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 아래 반짝이는 순백의 웨딩드레스. 신부라면 꿈꾸는 로망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광택 없이 다소 거친 질감의 내추럴 톤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입는 신부도 있다. 잘 썩지 않는 화학 섬유 대신 농약 없이 자란 천연 섬유인 쐐기풀(네틀) 섬유로 만든 친환경 웨딩드레스다. 표백도 안 하고 형광 처리도 안한 원단이라 화려하거나 자르르한 멋은 없다. 그러나 번쩍거리는 결혼식이 구태의연하고 거북스럽다는 젊은 신부들이 이 소박한 드레스를 택한다. 물론 일반 웨딩 숍에는 없는 드레스다. 그린 디자이너 이경재 씨의 작품이다. 그는 쐐기풀 섬유 드레스 뿐 아니라 옥수수 전분 원단이나 한지 섬유로도 웨딩드레스를 만든다. 그가 디자인한 친환경 예복을입고 결혼한 부부가 지금까지 여덟 쌍, 10월에 한 쌍이 더 웨딩 마치를 울리면 모두 아홉 쌍이다. 친환경 제품이 늘어가는 추세이긴 하지만, 결혼식 예복에도 그린 디자인을 도입한 시도가 신선하다. 그 계기는 무엇일까?
“서너 시간의 예식 및 기념 촬영을 위해 값비싼 드레스를 맞추는 일이 과연 바람직할지 돌아봤어요.
드레스를 대여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사실 새 드레스 한 벌은 4~6번 정도 대여해주면 낡아서 폐기해야 한답니다. 웨딩드레스 수명이 생각보다 짧아서 놀랐어요. 그래서 차라리 1회용 웨딩드레스를 만들되, 폐기했을 때 환경이 오염되지 않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에서 그린 디자인을 공부하던 이경재 씨는 수업 시간에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비닐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전분 비닐로 웨딩드레스 두 벌을 만들어 2005년 친환경 상품 전시회에 출품했다. 반응이 뜨거웠다. 작품 소재에 아쉬움을 남긴 채 그는 다음 해 일본 친환경 상품 박람회에 견학 갔다. 목마른 자가 물도 빨리 찾나 보다. 그는 여기서 한 일본 업체가 개발한 옥수수 전분 섬유를 발견했다. 입이 딱 벌어졌다. 마치 실크 같았다. 옥수수 전분이 재료라고 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섬세하고 내구성 있어 웨딩드레스 소재로 안성맞춤이었다. 작업에 박차를 가해 이듬해 ‘톰보이 T스페이스’에서 에코 웨딩드레스 15벌을 선보인 <대지를 위한 바느질>전을 열었다. 본격적으로 ‘그린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렸다. 사실 이경재 씨도 친환경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학 졸업 후 병환으로 강원도 횡성으로 요양 간 아버지를 따라 귀농해서 복분자 농사도 짓고 청국장도 만들고 펜션도 운영하며 살고 있던 터였다. 우연히 EBS TV에서 윤호섭 교수의 그린 디자인 강의를 시청하는데 가슴속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그것을 계기로 그린 디자인 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맨 처음 실마리가 풀린 것이 바로 웨딩드레스였던 것이다. “옥수수 전분 섬유는 땅에 묻으면 미생물에 의해 4주 안에 생분해되어 땅으로 돌아갑니다.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나야 썩는 합성 섬유에 비하면 획기적이지요. 친환경 섬유는 기능도 우수합니다.
(왼쪽) 쐐기풀 섬유로 만들고 망사와 비즈로 장식한 에코 웨딩드레스.
(오른쪽) ‘대지를 위한 바느질’에서 디자인한 청첩장은 액자로도 쓸 수 있다.
가령 한지로 만든 섬유는 통풍이 잘되고 흡습·방습 기능이 뛰어나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합니다.” 드레스 자체도 친환경적이지만, 이렇게 의미 있는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올리며 하객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 또한 그린 디자인이다. 이경재 씨의 에코 웨딩드레스는 대여복이 아닌 맞춤복이다. 그는 드레스 한 벌을 디자인하는 기간을 두 달 이상 잡는다. 처음 한 달 동안은 틈날 때마다 신부와 만난다. “신부들이 입고 싶어 하는 드레스는 자신이 제일 잘 알아요. 신부가 원하는 드레스에 가장 가깝도록 하기 위해서 마음 열고 대화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일을 하며 신부들의 귀엽고 순진한 욕심을 발견했다. “신부들은 사심 없이 예뻐 보이고 싶을 뿐이에요. ‘튀고 싶다’가 아닌, 그 신부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으로 찬탄받고 싶은 거죠.” 그래서 그가 신부의 취향에 맞게 세심하게 디자인한 에코 드레스에 감동한다. 특히 신랑들이 좋아한다. 대부분 신부는 드레스에 묻혀버리는데, 이 드레스를 입으니 아내의 얼굴이 빛나더란다.
“친환경 디자인이란 곧 ‘친인간적’인 디자인이더군요.”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사람들의 삶을, 온기를 담고 싶다는 꿈이 있다. 그 한 사람을 오롯이 드러낼 수 있는 디자인을 하려면 조금은 느리게, 그리고 정말 그 사람에게 맞는 길을 찾아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진정 한 사람을 위하는 디자인을 하는데 어떻게 그 사람을, 그리고 자연을 해치는 디자인이 나오겠는가. 그렇기에 그린 디자인이란 곧 사람과 가장 친한 디자인이다.
고객들의 요청으로 친환경 청첩장 디자인, 친환경 데커레이션도 맡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청첩장에 쓰이는 봉투를 재생지로 사용하면 한 해에 10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베지 않아도 되죠. 한 번 보고 버리는 편지가 아닌 액자로 재활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습니다.” 또한 어떤 커플의 야외 결혼식에서는 잠깐 쓰고 버리는 생화를 이용한 데커레이션 대신 작은 화분을 활용해 공간을 꾸미고 식이 끝난 뒤 하객들에게 선물로 나눠줬다.
사실 ‘그린 디자인’ 개념도 아직은 생소한 시대다. 그런데 갓 서른 나이의 이경재 씨가 몇 년 새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발전적인 아이디어를 지지해준 응원 부대 덕분이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쐐기풀 원단을 개발한 옥탄스의 정정철 사장, 대량으로 천연 염색을 할 수 있는 특허 기술을 보유한 동일염직, 천연 염료를 제공해준 지구상사, 친환경 종이를 판매하는 두성종이 등 친환경 업체, 그리고 그의 멘토 윤호섭 교수…. 이들의 푸릇푸릇한 지원 사격을 받으며 그는 웨딩드레스뿐 아니라 여러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 중이다. 천연 염색한 쐐기풀 섬유로 만든 병원 환자복을 국내 최초로 도입한 휴먼영상의학센터나 오가닉 코튼 병원복을 도입한 신건강인센터의 프로젝트를 필두로 앞으로 천연 염색한 청바지도 선보일 예정이다.
(왼쪽) 수수한 웨딩드레스에 어울리는 부케로 ‘원 파인 데이’에서 디자인했다.
(오른쪽) 면보다 질기고 피부에 안전한 쐐기풀로 만든 앞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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