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서울 성북동 '효재'의 마당에서 남편에게 고이 싸보내는 연잎밥과 함께 이효재 씨가 앉아 있다.
(오른쪽) 남원의 소박한 한옥에 살고 있는 임동창 씨. 아내가 싸보낸 연잎밥 도시락 앞에서 환하게 웃는다.
사진 촬영 때마다 곧잘 입는 알록달록한 조끼는 각시가 내려올 때마다 깁고 꿰매준 옷.
자연주의 살림법으로 잡지와 방송을 통해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이효재 씨. 그에게는 함께 살고 있지 않지만 엄연한 남편인 피아니스트 임동창 씨가 있다. 이들 부부는 2002년 두 사람이 40대 중반인 나이에 늦은 결혼을 했다. 경기도 용인의 시골집에서 3년을 그림처럼 살다가 지금은 각각 서울과 남원에서 따로 지내는 중이다. 이효재 씨는 성북동 자신의 한복집 ‘효재’에서 자연주의 살림법을 전파하고 있고, 임동창 씨는 남원의 소박한 한옥에서 조상의 음악을 체계화시키는 자신만의 작업을 한다. 서로의 재능과 갈 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하기에 기약 없는 긴 생이별을 받아들였다. 한 지붕 아래 각시와 서방으로 따습게 살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이 대수롭지 않을 정도로 이 부부는 강한 신뢰와 애정을 갖고 있다. 각기 다른 하루를 살고 있는 두 사람의 자리를 찾아가보았다.
우리는 서로가 없어도 잘 살 부부 하루 15시간씩 일을 하는 여자, 잠시도 가만히 쉬거나 놀지 못하고 걷는 시간에 잡초라도 뽑아야 하는 살림꾼. 이효재 씨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병이 나지 않았을지. 어머니의 뒤를 이어 2대째 한복집을 하고 있는 그는, 요즘 혼수 한복뿐 아니라 남다른 자연주의 살림법과 요리법으로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잡지와 방송을 통해 그의 뛰어난 살림 솜씨가 줄기차게 소개된 탓이다. 그는 책 <효재처럼> <효재의 보자기 선물>로 자신만의 알뜰살뜰 어여쁜 살림 솜씨를 담아낸 데 이어, 요즘엔 동화책까지 쓰고 있다. 참으로 재주 많은 여자다.
“나야 남편 옆에서 살림하는 게 최고로 행복한 여자지요. 그런데 남편이 집을 나가고 없으니 그 에너지를 밖으로 분출하는 거죠. 결혼할 때 남편이 조건으로 내건 것이 있어요. 첫째, 나는 내 맘대로 살 테니 당신도 당신 마음대로 살라. 둘째, 내가 달라고 할 때 시원한 물을 달라. 셋째, 나는 피아노로 우리 선율을 정리할 때까지 돈을 안 벌겠노라. 그리하라고 했지요.” 결혼해 돈도 안 벌고 자기 맘대로 살겠다는 남편, 한때는 스님으로 살기도 했다가 무대에선 맨발로 방방 뛰어다니는 괴짜 피아니스트 남편이 어디가 그렇게 좋았을까. “남들은 그를 괴팍하고 센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의외로 여린 면이 있어요. ‘괴짜다, 천재다’ 하는 평가를 들으며 외로움과 고독 속에 살았을 그가 내게는 보였지요. 또 그이는 무엇보다 돈 앞에 당당할 줄 아는 사람이고, 세상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사람이에요. 아, 내가 존경할 수 있겠다, 내 머리칼을 잘라 술을 받아다 주어도 좋은 사람이겠다, 그래서 결혼했지요.”
이 부부는 간단히 혼인신고만을 하고 경기도 용인의 그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같이 사는 동안 남편과 자신을 위해 정말 예쁘게 살림을 했다. 밭에서 키운 야채로 날마다 맛있는 요리를 하고, 집 안도 아기자기하게 꾸몄다. 가난하게 자라 도시락 한 번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는 남편의 말에, 날마다 정성껏 도시락을 싸놓고 서울로 출근했다. 하지만 힘든 점도 있었다.
