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들의 병풍에 둘러싸인 한옥 마당에서 그가 마른 꽃잎처럼 웃는다. 햇빛이 연한 향기를 내며 그 풍경 안으로 스며든다. 모차르트 시대를 추억하게하는 눈빛으로 그가 다가서자 공기 속에서 아리아가 흘러나올 듯하다. 소프라노 신영옥. 유대계와 비견될 만큼 탁월한 한국계 음악가를 발견하는게 친숙한 일이 돼버렸지만 그럼에도 그의 활약은 우리에게 구호물자 같은 선물이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의 프리마돈나로 등극하고, 호세 카레라스와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다투어 그들의 무대로 불러들이는 소프라노로 우뚝섰다는 기별이 그런 것들이었다. 거기에 양념처럼 보태진 데뷔 스토리(10년 가까운 유학생활과 메트로폴리탄의 대역 가수 생활에 지쳐갈 즈음, 독감으로 컨디션 난조를 보인 홍혜경대신 <리골레토>의 2막 무대로 급히 불려 나가 최고의 질다를 연기한 스토리)만으로도 그는 드라마틱한 연대기를 편애하는 고국 동포들의 애정을 발동시켰다. 하지만 너무 어릴 때부터 다른 나라, 다른 주소에서 살기 시작한 그는 줄곧 떠나 있었고, 그래서 연무에 쌓인 존재 같았다. 프리마돈나의 삶의 시간을 들여다보는 건 수월하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삶의 목록과 무관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므로. 그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삶의 지향이 돼주었던 멘토 이야기를 슬며시 꺼내들었다. 그는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그의 멘토 이야기를 고요히 풀어놓는다.
어머니는 눈물로 진주를 만듭니다 “제 음반
우리 어머니 김정숙 여사는 대통령에게 저축상을 받을 정도로 근검절약하며 사셨어요. 남대문시장에서 값싼 옷가지만 사 입으셨으니까.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제가 참 짠순이예요. 이 신발도 96년도에 샀다니까. 신발을 사면 오래 신으려고 밑창부터 대요. 연주 여행 다닐 때 짐이 많기로 소문났는데, 그럴 수밖에 없어요. 호텔에서 휴지나 타월 쓰는 게 아까워 세면대 물기 닦는 스펀지도 가지고 다니고, 비누 조각 넣어 쓰는 이태리타월, 화장실용 고무장갑, 부엌용 고무장갑… 아, 머리카락 떨어져서 막히면 청소하는 이들 힘드니까 거르는 망도 가지고 다녀요. 언젠가는 나 한 명 자려고 그 큰 호텔방에 히터 돌리는 게 아까워 전화로 히터를 꺼달라고 한 적도 있어요. 일찍 이름을 날리는 동년배 음악가에 비해 스물아홉의 늦은 나이로 세상에 이름나기까지 인내할 수 있게 한 것도 어머니였어요. 수없이 오디션에 떨어져 울며 새벽기도를 하고, 몇 년 동안은 커버(대역 가수)로 지내고, 그러다 스트레스성 위출혈로 7개월이나 항생제를 먹고 살 때도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학구적인 자세를 잃지 말라’고 국제 전화로 매일 당부하셨지요. 내가 성공한 후에도 누가날 칭찬하면 “아직 배울 게 많은 아이입니다”라고 겸손해하셨고 딸이 말 많은 음악계에서 구설이라도 얻을까 봐 평소 음악계 사람들과는 한자리에 있지 않을 만큼 신중하셨고요. 제가 지금까지 스캔들 한 번 없는 것도 모두 어머니 덕분이에요. 남녀공학인 선화예고 다닐 때 남학생과 혼성으로 구성된 학급에 들어가지 않게 해달라고 교장 선생님께 부탁도 했고, 유학 시절엔 미국에있는 친지들에게 ‘비상연락망’을 만들어놓기까지 하셨어요. 어머니 덕인지, 탓인지… 하하. 그래서인지 전 보수적이에요.
내 삶의 롤 모델, 내 어머니 수술 자리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약속된 무대에 선 절 두고 독한 구석이 있다고들 했는데, 그 집념과 성실함도 어머니에게서 배웠죠. 하루 네 시간밖에 안 주무시면서 매일 딸들 위해 기도하고, 딸의 해외 활동 도우려면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민병철 영어 테이프’ 틀어놓고 공부하셨어요. 돌아가시던 그 새벽에도 나랑 함께 해외 공연 다니겠노라는 약속 지키려고 영어 공부를 하고 계셨대요. 그런 어머니모습 보고 살아서인지 전 일주일에 두세 번은 보이스 레슨, 발음 레슨을 받고, 오페라가수의 ‘몸’을 만들려고 재즈댄스, 발레, 요가에 브라질 무술 카포에라까지 안해본 게 없어요. 이번에 나온 앨범 <시네마티크> 중 웨일스 민요를 녹음할 땐 웨일스딕션을 배우려고 전문가를 찾았는데, 거의 없더라고요. 물어 물어 은행에서 근무하는 지휘자를 찾아내 코치를 받았어요. 오페라는 원래 가사가 잘 안 들린다고 하는이들도 있지만, 정확하게 부르지 못하면 제가 못 견디게 창피해요. 언젠가 녹음이 흡족하지 않게 끝난 적이 있는데, 어찌나 속상하던지 한숨도 못 자고 음반사에 딱네 자만 적어 이메일을 보냈어요. ‘속상해요’. 깐깐하다고 하겠지만, 프로페셔널이 반드시 가져야 할 책임감, 이걸 어머니가 갖게 하신 거죠. 어머닌 암 투병 중에도 제 공연이 끝날 때까지 알리지 말라고 가족들에게 당부했어요.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이미 49재였어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난 무대에서 관객의 박수를 받고 있었던 거죠.”
