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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기울여 들어보니]소설가 한승원 씨 난 낡아가지 않고 늙어갈 것이오
<불의 딸> <아제아제 바라아제> <해변의 길손> <원효> 등 한 시대의 습속을 대하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한국 문학의 든든한 버팀목이 된 소설가 한승원 선생. 그가 정약용에 대한 5년 동안의 긴 탐구 끝에 장편소설 <다산>을, 스님들 사리처럼 몸속에서 만들어진 시를 모아 시집 <달 긷는 집>을 냈다. 과속의 세상에서 영원의 의미를 건네는 그의 이야기에 마음이 달아오른다.


율산마을 갯가에 막걸리처럼 부연 안개가 끼었습니다. 아, 구수해라, 안개 냄새. 갯내까지 머금은 바람결에 뻐꾹새가 한 목청 실어냅니다. 한승원 선생의 시 ‘치자꽃’이 입 안에서 돌돌거립니다. “아침 안개 너울 쓴 / 신부처럼 우윳빛 이빨 가지런히 내놓고 웃는 그녀의 가슴을 / 킁킁 코끝으로 더듬는데 뒷산의 뻐꾹새 / 뻐꾹뻐꾹 앞산의 장끼 / 꿩꿩 동네방네에다 소문내고 있습니다. / ‘저것들, 저것들 / 시방, 시방 / 사랑하고 있네에!’ // 그래, 차라리 사랑은 / 그렇게 들통나버려야만 / 드러내놓고 신명나게 너울거릴 수 있습니다 / 호들갑스런 너스레와 떠벌림을 축복 삼아.” 아, 이 여름은 미치게 아름답군요.

죽로차(대나무 이슬을 먹고 자란 찻잎으로 만든 차) 밭에서 김을 매다 땀을 씻어 올리는 어르신네, 우릴 보고 히죽이 웃습니다. 소설가 한승원 선생입니다. 금방 내린 눈처럼 여백만 남은 눈매와, ‘하소’ 체의 말투가 뿜는 훈기와, 헤어진 아버지를 보는 것 같은 뒷모습…. 그리고 그 머리 위에 얹힌 밀짚모가 참 멋있습니다. 멋을 쓰신 아버지.

올해로 등단 40년을 맞은 작가는 전라남도 장흥 율산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27년 동안 살던 서울 우이동을 떠나, 고향 신덕리와 바다가 맞닿은 율산마을에 자리 잡은 지 13년째입니다. 마을 어촌계에도 들고, 농협에도 가입하고, 마을에서 손바닥만 한 바지락 밭도 얻었습니다. 집 앞 ‘여닫이바다’에서 나는 꼬막·바지락·꼬시락 따위를 먹고, 아내와 죽로차 밭도 가꾸고, 아흔네 살 노모 모시며 수련꽃처럼 살고 있습니다. 집 뒷동산에 ‘해산토굴海山土窟’이라는 글집 하나 만들어 그 안에서 <추사> <초의> <흑산도 하늘 길> 등 수많은 저작물을 만들어냈습니다. 군청 문화관광과 사람들이 선생 찾아오는 이들 편하라고 마을 어귀에 ‘해산토굴’이란 입간판을 세워놓은 뒤로, 몇몇 사람은 ‘토굴’에 모신 부처님 배알하겠다고, 몇몇 사람은 새우젓을 사겠다고 찾아온답니다. 그는 그저 “내가 하늘경전 바람경전 구름경전을 모신 채 내 삶을 곰삭게 하는 토굴이나 / 새우젓을 맛깔스럽게 익히는 토굴이나 / 그게 그것일 터입니다.”(시 ‘지네와 새우젓’ 중)라고 화답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나그네 당신, 보았습니까, / 안개 낀 봄밤에 별들이 / 여닫이바다하고 혼례 치르는 것, 보았습니까, / 한여름 보름달이 / 마녀로 둔갑한 바다와 밤새도록 사랑하고 아침에 / 서쪽으로 가며 창백한 얼굴로 비틀거리는 것, 보았습니까, / (중략) / 여닫이바다의 몸짓이 사실은 제 마음을 늘 그렇게 표현해주고 있다는 것.”(시 ‘여닫이바다의 혼례’ 중)

“환장하게 좋아한다”는 <귀거래사>의 한 대목 “마음 비운 구름은 산꼭대기 바위틈을 돌아 나오고 / 새는 날다가 지치면 돌아올 줄 안다”처럼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툭하면 숨차고 얼굴 창백해지는 심부전증을 달래보자고 결심한 것도 첨엔 있었는디, 길의 마침표를 고향땅 안에서 찍겠다는 결심이 더 컸제. 바다에서 나고 자랐응께 다시 바다로 와야제.”