“누가 음악가와 살면 낭만적일 거라고 했나요? 밤새 남편이 연습하는 소리를 듣느라 아침이면 머리가 지끈거렸죠. 하도 피아노 페달을 밟아 발바닥이 녹색이 되어 쓰러져 자는 남편을 보면서 아침을 지었어요. 하루는 머리가 멍해 깜빡 맨손으로 냄비를 잡다가 손을 데고 부엌 창 너머를 보니 무덤이 보이대요. ‘그래 인생은 다 죽어가는 거야, 이혼한 여자는 혼수 한복집을 못할 것인데 그냥 살아야지, 사람들 말이 ‘소녀’와 ‘야생마’가 결혼해서 그림같이 산댔어, 믿어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멋지게 살아야 해.’ 그렇게 기운을 냈어요.”
결혼하고 몇 달이 지나면서 남편이 결코 길들일 수 없는 남자임을 깨달았다. 이 남자를 생긴 그대로 받아들여야겠구나 하고 생각을 고쳐 먹었다. 그 뒤로 그는 자기 신명에 살았다. 용인 집에서 삼청동 효재숍까지 오가는 데 2시간이나 걸리는 통에 버스에서 침 흘리며 졸 정도로 피곤했지만, 집으로 돌아와 ‘다녀왔어요’ 하면 남편이 ‘어’ 하는게 그렇게 좋았다. 마당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아 ,나는 시집을 참 잘 왔구나’ 기뻐했다.
1 책 <효재처럼>에도 실렸던 부부의 사진. 별난 남편은 사진 찍는 것도 싫어해 함께 있는 사진이 거의 없다.
2 오랜만에 남원의 남편과 통화 중인 이효재 씨.
3 이효재 씨가 남편과 제자들이 먹을 연잎밥을 싸고 있다.
4 그가 요즘 빠져 있는 보자기 아트.
5 효재 숍의 현판 글씨는 남편이 써준 것이다.
남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니 남편이 어디에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전국 산골을 돌아다니며 피아노를 뚱땅거리고 제자들을 가르쳐야 하는 사람이고, 자신은 효재라는 이름으로 아직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떨어져 있고, 서울을 싫어하는 남편을 위해 보고 싶을 때면 이효재 씨가 남원으로 내려간다. 연잎 향 배도록 찐 찹쌀밥을 고운 보자기에 싸 들고서.
남편은 그에게 위로와 걱정은 해주지만 기댈 때 받아주지는 않는다. 인간은 모두 고독한 존재이므로. 기댈 때 받아주면 어떻게 독립적인 성숙한 인간이 될 것인가. 때문에 이들 부부는 서로가 없어도 잘 살 부부란다. “남편을 만나서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어요. 이제야 태어나길 잘했다, 지구에 와서 50년 만에 지구의 생리를 알았다 싶어요. 내가 우리 아버지 딸로 태어난 것 다음으로, 우리 남편을 만난 것이 제일 잘한 일 같아요. 런던올림픽 때까지만 열심히 활동해서 우리 보자기를 세계에 알린 후에, 그 다음에는 산에 들어가서 남편하고 같이 살 거예요.”
나이 들며 사랑의 형태가 바뀐다 이효재 씨가 정성껏 싸준 연잎밥을 들고 임동창 씨를 만나러 남원으로 갔다. 남원시 송동면 영동리, 피아노 소리가 새어나오는 두 채의 한옥. 이곳에서 그는 일곱 명의 제자들과 함께 기거하고 있다. 그는 최근에 오랫동안 매달려온 작업을 끝냈다고 한다. 우리 음악을 지금 시대에 맞게 옷을 입히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그의 말을 빌면 ‘한국 머슴아가 서양 여자랑 결혼해서 혼혈아를 낳은’ 것 같은 일이다.
