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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호 作,‘Tree #1’ (2005)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내 남편을 위해 오늘도 밥을 짓고 셔츠 깃을 문질러 빱니다. 그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나도 한번쯤은 남편과 떨어져 있고 싶은 마음이 산불처럼 번집니다. 그러나 그 희망은 곧 죄책감에게 자리를 내줍니다. ‘다른 사람 돌보기’의 역사만 줄곧 써온 아내들은 그 ‘떠남’이 ‘일탈’이나 ‘이탈’, ‘직무유기’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마음이 곤두섭니다.

난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이고 딸이고 동료이지만, 그런 삶의 레테르를 떼어낸다면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인가요? 남편이 없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요? 이 사람 없이도 내가 삶의 궤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들에 선뜻 답을 내놓을 수 있나요? 주부 대상 설문 조사에서 인생에서 가장 중시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48%가 남편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본인이라는 대답 42%를 앞질러버린 것이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었군요. 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내에게 남편은 위안인 동시에 부담이고, 반려자인 동시에 족쇄입니다(물론 남편에게 아내도 그러하겠지요). 결혼 생활도 일종의 노동이니까요. 더구나 결혼은 종신 임기제인 데다, 비상 탈출구라고 해봤자 가출.이혼.배우자의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이 전부인, 닫힌 문입니다. 남편과 아이의 인생 폭이 넓어지는 동안 내 인생은 점점 실개천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자는 집 때문에 좁아지고, 남자는 그 여자 때문에 좁아집니다. 그렇다면, 부부가 행복하기 위해 아내가 이 집을 잠시 떠나 자신과 더 가까워지는 그런 거처에 도착하는 게 또다른 해법 아닐까요? ‘돌보기’ ‘타인의 요구’ ‘책임감’이 넘쳐나지 않는 아내만의 공간으로 말이지요. 완전하고 깊게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 자신 속으로 잠수할 수 있는 시간 말이지요. 김한자 여사(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서 김혜자 씨가 연기한 배역)처럼 ‘영수 애미’가 아닌 ‘김한자 씨’로 살게 되는 시공간 말입니다. 우리는 이 ‘자리 비움’의 시간을 ‘결혼 안식 휴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이렇게 떠나기 위해선 아내는 ‘큰맘’을 먹어야 하고, 남편은 ‘크게 양보’해야 합니다. “엄마만 힘든 거 아니야. 너무 이기적인 행동이야!” 분리불안에 휩싸여 반항하는 아이들도 다독여야 합니다. 하지만 아내가, 엄마가 행복하지 않으면 가족 누구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한 부부라는 더 좋은 ‘전망’을 보기 위해 한발 물러나 멀리서 바라보게 되는 시간, 내게 그가 필요함을 잠시 잊는 시간, 그에게 우리 관계가 필요함을 기억하는 시간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이건 결혼과 자신을 둘 다 존중하기 위한 선택이기도 합니다.
떠나서 맛보는 그것이 ‘황홀한 공허함’이든, ‘일인분의 고독’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달이든, 일 년이든 떠나 홀로 지내다 보면 자신이 인생에서 다시 찾고 싶었던 것이 또렷이 다가올 것입니다. 남편.아이들과의 토닥거림, 신문의 십자말 풀이, 친구, 나…. 그리고 떠나고 싶어 안달했던 그 아내는 집에 가고 싶어 안달하는 여자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또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날 가두고 있던 건 결혼이 아니라 바로 내 안의 장벽이었다는 것을. 이 사실을 깨닫고 나면 남편을, 가족을 다시 온전히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귀가를 담보로 한 여행, 결혼 안식 휴가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