그에게 바다는 늘 소설의 모태였지요. 등단 작품인 ‘목선’부터 한국문학작가상을 받은 <포구의 달>, 현대문학상을 받은 <갯비나리>, 이상문학상을 받은 <해변의 길손>, 그리고 <포구> <앞산도 첩첩한데> 등에 이르기까지 바다는 그에게 하나의 운명, 근원이었습니다. 그 바다에 한 묻고 사는 어부들의 이야기는 가난한 목숨들을 피붙이로 느끼는 ‘갯사람’ 작가의 숙명일 것입니다. “내가 고향 바다로 돌아갔더니 사람들이 ‘징허지도 않냐. 더 좋은 소설 쓰려면 바다 얘기는 집어치우고 다른 이야기를 써얄 텐데, 왜 주제 파악을 못하느냐’ 하대요. 하지만 분투하듯 살다가 모다 돌려주고 흘러 들어가고 싶은 곳, 그게 바다여요. 고향 내려오고 나서 바다 공부 많이 했소. 섬이 남성이라면 바다는 여성이오. 여성이 남성을 포용한 것이 바다제. 또 화엄의 바다라는 것도 알게 됐소.”



선생은 그 ‘징헌’ 바다를 아침저녁으로 산책하는데, 꼭 휴대전화를 들고 나가 서울 바닥. 광주 바닥의 그리운 사람들에게, 쇠붙이 소리에 지쳐 있을 님들에게 파도의 말을 들려준답니다. 송화기에 대고 바닷바람을 먹고사는 어부들, 그물더미에 부지런히 집을 짓는 왕거미의 작업 현황 따위를 중계방송한다는군요. ‘철프럭 철프럭 쏴아 쏴아’ 하는 파도 소리를 ‘고독 참을성, 고독 참을성’으로 알아들으라고 청하기도 하면서. “시골에서, 바다 가까이에서 산께 느림이 몸에 배더구만요. 내가 느려서 재주를 넘지 않응께, 다른 사람들이 재주 넘는 것이 다 보이데. 내가 재주를 넘으면 어지러워서, 다른 사람들 재주를 볼 수가 없어요.”

“우렁이각시 같은 여선생님은 여름철에 허벅지 드러나는 치마를 입곤 했는데, / (중략) / 생활지도 주임은 그것을 압수하면서, 이 손거울 가지고 다녀야 하는 이유가 있으면 교무실로 와서 말하고 찾아가거라 했고, 키 작달막한 아이가 교무실로 와서 / ‘꽃한테 제 얼굴을 비쳐주려고요’ 했습니다. / (중략) / ‘치자꽃, 족두리꽃, 금강초롱꽃들이 피면 앞에다가 체경을 세워놓아요, 밤이면 초롱불을 켜 달아놓기도 해요.’ / 가슴에 불이 환히 켜진 나는 생활지도 주임에게, ‘저는 가짜 시인이고, 이 아이하고 이 아이의 할머니하고는 가슴으로 시를 쓰는 진짜 시인입니다’ 하며 손거울을 찾아 돌려주고, 이후 그런 손거울 하나를 장만하여, 세상의 모든 꽃들에게 얼굴 보여주기를 부지런히 하고, 그 손거울을 무수히 제작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팔고 또 팔면서 이때껏 잘 살아오고 있습니다.”(시 ‘손거울’ 중)