“저는 ‘콩장군’ 같은 사람이에요. 하나만 파고 들어가서 하는 성격이고, 그 일을 하는 동안 굴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죠. 그 굴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현실에 대한 그 어떤 이야기도 듣지 않죠. 하지만 우리 각시는 세상에서 푸닥거리를 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같이 살면서 보면 하는 짓이 너무 천재예요. 그런 끼를 가진 사람이 시골에만 있으면 뒤틀리고 탈이 나죠.” 항상 넘치는 에너지로 현재를 사는 각시에게 그는 ‘지금’이라는 호를 붙여주었다. 자신의 호는 ‘그냥’. 각시를 위한 일은 곧 그를 위한 일이기도 하기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
물론 아쉬울 때도 있다. 함께 있었던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고 깨가 쏟아졌기 때문에. 하지만 사랑의 형태도 진흙처럼, 물처럼 자유롭게 변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그릇에 따라 자유롭게 담겨야지, 얼음처럼 딱딱하게 정체되어 있으면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늘 둘이 붙어 있어야만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1, 2 피아노만 덩그러니 놓인 한옥 방에서 하루 종일 흥에 겨워 피아노 치는 것이 그의 일이다.
3 아내가 싸준 연잎 밥을 곱게 풀었다.
4, 5 제자들과 함께 살고 있는 한옥의 풍경. 청소와 식사 당번을 정해 조촐하게 지내면서, 때때로 자연에서
얻는 먹을거리를 큰 즐거움으로 삼는다.
“나이에 따라서도 사랑은 다른 모습이지요. 어렸을 때 육신을 탐하는 사랑이 있었다면, 나이가 들고 나면 그득한 마음으로 사랑하게 돼요. 우린 나이가 들어 만났기 때문에 더욱 그렇죠. 처음에 만날 때 내가 물었어요. 나의 어디가 좋으냐고. 각시가 그러대요.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나가는 동안 아리랑을 연주하고 있는 당신을 보고 참 따뜻한 사람이구나 싶었다고. 그 이야기를 듣는데 기분이 이상해지대요. 나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진실로 이해받은 적이 없었는데, 내 진짜 속을 그대가 알아봤구나, 고맙다고 했지요.”
놀랍게 잘 맞는 사이라지만, 그는 떨어져 있으면서도 다정한 안부 전화조차 잘 하지 않는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겠거니 생각하고 용건이 있을 때에나 전화를 한다. 서울은 꼭 가야 하는 일이 생겨야 마지못해 갈 뿐이고, 이효재 씨가 내려가면 ‘왔어?’ 한마디가 반가운 표시의 전부다. 대신 훌륭한 글귀를 보거나 좋은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우리 각시 보라며 몇 자 적어 보내준다. 그러면 각시는 그것을 냉장고에 붙여놓는다. 전국을 돌아다닐 때에는 음식하기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산나물이나 특산물을 부쳐주고, 그릇으로 쓰라고 전복 껍데기를 보내기도 한다. 이효재 씨가 저잣거리에서 푸닥거리하느라 지쳤을 때 ‘우리 각시가 씨앗을 뚫고 나오느라고 지진을 만났구나’하며 마음을 읽어준다. 공연이나 사진 촬영할 때 곧잘 입는 알록달록한 조끼는 각시가 내려올 때마다 깁고 꿰매준 옷이다.
“서로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이런 마음으로는 안 되지요. 상대방이 내 것입니까, 내 장난감입니까? 내가 먼저 그런 이기적인 마음에서 자유로워져야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임동창 씨는 음악 작업의 큰 숙제를 끝냈다지만 내년 3월까지는 함께 있는 제자들과 계속 이곳에서 공부할 예정이다. 이들이 잘 따라와 주어서 좋은 결실을 맺으면 무엇인가 재미있는 일을 벌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의 다음 방향은 자신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어디에 있건, 그의 마음과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아내는 ‘지금’ 이효재이고, 이효재가 어디에 있건 가장 사랑하는 남편은 ‘그냥’ 임동창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