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표지이야기] 서양화가 전영근 씨 길 위로 나온 정물화
때로는 자동차에 수박이며 낚싯대, 침낭, 튜브, 그리고 몇 권의 책을 쓸어 넣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이번 표지 작품인 전영근 씨의 ‘여행’처럼 준비물을 두서없이 대충 쌓아서 즉흥 여행을 가도 좋겠다. 뒤도 안 돌아보고 무작정 여행길에 오른 때가 언제인가?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옮긴다. 작품 속 사물 중에는 조연이 없다. 저 수박은 누구와 함께 깨 먹으려고 하는지, 꼭대기에 실은 책 제목은 무엇일는지, 가방이 반쯤 열린 걸 주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각각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을 것 같다. 캔버스 하나에 담긴 사물의 시점을 제각각 다르게 그린 것도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물 하나하나를 대하는 태도가 남다른 것은 전영근 씨가 정물화에서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길 떠나는 장면을 그린 ‘여행’ 시리즈도 풍경이라기보다는 정물화의 일환이다. 실내에서 길 위로 뛰쳐나온 정물화다.

“정물화는 그림 공부할 때 구도와 명암, 원근법을 익히는 연습 과정으로 그리곤 하지요. 저는 좀 달랐어요. 세잔이 ‘사과 하나로 회화를 정복하겠다’고 했듯, 저 역시 정물을 독창적인 하나의 장르로 완성하고 싶었습니다.” 전영근 씨가 정물화를 그리게 된 것은 오랜 자취 생활 덕분이다. 작은 공간으로 옮겨 다니며 살다 보니 가재도구를 살 때마다 많이 망설였다. 별다른 수납장도 없어서, 몇 안 되는 소지품들은 시간이 지나면 방 한쪽에 쭉 쌓였다. 대충 쌓아두었는데도 물건에는 세월의 더께가 쌓여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문득 보니 작품이었다. 생활의 향기도 묻어났다. “자연석을 툭툭 쌓아둔 듯한 옛 돌담을 참 좋아해요. 시간이 흐르며 새것에 있기 마련인 모난 구석이 사라졌기 때문이지요. 방에 쌓아둔 물건을 봤을 때도 오래되어 편안한 느낌과 부대낌 없이 어우러진 정서가 느껴졌어요. 그려봐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사물에는 그것을 쓰는 주인의 품성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전영근 씨는 사람을 그리지 않고도 인간미와 인간의 따스함을 말하고 싶다. 고차원적인 철학이 아닌,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사소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여행’ 시리즈도 마찬가지예요. 휴가 장면을 통해 삶의 단편을 그렸어요. 인생이란 어디로 갈지 모르는, 길 위의 시간이지요.” 그는 ‘여행’이라는 상황에서 이중성을 보았다. 일상을 떠난 기분 좋은 일탈이기도 하고, 여전히 뭔가를 놓지 못해 바리바리 짊어지고 가는 집착이기도 하다. 작가는 ‘희망도 전하고 싶고, 지금 처한 현실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다만 삶을 정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때그때의 감정, 소박한 이야기를 ‘툭’ 하고 꺼내 보이고 싶다.

그 소박함은 박수근 화백의 그림이나 조선 분청사기의 조용한 맛에 대한 경외감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작품에는 원초적인 순박함이 담겼어요. 어려운 경지이지요. 언젠가는 저도 캔버스에 컵 하나만 그려도 그걸 마신 사람의 감정이나 컵이 놓인 풍경의 분위기를 함께 담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만간 고요하되 생동감 넘치고, 여백이되 충만한, 전무후무한 정물화를 볼 수 있겠다.

서양화가 전영근 씨는 1970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강릉대학교 미술학과와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2003년 인사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연 뒤로 송은갤러리, 진선갤러리 등에서 네 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30여 회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 이번 ‘표지 이야기’는 얼마 전 전영근 씨의 개인전 <여행 I>이 열렸던 갤러리 진선(02-723-3340)의 협조로 진행되었습니다. 지난 전시를 놓치신 분들은 10월 22일부터 28일까지 노암 갤러리(02-720-2235)에서 열리는 그의 개인전을 기대해주세요.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