고향 바다로 돌아왔지만, 그 귀거래사가 비감하거나 극적으로 치닿지는 않습니다. 풍랑의 세계에서 흠씬 두들겨 맞고 돌아온 귀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들려준 ‘한승원의 일대기’는 이렇습니다. 열한 명의 형제 중 여덟만 남은 남매 중의 둘째 아들, 문학병·열정병이 들기 시작한 고등학교 시절, 고등학교 갓 졸업한 뒤 농사 짓고 김 양식 하던 3년의 시간…. 문학 공부 한답시고 죽치고 있는 둘째 아들에게 쟁기질시키며 “남의 속에 든 글도 배우는 사람이 눈에 뻔히 보이는 이 따위 쟁기질 못하겠느냐? 내 불 내가 켜고 게를 잡아야지 남의 불을 뒤따라 다니면서 게를 잡는 놈은 항상 슬픈 법이다” 가르치던 아버지 한용진 옹 이야기에서도 난폭한 시절이라곤 찾을 길이 없지요.

“차라리 법 공부를 하면 빤스를 팔아서라도 뒤를 대준다”던 아버지 호령을 박차고 서라벌예대 문창과로 김동리 선생을 찾아간 문청 시절, 덜 익은 소설을 들고 찾아가도 꼼꼼히 가르쳐주신 다음 제자를 대문 밖까지 배웅하면서 등을 툭툭 쳐주시던 동리 선생, 이문구·박상륭·이건청·조세희라는 걸출한 동기동창들 자랑, 국어 선생 하며 새끼들 셋과 마누라 밥 벌어 먹이던 시절, 문예반이었던 여제자가 머리 깎고 중노릇하다가 환속한 사연(나중에 그 여제자의 이야기는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세상에 나왔다. 그는 “나는 글을 통해 거짓 삶을 살았는데, 그 여제자는 진실된 삶을 자기 몸으로 살았다”고 술회했다), 소설다운 소설 쓰려고 학교 선생 그만두고 무작정 식솔 끌고 상경한 용기, 그 뒤로 줄줄이 ‘터진’ <불의 딸> <아제아제바라아제> <해변의 길손> <원효>…. 이 모든 것도 목에서 컥 소리 나는 구절양장의 세월은 아닙니다. 그의 작가 인생을 두고 평탄한 오솔길이었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그 오솔길은 죽로차처럼 맑은 그의 성정이 만든 인생 아닐까요.

“물은 배를 뜨게 하기도 하지만 배를 전복시키기도 한다. 물은 백성이고 임금은 배이다. 임금도 잘못하면 백성들이 그를 징치하고 바꿀 수 있다. (중략) 실천하지 않은 어짊과 예는 어짊과 예가 아니고, 어짊과 예를 실천하지 않은 선비는 선비가 아니다. (중략) 백성에게는 밥이 하늘이다. 일을 하고 먹는 밥이 성스럽다. 일하지 않고 먹는 밥은 추하다. 일이나 밥을 착취하는 벼슬아치는 도둑이다.”(<다산> 서언 중 ‘다산비결’ 인용문)

그는 고향에 돌아와 다산 정약용의 제자 초의선사를 다룬 <초의>, 다산의 형 정약전의 이야기 <흑산도 하늘 길>, 다산의 후학인 추사 김정희를 다룬 <추사> 등을 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올여름, 장편소설 <다산>을 해산토굴에서 ‘해산’했습니다. “전작들은 ‘다산’이라는 산을 타기 전에 올라야 할 주변 준봉이오. 정약용을 쓰겠다 맘먹은 건 한 30년 될 거요. 한데 다산이 쉽게 오를 산이요? 다산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다산이 유배생활 했던 것처럼 나도 ‘해산토굴’에 갇혀 다산이 읽었던 책을 2백 권 넘게 읽었소. 다산학의 뿌리인 주자학을 알려고 <사서삼경>부터 다시 시작했고, 도교의 노장 서적, <유마경> <화엄경>의 불경, 다산이 쓴 <경세유표> <흠흠신서>, 다산을 유배지로 이끈 천주학과 관련된 <천주실의>까지 5년 동안 읽고 또 읽었소. 그렇게 다산 속으로 내가 들어가고 나니까 다산도 내 속으로 들어오데.” 다산이 각혈하듯 책을 썼던 것처럼 그도 피 토하듯 소설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답니다. 고작 한 시간의 공부로 철학을 담은 척하는 허깨비 천지의 세상에서 그가 다산에 바친 5년, 아니 30년의 시간은 보배로운 것입니다.

