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리 씨의 수집벽은 사물뿐 아니라 그림 그리는 작업을 감염시켰다.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집에 뒹구는 원고지에 매일의 일상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원고지에 글 대신 오일 마커와 아크릴로 그린 그림을 얹었다. 그가 수집한 일상은 책으로 비유하자면 페이지가 적히지 않아서 시작도 끝도 없는 네버엔딩 스토리와 같았다. 그에게 수집이란 한 바가지 퍼내면 또다시 차고 맑은 물이 솟는 샘물이었다. 신선한 세계를 길어 올리는 작업을 멈출 수 없었다. 일상의 수집은 세상의 수집으로 옮겨 갔다. 밑도 끝도 없이 여행을 다녔다.
<행복> 2월호 표지 작품인 ‘자화상’은 루마니아 여행 중에 영감을 얻었다. 빛바랜 쓰레기통을 보고서 말이다. “말로 표현하긴 어려운데, 처음 보았지만 인연이 있는 사물 같았어요.” 여행 다니며 우체통, 화장실 표지판, 쓰레기통 등 문화가 드러나는 오브제를 사진으로 담곤 하는 그는 이 루마니아 쓰레기통도 채집했다. 인화한 사진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뒤 이를 다시 사진을 찍어 판화 종이에 인화했다.
천지에 널린 사물 중, 그리고 무수하게 수집한 사진 중 그가 작업의 소재로 삼는 것들은 어떤 자격을 갖추고 있을까? “제가 무언가를 그리고 촬영할 때는 대체로 그 사물이 의인화되어 눈, 코, 입이 보이기 때문인 경우가 많아요. 주로 규격화되지 않고 손때가 덕지덕지 묻은, 사람 냄새 나는 사물이 좋아요.” 그는 한눈에 정을 나눈 쓰레기통에 표정을 입혔다. 작가의 실제 얼굴과는 거의 닮지 않았는데 자화상이라 이름 붙였다. “제가 그린 많은 자화상들은 서로 비슷한 구석이 별로 없어요. 내 안에 무수한 얼굴이 있고, 저는 그중 한 가지 모습을 꺼내 투영했거든요.” 그럼 이번 표지 작품에는 어떤 황주리를 그렸을까? “저는 뭔가 잔뜩 쥐고 있는 사람이에요. 물감, 그림 도구부터 수집품, 잡다한 생각까지 꽉꽉 눌러 담은 쓰레기통 같아요. 덜어내며 살아야 하는데 못 버리는 것이 너무 많고요.” 비단 작가의 얼굴이 아니다. 그래서 황주리 씨에게 자화상이란 ‘우리의 얼굴’이다.
오랜만에 개인전을 연다.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만든 작품 중 대표작 1백여 점을 선보인다. 여행을 다니며 수집한 엽서에 그림을 그려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한 작품, 임진강변에서 채취한 돌에 그린 작품 및 사진을 활용한 작품 등 형식과 스타일이 저마다 다른 작품이 총천연색 연회에 초청되었다. 전시 제목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이다. “이 제목 뒤에는 ‘기타 등등’이라는 말이 괄호에 담겨 생략되어 있습니다. 전쟁이 나더라도, 어딘가에서는 승리의 파티가 벌어지더라도, 혹은 내가 홀연 죽더라도 삶은 계속되잖아요. ‘그리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계속된다’라는 의미입니다. 참으로 구체적이지 않은 문장인데, 오직 이 말이 인생의 유일한 진실인 것 같아요. 다른 말은 어느 하나의 일면만을 조망할 뿐이에요.” 삶은 계속되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여기에 대한 연구가 바로 황주리 씨의 그림이다. 내일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사람을 그리기도, 세상 돌아가는 일엔 관심도 없다는 사람을 그리기도 한다. 삶에는 해답이 없다는 게 그의 유일한 화두다.
30여 년간의 작품 활동을 반추해보면 ‘점점 자유로워지고 있다’고 요약한다. 주제, 소재,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두루 관조하는 작품으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우연히 어느 초등학생의 미니 홈피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제 흑백 그림이 스크랩되어 있더군요. 요즘 들어 제가 가장 기뻤던 사건입니다. 저와 그 아이들 세대는 참 많이 다른데도 제 그림을 보고 ‘필’이 통했다잖아요.” 아이처럼 신난 그는 70~80세 정도 되면 사진 작업을 하고 싶다며 눈을 빛낸다. “사진은 무진장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는 매체예요. 백지에 선을 긋는 작업에 비해 ‘마음에 힘을 주지 않아도 되는’ 방식이지요.” 요즘 사진과 그림을 접목시킨 작업으로 벌써 새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제 글이나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젊을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지요. 청년일 때는 나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어서 그림을 통해 비명을 질렀거든요.” 좁은 계곡을 치열하게 뚫고 나가던 세찬 물살이 흘러 흘러 이제는 깊고도 넓게 흐르는 강물이 되었다.
