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악수하는데, 손 대는 게 마른 낙엽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한 팔로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쪽 팔은 팔걸이를 한 그는 회복기 환자의 표표한 낯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1년 전 철원에서 조류 탐사를 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그는 병원에서 꼬박 세 달을 살았다. 아직 병원에 치료받으러도 가야 하고 또 쉬어야 하지만 다시 예전의 ‘새 박사님’으로 돌아가려, 차돌에 참기름 발라놓은 것 같은 ‘윤무부 선생님’으로 돌아가려 분주히 지내는 중이다. 며칠 후엔 ‘쑈!’를 외치는 이동통신 회사의 TV CF를 찍으러 말레이시아로 떠날 예정이라고, 그 전에 대운하 사업에 대해 나라에 낼 건의서를 어서어서 만들어야 한다고 허술한 발음으로 그가 말했다.
서글펐다. 그가 병마로 쓰러진 게 서글프다기보다는, 머리 위에 구름을 얹고 사는 동안 윤무부 아저씨도 어느새 일흔이 내일모레구나, 그게 서글펐다. 동년배의 남자들이 배기량 큰 차를 탐욕하고 부양을 근거로 처자를 압박할 때도 ‘새의 눈으로, 새처럼 사는 인생’을 외치던 그, <브레인 서바이버>라는 TV 퀴즈 프로그램에 나가 꼴찌를 하고서도 자신을 희화하는 제작진에게 오히려 소년의 웃음을 지어 보이던 그. 그런 그도 세월을 빗겨 가진 못했구나 하는 서글픔이었다. 관자놀이와 볼에 걸친 노쇠한 근육 덩어리는 그 해맑은 웃음을 가끔 일그러뜨리고, 갈매깃살을 왜 고깃집에서 파는지 묻는 청년에게 “나도 몰라, 지식인도 몰라~”를 외치던 국보급 위트는 어느샌가 사그라진 것 같고.
그를 이해하기 위해 ‘새’ 말고 다른 단서는 없었다. 그에게 새는 삶의 지향점이었으니까. 인생이 여행이라면 그 여행의 나침반은 새였다. 거제도 장승포에서 태어나 이 세상에서 가장 맛난 게 생선인 줄로만 알았던 섬집 아기 무부, 그 맛난 생선 먹고 사는 물총새 똥 냄새도 구수했다는(죽은 생선 냄새가 진동해 살갗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보통 사람은 그 역한 냄새에 며칠 동안 생선을 쳐다보지도 못한다고 한다) 장승포 소년, 초등학교 때 성적이 항상 ‘양’ 언저리를 맴돌았지만 새에 관해서라면 장승포 최고의 척척박사였던 소년, 연탄가스가 새는 방에서 살면서도 새를 탐구하기 위한 장비만은 수천만 원을 들여 사고야 말았던 미운 남편, ‘한국에 사는 휘파람새 소리의 지리적 변이’라는 독특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새 박사님, 40년 이상 새를 보러 다니고도 ‘어디에 새가 나타났다’는 전화만 받으면 아직도 가슴이 설렌다는 예순여덟 살의 교수님, 늘 깜박대는 자신의 기억력을 두고 ‘새 박사가 새대가리’라고 농담할 줄 아는 새처럼 자유로운 마음의 사람. 어떤가, 이 정도면.
새와 함께 산 인생
“새와 함께 살아야겠다, 결심하고 시작한 인생인가요?”
“산으로 들로 바다로 천둥벌거숭이처럼 뛰어다니던 초등학교 4학년 때 새 한 마리를 봤는데, 너무 이쁘고 신기하게 생겨서 첫눈에 반했지요. 그 새를 보는 재미에 검정고무신 신고 매일 40리나 되는 산등성이를 넘나들곤 했어요. 집에 가면 영락없이 고무신이 너덜너덜해져서 혼쭐이 나곤 했어요. 맨발로 산에 오르다 돌에 발등이 찍혀 피가 흘러도 그 새 보러 가는 길이 즐거웠어요. 그 새는 일 년 중에 어느 때가 되면 나타났다가 또 어느 때가 되면 홀연히 사라지는 거예요. 새가 안 보이면 그립고, 언제 다시 돌아올까 걱정되고 기다려지고. 그러다 어김없이 때가 되면 다시 내 앞에 그 새가 나타나고. 그때 결심했어요. 앞으로 새를 연구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새가 후투티였지.” 윤무부 교수의 명함에는 새가 한 마리 찍혀 있는데, 바로 후투티다.
“아버지도 새 박사셨다지요?”
“‘무부야, 갈매기 잔뜩 날아온다, 태풍 오려나 보다’ ‘물까마귀는 환경을 보호하는 새야. 바다가 아니라 양지바른 바위 위에만 똥 누잖아’ ‘백로 부리는 날카롭지만 가족은 절대 공격하지 않아. 자식새끼 버리는 인간도 있는데. 새들이 더 인간적이야.’ 갈치잡이 배에 날 태우고 다니면서 아버지가 해준 이야기들이에요. 우리 아버지야말로 자연이 가르친 새 박사죠.”