훗날 소프라노 신영옥 씨는 자신의 ‘보칼리제’를 돌아가신 어머니께 헌정했다. 그가 부른 ‘가을밤’을 듣고 있노라면 명치께가 아파온다. 무대 공연이 아니라 스튜디오 녹음에서 이런 곡을 어쿠스틱으로 부를때 어지간한 성악가라면 백이면 백 감정 과잉으로 흐르는 법인데, 그의 노래는 담담하다. 그러면서도 무거운 슬픔이 안개처럼가라앉는다. 습자지 두께 정도의 음악적 소양밖에 갖추지 못한 문외한에게 <리골레토>의 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루치아(그의 이름을 알린 비련의 주인공 역)보다 ‘가을밤’이 더 깊숙이 다가오는 이유다. 귀가 아닌 가슴과 기억으로 듣게 되는 그의 노래.
아버지의 이쁜이, 영옥 씨 “우리 아버지, 신광섭 선생. 고단한 시절을 지내왔지만 내 마음이 이 정도라도 찌들지 않은 건 아버지 덕이에요. 아버지는 아직도 날 ‘이쁜아, 이쁜아’ 부르세요. 대학교 때까지도 무릎에 앉힐 정도로 사랑이 극진하셨죠. 꼼꼼한 건 또 이루 말할 수 없는데 내 일기장, 내가 외국에서 보낸 카드, 내 기사가 실린 신문?잡지까지 표지에 페이지 번호 써서 다 모아두셨어요.“이쁜아, 이거 어떻게 먹는디 아나우?”하며 아직도 생선 살을 발라주세요. 그렇게 아버지가 숟가락에 올려놓는 조기 살 한 점이면 들쭉날쭉한 내 마음도 어느새 배가 부르지요. 스스로 페이스를 조절하려 애쓰는 아버진 일흔 살이 넘었는데도 배에 王자가 있을 정도예요. 당신이 할 수 있는 일, 아닌 일을 지혜롭게 구분하세요. 내가 어느 정도 음악적 영역을 지켰다고 한다면 그건 아버지 성정을 닮아서예요. 그런 탓에 사람들이 몇몇 역할만으로 날 기억하는 단점도 있지만. 서정적인 감정 묘사에 강한 내 목소리(리릭 콜로라투라)는 풍부한 성량의 극적인 목소리(드라마틱 콜로라투라)가 적당한 역에는 맞지 않아요. 그래서 아무리 좋은 배역이 들어와도 저와 맞지 않으면 사양해요.내 소리의 장점과 한계를 아는 거죠. 역할을 맡으면 학생으로 돌아간 듯 공부하려고 애쓰고요. 하지만 하면 할수록 부족한 사람이란 걸 느껴요.
전 아버지의 소박함도 좋아요. 지금도 아버진 제 공연 때 전철 타고 오세요. 그러면서 “나는 나이가 많아서 전철비도 안 내 좋구만” 하시죠. 저를 장막 안의 사람으로 아는데, 저도 아버지 닮아 이마트에서 이불 구경하고 우동 먹는 거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일 뿐인 걸요. 돈도 많지 않으면서 여기저기 기부금 받으러오는 사람들 거절하지 못하는, 그래서 아는 사람은 철없다고 걱정하는 평범한 여자. 얼마 전 아버지와 어머니 산소에 갔는데 “하늘에서 뭐 하고 있는 기야? 이쁜이나 봐줄 것이지” 하면서 우세요. 제가 정신적으로 건강한 건 바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늘 기도하는 언니들의 힘이에요. 저도 옛날엔 ‘이 빌딩에서 떨어지면 죽겠지? 깨끗이 죽어야지 흔적이 남으면 안 되는데’ 별 생각을 다 하며 괴로워한 시절이 있었죠. 하지만 그 시절을 이기게 한 건 가족이에요. 한국 나들이가 잦아진 걸 보고 어떤 사람들은 ‘신영옥 지는 거 아니야?’ 걱정하는데, 그게 사실이라 해도 감사해요. 왜냐, 아버지도 2년에 한 번 볼까말까 했는데 아버지도 자주 보고. 세상엔 천재도 많은데, 이만큼의 달란트밖에 없는 내가 유명 성악가가 된 것도 감사, 감사해요.
인생에서 0.1%도 아쉬운 게 없어요. 왜냐하면 내 삶이니까. 그리고 저녁이면 기도해요. ‘오늘 미운 사람을 용서하고, 오늘 건강함을 감사하고, 내일도 건강할 수 있음을 허락받고, 상처받은 아이들을 구해달라’고. 저 행복한 인생 맞죠?”
물정에 통달한 척하지 않아 더 마음이 가는 61년생 소띠, 그는 어린아이가 풍기는 것 같은 단 냄새를 가졌다. 안분지족, 소박함, 순진함…. 그리고 영혼을 쓰다듬는 힘이 음악에 있음을 알려주는 신실한 목소리가 있다. 호사가들의 기우와 달리 그는 여전히 세계 유수의 극장에서 공연 일정을 잡지 못해 안달이 난, 성층권의 성악가다. 그리고 또 하나. ‘감사, 감사’를 되뇌는 신영옥. 바깥어른 같은 어머니, 안주인 같은 아버지. 두 사람이 삶을 바라보는 원근법을 배운 그는 세상을 행복한 눈으로 볼 줄 안다. 물론 그 바탕엔, 세상에는 슬픔 없이 벙그는 꽃이 없고 아픔 없이 영그는 열매가 없음을 가르쳐준 두 어른이 있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오후, 따뜻해서 쓸쓸한 가을 햇살이 시를 뒤덮고 있었고, 라디오는 덤덤히 대관령의 첫서리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