토가와 히데오 교수의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의 신비’라는 강연에서 “20세기 최첨단 기술로도 3백 년 전의 명기 ‘스트라 바리우스’를 재현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소리는 인류에게 수수께끼다. 나는 이제 이 연구를 그만두고 차라리 달에 가는 로켓을 연구하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전율했다. ‘일본은 조선인이 꿈을 이룩하도록 허하지 않는 땅이다. 불가능하다는 일에 대한 도전이라면 그 어떤 일본인도 날 가로막지 않을 것이다. 불가능하다는 이 일에 내청춘을 걸어보자. 이건 내 운명과 인생에 대한 전면 도전이다.’


1 집념으로 바이올린을 만드는 청년에게 반해 시집온 그의 아내 이남이 씨.
2 작업실 ‘진공방’에서 바이올린을 제작 중인 진창현 씨. 
3, 4 조선 청년에게 기술을 가르쳐주는 장인이 없어 독학을 선택한 그는 다른 이보다 세 배의 노력을 들여 ‘다작’하면서 제작 기술을 익혔고, 유명 연주자들의 명기를 스승 삼았다. 이렇게 만든 그의 악기는 재료나 악기 품질에 따라 훨씬 값비싼 것도 있지만, 바이올린은 보통 1백50만엔, 비올라 1백70만 엔, 첼로 3백만 엔에 팔린다.‘진공방’의 악기는 일본에서 가장 비싼 악기다.


하지만 그 ‘조센징’에게 바이올린 제작 기술을 가르쳐주려는 장인은 없었고, 매번 목 부러진 백자 주병처럼 고개 꺾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결국 나고야의 바이올린 공장 옆에 판잣집을 짓고 제작 과정을 훔쳐보며 혼자 바이올린 만드는 법을 익혔다. 낮에는 마을 길을 내고 공사장의 자갈을 날라 밥벌이하고, 밤에는 골방에 갇혀 나무 냄새만 묻히고 살았다. 팔리지 않는 바이올린을 만들며 절치부심하던 시간.“ 바이올린 제작에 관한 일본 교본 하나가 유일한 스승입니다. 스승이 없으니 ‘다작’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다른 장인들이 보통 일주일에 한 대씩 만드는데, 전 여섯 대를 만들었어요. 세 배 더 실험하고, 잠은 그들보다 3분의 1밖에 자지 않으면서. 기술은 머리가 아닌 손가락 감촉으로 기억해야 한다고 스스로 채근했습니다. 유명 연주가들의 명기를 핥아보고 냄새 맡고 손끝으로 쓸어보면서 오감으로 체득해가며, 수십 수백 번의 시행착오를 거쳤죠.” 그 부황 나는 작업에 청춘을 로열티로 바친 그는 마침내 우뚝 섰고, 1976년 ‘국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제작자 콩쿠르’에서 6개 부문 중 5개 부문을 석권하는 명인이 됐다. 1984년에는 ‘오르콩쿠르’ 마스터 메이커의 칭호도 받았다. 아이작 스턴, 로스트로포비치, 안익태, 윤이상, 강동석, 정경화 등 명연주자들이 그의 바이올린으로 연주했다. 또 일본에서 발행하는 고등학교 2학년 교과서에 그의 바이올린 제작 인생이 8쪽에 걸쳐 소개됐다. 그의 인생역정을 담은 드라마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이 후지TV 창사 특집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오다기리 조와 구사나기 츠요시, 간노 미호 같은 유명 배우들이 출연했다). 지난 10월 2일에는 조국으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기도 했다. 지금은 장남 진창호 씨와 차남 진창룡 씨가 그의 가업을 잇고 있다. 특히 진창룡 씨는 세계음악재료콩쿠르에서 1위를 할 만큼 세계적인 활 제작자로 알려져 있다.



여치 떼처럼 없는 날개 있는 체하며 불빛으로 뛰어드는 인간들 속에서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데 몰두한 장인은 여든 살이 됐다. 하지만 시작을 준비하는 사람의 뒷모습은 언제나 쫓기고 있다. 하루에 단 세 시간이부자리에 눕는 지독한 사람, 40년 동안 한 번도 거른 적 없는 새벽 6시의 조깅, 주머니마다 납덩이를 한가득 담고 걷는 새벽 운동(체력을 키워야 그 힘으로 깎고 조각할 수 있다며 매일 25kg씩 납덩이를 넣고 걸었다)…. 그는 스스로를 ‘아직도 발전 중’이라고 말한다. “스트라디바리우스도 70세부터 88세까지 최고의 악기를 만들었어요. 한국 나이로 80세가 되었으니 나는 지금부터 황금시대입니다. 바이올린 제작자로서 청춘인 거죠. 난 기대하고 있어요. 내일 더 좋은 악기를, 다음 날더 좋은 악기를 만든다는 꿈. 그것만 생각해도 나는 행복해요.”


5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비밀에 80% 정도 다가섰다고 확신했을 때 그는 남극 여행을 떠났다. 지구의 시원을 간직한 그곳에서 그는 귀에 안 들리지만 뇌를 흔드는 음파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이렇듯 여행은 바이올린 제작과 바로 이어지는데, 그동안 1백19개국을 여행했다.
6 버려진 나무로 직접 오두막을 짓고 바이올린을 만들기 시작했던 스물여덟 살 청년 진창현.


‘불가능’이라고 일컬어지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비밀’에 그는 90%정도 다가섰다고 자평한다. 물소리, 바람 소리 같은 자연의 선율이 악기에 실려야 한다며 그는 영감을 얻으러 여행을 다닌다. 그동안 1백19개국을 돌았고, 작년에는 쇄빙선을 타고 남극까지 갔다 왔다. “지구 탄생의 순간이 가장 근접하게 남아 있는 땅, 남극이 심경에 주는 자극은 대단합니다. 머리가 너무 청명해져서 잠이 안 올 정도죠. 그 땅에서 귀에는 안 들리지만 사람의 뇌를 흔드는 음파, 초음파에 대한 영감을 떠올렸습니다. 파장이 짧아 멀리 가는 초음파가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에 들어 있어요. 남극 여행을 다녀온 후 1년 만에 10% 정도 스트라디 바리우스의 비밀에 더 다가섰죠. 지금 아주 정신이 충일한 상태에서 살고 있으니 곧 나머지 10%도 정복하지 않을까요?” 자신을 키운 건 8할이 ‘역경’이라고, 예술가에게 만족과 체념은 금물이라는 그의 독백 앞에 고요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팔순의 나이에도 어질머리 같은 사랑을 앓는 그의 머리맡에 내가 바칠 한 줄의 시가 없어서 자꾸만 눈이 아프다. 달팽이가 지나간 것처럼 세상의 역사에 닦기 힘든 흔적 하나 만든 장인은 작은 목소리로 소망 하나를 덧붙였다. “내가 묻히게 될 묘를 미리 만들어놓았는데, 내 자손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인생을 걸고 만든 작품을 가진 사람들이 한 번쯤 찾아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이 소망도 언젠가 이루어지겠죠?”


7 일본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에 실린 그의 바이올린 제작 인생.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