“당시만 해도 ‘조류생태학’이란 학문조차 생소했던 시절인데, 게다가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에 난데없이 ‘새’를 공부한다고 했을 때 모두들 반대하셨지요?”
“우리 형제가 7남매인데, 내가 키가 제일 작아 지게를 지는 게 힘들다는 이유 하나로 중학교 때 서울로 유학 왔어요.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로 일하면서 날 뒷바라지했던 우리 형은 만날 날더러 영문과 가서 영문 타자수도 되고 유학 가라고 그랬지. 그런데 새를 공부한다고 하니 당연히 반대가 심했지. 둘째 형이 제일 반대했죠. 하지만 내 맘은 진작 새에 가 있었는걸 뭐.”
“새 공부 하는 사내라고 결혼 허락받기도 힘드셨다던데요.”
“대학원 다니며 조교로 일할 때인데, 둘째 형이 증명사진을 한 장 내보이데요. 긴 생머리에 우수에 젖은 눈빛을 가진 여인! 사진 보고 첫눈에 반했죠. 무턱대고 예산에 내려가 터미널 앞 지하다방에서 아가씰 기다렸는데 당연히 안 나타나죠. 거제도 촌구석에서 태어나 새 찾는다며 전국 방방곡곡 뒤지고 다니는 가난한 대학원생, 앞날이 뻔하다고 장인어른이 반대하셨대요. 친구 결혼식 때문에 아가씨가 서울에 왔을 때 같이 온 남동생에게 용돈 몇 푼 쥐여주고 그 길로 아가씰 납치한 거죠. ‘새를 사랑한다. 지금은 보잘것없는 대학원생일지라도 반드시 교수가 되고 말 것이다. 난 지금 평생의 반려자를 만난 것 같다. 그러니 뿌리치지 말아달라’ 이러면서 마음을 전하니까 제법 믿음직스러웠는지 따라오데요. 그다음 날 종로2가에 있는 사진관에서 가짜 ‘약혼사진’을 찍어서 양가랑 친척집까지 다 돌려버렸어요. ‘과학자는 주장을 하려면 반드시 증거가 있어야 한다. 나는 과학자다!’ 그런 맘으로 사진을 찍었던 거죠. 그 뒤로는 뭐, 일사천리였지.”
윤무부 선생은 그의 책 <날아라, 어제보다 조금 더 멀리>에서 아내를 두고 “새처럼 날아와 나와 함께 둥지를 튼 그녀”라고 썼다. ‘우수에 젖은 눈동자를 지닌 그녀’는 40년 가까이 그의 곁을 지켰다.
“늘 새벽 3시 30분에 기상하신다고요?”
“새와 살기 위해선 ‘나태’라는 단어와 친해질 수 없었어요. 새의 생활주기에 맞춰 그 시간쯤엔 일어나야 새벽의 새소리, 퍼덕거림, 먹이 찾는 모습을 볼 수 있죠. 일찍 일어나면 할 일 많아요. 엊그제 새벽엔 아들이 보내준 BBC의 동물 다큐를 다 봤잖아. 원고 쓰는 것도, 강의 준비도 새벽에 해요. 아침에 일찍 일어난 새가 먹이를 먹는다!”
“그 BBC 동물 다큐 비디오 보내주는 아들도 ‘새 공부’를 한다지요?”
“우리 아들 윤종민이. 지금 미시간주립대학에서 ‘조류 생태 행동 연구’로 박사 과정 하고 있어요. 걔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탐조 여행 다닌 놈이야. 초등학교 때 내가 오토바이에 태워가지고 탐조 다니고 했는데, 너무 장거리다 보니까 얘가 아예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곯아떨어지는 거예요. 아스팔트 위에선 그래도 덜하지만 포장 안 된 산길에선 위험천만이거든요. 그래도 고 녀석 절묘하게 잘도 자. 아예 이력이 났었나 봐요. 언젠가 비포장 산길을 한참 달리다 보니 뒷자리가 허전하고 가벼운 거야. 돌아보니 아들이 없데! 오던 길 되짚어 가니까 아들이 산길 옆 길가에 처박혀 울고 있데요. 다행히 큰 상처는 없어서 응급처치하고 겨우 달래서 계속 탐조 여행 갔어요.”
“그 아들이 아버지 뒤를 이어 자신도 새 공부 하겠다고 했을 때 혹시 반대하셨나요?”
“나는 안 그랬지만 마누라가 반대를 많이 했지. 얼마나 힘든지 뻔히 아니까. 우리 아들이 날 닮았는지 자기 하고 싶은 일 하며 살겠다는데, 어쩌겠어요. 미국으로 유학 가고 나서도 요즘 매일 우리 아들이 집으로 전화를 해요. 매일같이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을까 싶지만 우린 부자이기 이전에 둘 다 새에 미친 사람이라 매일 새 이야기 하다 보면 도끼 썩는 줄 몰라. 아들이 새에 대해 물어보기도 하고 나도 아들한테 새로운 정보를 얻기도 하고.”