“‘실사구시’의 삶을 산 다산은 어짊과 예의 마음으로 백성을 대했어요. 백성을 가장 중히 여겼던 거요. 또 다산은 말로만 실사구시 할 것이 아니라 ‘사업’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성인의 뜻에 따라 인민을 이롭게 하고 구제하는 일’이 바로 ‘사업’이오. 다산은 단지 밥밖에 모르고, 그 천덕스러운 밥을 위해 백성들을 속이는 요즘의 ‘실용주의’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소.” 다산 이야기와 요즘 세상사 이야기를 빗대면서 그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약속한 소년처럼 우릴 바라봅니다. 한겨레신문만 본다는 그는 요즘 정세를 꾸짖는 글을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시대와 민초를 아우르는 그의 주제들은 늘 쉽고 단정한 ‘글 틀’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야말로 문체의 실사구시지요. <다산> 역시 장광설로 보는 이를 혼절하게 하지도, 암호에 가까운 기호를 꼭꼭 숨기고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7백 쪽에 달하는 소설은 짧은 2~3쪽의 글 1백12개로 엮여 있고, 문장도 단문에 가깝습니다. 영상미가 흐르는 구성에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 나비처럼 너울댑니다. “내가 소설 쓰기 위해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상관없이 소설은 재미있고 쉬워야 하제. 그다음엔 아름답고 슬퍼야 하고. 사람은 슬퍼야 세상을 더 냉정하게, 제대로 볼 수 있단 말이제. 다산도 18년간의 귀향살이, 비통한 세월이 없었다면 그 많은 저술과 그 높은 사상이 만들어질 수 없었단 말이오.”

“… / 내가 늘 하늘을 보는 까닭은 /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 입이 떨어지지 않는 / 내가 최후에 남겨야 할 말 아닌 / 말 / 하나가 거기 있어서입니다.”(시 ‘내가 늘 하늘을 보는 까닭은’ 중)

10만 명의 시인이 산다는 대한민국에서 정작 1년에 시집 한 권 꺼내 읽는 게 어렵지만, 시는 삶의 꽃송이 같은 것 아닌가요. 소설가 한승원 선생은 소설 쓰는 틈틈이 몸이 아프거나 소설이 안 써질 때 시를 썼고, 얼마 전 네 번째 시집 <달 긷는 집>을 <다산>과 같은 시기에 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보아버린 듯한 노인의 시를, 다 알면 무슨 재미로 사나, 투덜거리면서도 읽게 되는 묘한 시입니다. 쉬운 시어로 먹먹한 감동을 자아내는 노래지요. “쓰는 게 아니라, 써집디다. 스님들 사리처럼 그냥 시가 만들어집디다. 저는 시를 쓸 때, 쓰지 않는 기교를 즐겨요. 들꽃은 바느질 흔적이 없다고 하잖아요? 그런 시들을 ‘쓴 시’가 아니라 ‘쓰인 시’라고 합니다.” 원래 시란 그런 것 아닌가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기. 삶의 통각과 압각에 대해 노래하는 그의 시를 자꾸만 입 안에서 돌돌거리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말이제. 풋늙은이가 된 요즘 내가 쓰는 문장에 대해, 제대로 써졌는지 어쨌는지 자꾸 의심하곤 한다 말이오. 한창 팔팔할 땐 서너 번 다듬으면 됐는데, 지금은 늙은 감각을 믿을 수 없어 예닐곱 번 고치고 다듬어요. 그러고도 한 작품을, 아니 한 낱말 한 문장을 쓸 때마다 절망한단 말이제. 나는 이때껏 절망을 먹으며 살아왔응께 지금 이 나이에 이 정도 얼굴을 하고 있는 거 아니겠소?”