프로필
서양화가 황주리 씨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화여자대학교와 홍익대학교 대학원, 뉴욕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1년 문예진흥원에서 첫 개인전을 연 뒤 국내외에서 개인전 및 단체전에 2백여 회 참여했다. 1986년 제5회 석남 미술상을, 2000년 제14회 선 미술상을 수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등 10여 곳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행복> 2월호 표지 작품인 ‘자화상’은 루마니아 여행 중에 영감을 얻었다. 빛바랜 쓰레기통을 보고서 말이다. “말로 표현하긴 어려운데, 처음 보았지만 인연이 있는 사물 같았어요.” 여행 다니며 우체통, 화장실 표지판, 쓰레기통 등 문화가 드러나는 오브제를 사진으로 담곤 하는 그는 이 루마니아 쓰레기통도 채집했다. 인화한 사진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뒤 이를 다시 사진을 찍어 판화 종이에 인화했다.
천지에 널린 사물 중, 그리고 무수하게 수집한 사진 중 그가 작업의 소재로 삼는 것들은 어떤 자격을 갖추고 있을까? “제가 무언가를 그리고 촬영할 때는 대체로 그 사물이 의인화되어 눈, 코, 입이 보이기 때문인 경우가 많아요. 주로 규격화되지 않고 손때가 덕지덕지 묻은, 사람 냄새 나는 사물이 좋아요.” 그는 한눈에 정을 나눈 쓰레기통에 표정을 입혔다. 작가의 실제 얼굴과는 거의 닮지 않았는데 자화상이라 이름 붙였다. “제가 그린 많은 자화상들은 서로 비슷한 구석이 별로 없어요. 내 안에 무수한 얼굴이 있고, 저는 그중 한 가지 모습을 꺼내 투영했거든요.” 그럼 이번 표지 작품에는 어떤 황주리를 그렸을까? “저는 뭔가 잔뜩 쥐고 있는 사람이에요. 물감, 그림 도구부터 수집품, 잡다한 생각까지 꽉꽉 눌러 담은 쓰레기통 같아요. 덜어내며 살아야 하는데 못 버리는 것이 너무 많고요.” 비단 작가의 얼굴이 아니다. 그래서 황주리 씨에게 자화상이란 ‘우리의 얼굴’이다.
오랜만에 개인전을 연다.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만든 작품 중 대표작 1백여 점을 선보인다. 여행을 다니며 수집한 엽서에 그림을 그려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한 작품, 임진강변에서 채취한 돌에 그린 작품 및 사진을 활용한 작품 등 형식과 스타일이 저마다 다른 작품이 총천연색 연회에 초청되었다. 전시 제목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이다. “이 제목 뒤에는 ‘기타 등등’이라는 말이 괄호에 담겨 생략되어 있습니다. 전쟁이 나더라도, 어딘가에서는 승리의 파티가 벌어지더라도, 혹은 내가 홀연 죽더라도 삶은 계속되잖아요. ‘그리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계속된다’라는 의미입니다. 참으로 구체적이지 않은 문장인데, 오직 이 말이 인생의 유일한 진실인 것 같아요. 다른 말은 어느 하나의 일면만을 조망할 뿐이에요.” 삶은 계속되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여기에 대한 연구가 바로 황주리 씨의 그림이다. 내일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사람을 그리기도, 세상 돌아가는 일엔 관심도 없다는 사람을 그리기도 한다. 삶에는 해답이 없다는 게 그의 유일한 화두다.
30여 년간의 작품 활동을 반추해보면 ‘점점 자유로워지고 있다’고 요약한다. 주제, 소재,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두루 관조하는 작품으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우연히 어느 초등학생의 미니 홈피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제 흑백 그림이 스크랩되어 있더군요. 요즘 들어 제가 가장 기뻤던 사건입니다. 저와 그 아이들 세대는 참 많이 다른데도 제 그림을 보고 ‘필’이 통했다잖아요.” 아이처럼 신난 그는 70~80세 정도 되면 사진 작업을 하고 싶다며 눈을 빛낸다. “사진은 무진장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는 매체예요. 백지에 선을 긋는 작업에 비해 ‘마음에 힘을 주지 않아도 되는’ 방식이지요.” 요즘 사진과 그림을 접목시킨 작업으로 벌써 새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제 글이나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젊을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지요. 청년일 때는 나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어서 그림을 통해 비명을 질렀거든요.” 좁은 계곡을 치열하게 뚫고 나가던 세찬 물살이 흘러 흘러 이제는 깊고도 넓게 흐르는 강물이 되었다.
프로필
서양화가 황주리 씨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화여자대학교와 홍익대학교 대학원, 뉴욕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1년 문예진흥원에서 첫 개인전을 연 뒤 국내외에서 개인전 및 단체전에 2백여 회 참여했다. 1986년 제5회 석남 미술상을, 2000년 제14회 선 미술상을 수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등 10여 곳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