“한여름의 저물녘 햇살 비낀 성긴 솜대나무 숲 속의 산 모기들이 ‘아따! 살집 부드러운 아주머니 반갑고 또 반갑네. 나하고 오늘 밤 함께 잡시다잉’ 하고 흡혈하러 덤벼드는 죽로차 밭에서 차양 긴 모자 쓴 시인의 늙은 아내가 잡초를 맵니다. / (중략) / 시인의 아내가 어기적어기적 지나간 밭고랑에는 앙증스러운 차나무들이 시어들처럼 줄지어 선 채 붉어지는 하늘을 향해 가슴 펴고 달려온 저녁 바람에 우쭐우쭐 춤춥니다. (후략)”(시 ‘아내 꽃’ 중)

곧 칠순이 되는 시인의 얼굴은 유난히 갓맑습니다. 그건 바로 ‘시인의 늙은 아내’ 덕분이라는군요. 시인에게 세상에서 제일 향 맑은 차를 맛보이려는 일념으로 죽로차 밭을 정성껏 기르는 아내, 무릎 아프다면서도 새벽 4시 30분이면 4km나 떨어진 포구까지 걸어가서 남편 먹일 생선 사가지고 오곤 하는 아내, 물간을 살피다 싱싱한 한 놈을 사게 되면 집에 돌아올 때까지 발바닥이 땅에 닿는 걸 느끼지 못하는 아내 덕이랍니다. “집사람은 날 보고 늙어가면서는, 지갑 지퍼는 열고 입 지퍼는 굳게 닫으랍디다. 한데 말이 길어지네. 내가 내 아내 이야기하는 것 두고 팔불출이라고 흉허물하지 마소.” 시인의 얼굴이 꽃처럼 붉습니다.

작가 아들과 며느리 봉양받으며 사는 박귀심 여사 덕도 있답니다. 밥 이상으로 좋은 보약 없다며 밥을 고봉으로 담아달라고 하여 다 비우고, 얼마 전 백내장 수술 시켜드렸더니 작가 아들이 버린 종이 뒷면에 사인펜으로 당신 살아온 이야기, 자손에게 남길 유언, 탁한 세상 질타하는 글을 무더기 무더기 쌓아놓은 어머니. 꼿꼿이 앉은 채 저승에 가신 시할머니·시할아버지, 시아버지·시어머니, 남편 그리고 하느님들과 목청 높여 말씀 주고받으시며, 당신 모시고 사는 둘째 아들과 며느리 상찬, 비판, 수복강녕을 비는 어머니 박귀심 여사. 시인은 “위대한 나의 껍질, 사랑하는 자궁 권력자”(시 ‘박귀심 부인’ 중)로 모친을 노래했습니다.

자식이 승업承業하는 것만큼 큰 효도가 없다지요? 소설가 한동림과 한강이 그의 아들, 딸입니다. 특히 소설가 한강 씨는 지난 2005년 이상문학상(<몽고반점>으로 수상)을 수상해 가족이 동일한 문학상을 받는 최초의 예가 됐습니다. 그는 자신과 똑같은 업고를 치러야 할 아이들이 안쓰럽다고 하는군요. 같은 길을 걷는 자식들 이야기에선 그는 말을 아낍니다. 대신 “이 땅의 작가들이 쓴 소설책 시장이 썰렁해진다고 야단인 이 판국에, 너희 모두를 소설가가 되게 한 단초인 이 아비가, 너희로 하여금 ‘아이고, 아버지 금년에도 또 소설책 한 권 내셨네’ 하고 놀라게 하는 까닭이 이 소설 속에 들어 있을 터이다”라고 책 첫머리에 글을 남겨 그 마음을 엿보게 하곤 합니다.

“도수 높은 돋보기를 쓰고도 / 잔글씨를 10분쯤만 읽으면 그것들이 개미처럼 기어가다가 / 밤안개처럼 풀어지곤 하는 아비를 위하여 / 달이 / 소포로 보내준 사각의 확대경을 받아든 순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 (중략) / 바다 향해 흘러드는 저의 시간을 당신의 저수지에 가두어주십시오. / 이것만은 반드시 완성하고 가야 하는데 / 책상에 앉으면 무기력증이 일어나고 머리가 / 물 머금은 솜덩이들 가득 찬 듯 멍해지곤 합니다. / 제 영혼을 맑게 헹구어주십시오.”(시 ‘열꽃 피는 날의 기도’ 중)

숨 한 번 몰아쉬고 나면 선생은 곧 일흔 살이 됩니다. 사지를 불태우며 살아왔다고 하늘이 선물로 준 나이. 자신을 ‘풋늙은이’로 부르는 그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마지막 글귀 “71과 노老”를 떠올리며 앞으로 남은 날 동안 소설에 매진하겠답니다. “이제 전라도 지방의 신화와 전설에서 모티프를 가져와 장편소설 하나 쓸 작정이제. 차라투스투라 같은 인물을 내세운 철학적이고 신화적인 작품이오. 평생 50권도 훨씬 넘는 책을 갈무리했지만, 아직 추수 덜한 전답들이 남아 있으니 바쁘지 않을 수 없제. 열심히 글 쓰는 것이 역사가 나에게 준 소명이니 살아 있는 한 소설을 쓸 것이고, 소설을 쓰는 한 살아 있을 거요. 지금 쓰는 소설들은 이승과의 아쉬움 없는 작별을 위한 마지막 꽃이라고 생각하요. 난 낡아가지 않고 늙어갈 생각이오. 소멸을 향해 낡아가는 게 아니라, 지혜의 사리를 몸속에 채곡채곡 쌓아가면서 늙어갈 생각이란 말이오.” 훗날 빼먹을 연금 부어두듯 허무감만 쌓아놓는 노년은 내게 없는가 봅니다. 세상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가쁘게 뛰어온 내 마음, 들쭉날쭉한 내 마음도 ‘풋늙은이’ 소설가 앞에 서니 어느새 번번해집니다. “아이고, 내가 문초를 많이 받았나 보네. 힘드네.” 젊은 객들을 물리는 그의 얼굴에 따뜻한 온수처럼 웃음이 스며듭니다. 스승 동리 선생처럼 그가 대문 밖까지 객들을 배웅하며, 열심히 하라고 손을 잡아주고, 등을 툭툭 쳐줍니다. 아, 이 여름은 미치게 아름답습니다.

한승원 선생과 차茶
그는 알 만한 이는 다 아는 유명한 차인이다. 죽로차 밭을 손수 가꾸고 ‘수제자’인 아내가 덖은 차로 자신과 객을 대접한다. ‘흔들릴 때 차를 마신다’는 그가 말하는 차 잘 우리는 법, 차 향 즐기는 법은 이렇다. “90℃쯤 뜨거운 물(처음 우릴 땐 80℃, 두 번째부터는 90℃ 정도)이 담긴 찻주전자에 엄지와 검지, 중지로 차를 가볍게 집어넣고, 맥박이 뛰는 속도로 하나아, 두울, 세엣… 이렇게 아홉을 세고 또다시 아홉을 헤아리면 애벌차가 우러나옵니다. 그 첫 번째 아홉을 헤아렸을 때 뚜껑을 살짝 열면 차향이 흘러나오는데, 이 ‘배냇향’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그윽한 향입니다. 나는 코를 들이댄 채 킁킁대며 향기를 즐기곤 합니다.” 그의 차 사랑은 <차 한 잔의 깨달음>(김영사)이란 책으로 묶여 나오기도 했다.

한승원 선생과 한복
그는 화학섬유에서 생기는 정전기가 싫어서 오래전부터 한복을 고집한다. 부인이 직접 지은 한복을 입고 밭일도 하고 여행도 가고 강연도 하고 주례도 선다. 출간 기념 모임에도 한복을 입고 나타난다. 언젠가 한 일간지 기자가 병원에 입원한 그를 연락 없이 찾아간 적이 있는데, ‘예까지 찾아온 사람, 입장도 있을 것’이라며 윗도리는 황톳빛 한복, 아랫도리는 환자복을 입은 채 불쑥 찾은 객을 미소로 맞기도 했다. 한동안 고구려 고분에서 꺼내 온 듯한 다갈색 무늬의 생활 한복 차림을 즐겨 입었는데, 요즘 같은 여름에는 세모시 한복을 즐겨 입는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