아내와 아들 이야기를 하면서 낡은 밧줄 같던 그의 낯빛이 펴졌다. 그러곤 어느새 청춘, 로맨스, 꿈을 이야기하는 소년의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일상이 다 시가 될 것 같은 풍경이었다.
내 집은 저수지 갈대밭
처음 봤을 때 그는 ‘어디서 졸다 왔느냐’란 핀잔이 너무 들어맞는 차림이었다. “솔직히 나는 씻는 것을 싫어합니다. 집을 나서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옷을 갈아입지 않습니다. 새는 지저분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새들은 낯선 것을 보면 금방 다른 곳으로 자리를 피해버리지요. 그러니 새를 관찰하러 갈 때는 주변의 자연과 비슷해야 합니다.” 그는 <날아라, 어제보다 조금 더 멀리>에 이렇게 쓰기도 했다.
“제주도로 철새 연구를 떠났을 땐데, 마누라가 단단히 벼르고 요일별로 갈아입을 옷에다 표시를 했어요. 열흘 동안 옷 보따리는 풀지도 않았어요. 탐사를 마치고 부산행 여객선에 탔는데 사람들이 내 주변에 얼씬도 못하데. 덕분에 부산까지 편하게 왔어요. 부산에서 서울로 기차 타고 가면서 입석표를 끊었는데 피곤에 절어 남의 좌석에 드러누웠지. 누가 하나 말도 한 번 안 걸더라구. ‘인간 스컹크’였지.”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새 찾으러 뛰어다니다 보니 불심검문에 걸려 경찰서 단골 손님이 됐고, 아침 이슬 맞으며 산 어슬렁거리다 간첩 신고를 당하기도 했다. 군부대 취조실에서 그가 배낭을 열면 그 안에선 무장공비처럼 망원경, 망원 카메라, 녹음기 따위가 튀어나오곤 했다. 폭우에 휩쓸려 여섯 시간을 떠내려가다 시체 12구와 함께 발견된 적도 있었다.
“냉기 올라오는 텐트 안에서 자고, 찬 우유와 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탐조 여행이 늘 즐겁지만은 않으실 텐데요.”
“새소리 찾기 위해 공동묘지 드나들면서도 즐거웠다면 믿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새벽 2시, 땅속에 묻힌 시신 옆에 쭈그리고 앉아 숨소리를 죽이고 있는데, 멀리서 어렴풋하게 새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세상에서 가장 목소리가 아름다운 새, 흰배지빠귀였어요. 휘파람 불듯이 1분 동안 지저귀곤 사라졌어요. 정말 행복했지. 그 청아한 새 울음소리를 듣기 위해 난 어디든 갔어요.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 3백90여 종의 철새와 텃새 중 4분의 1 이상의 울음소리를 녹음할 수 있었어요.”
그는 사계절, 24시간 동안 새들이 사람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으며 새와 함께 저수지 갈대밭에, 공동묘지 묏등에, 산속에 살았다.
“한동안 몽골로 탐조 여행을 떠났는데, 오지의 습지에서 철새를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오지에 사는 몽골 사람들 만나는 일도 재미있어요. 한번은 동네 사람들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시계를 선물했는데, 몽골인 남편이 그날로 어디론가 떠나서 돌아오질 않는 거야. 나중에야 그 사람이 시계에 대한 답례로 자기 부인을 며칠간 선물로 준다는 뜻이었던 걸 알았죠. 갈아입을 옷도, 속옷도 변변찮은 그 사람들 위해 갈 때마다 옷이랑 속옷을 잔뜩 챙겨 가요.”
버려라 그리고 날아라
1남 1녀를 일찌감치 제 살길 찾아가도록 떠나보내고 그는 휘경동의 퇴락한 주공아파트에서 아내와 단둘이 살고 있다. “유명 교수가 이런 집에 산다고 하면 사람들이 놀래요. 친구들도 뭐 하러 돈도 안 되고 고생스러운 일만 찾아 다니느냐고 나보고 바보래요. 하지만 난 돈도 필요 없는걸. 큰 집도 필요 없는 걸. 새는 세상 어디에도 금 긋고 살지 않아요. 그런데 사람만 거미줄 치듯 금 긋고 사는 인생이잖아. 그래서야 어딘들 마음 편히 떠날 수 있겠어요?”
“새와 평생을 살면서 알게 되신 건 무엇이죠?”
“내가 아는 모든 것이죠. 새는 내게 인생을 가르쳐준 스승이니까요. 하나만 말해줄까? 하늘 높이 날아오르기 위해, 가능한 한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새에겐 방광이 없어요. 대장도 거의 없어요. 노폐물이 생기면 오줌과 똥을 몸 밖으로 바로 배출하지요. 버릴 수 있어서 날 수 있는 거예요. 사람도 고집, 아집, 욕심, 주의, 주장 같은 마음의 노폐물을 마음 밖으로 버릴 수 있을 때 새처럼, 나무처럼 건강해질 수 있어요.”
“평생 동안 새만 보고 사셨는데, 그 수많은 새 중에서 어떤 새가 가장 좋으세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있나. 다 내 자식들인데 어느 한 놈만 좋을 리가 있겠어요. 참새, 황새, 까마귀까지 다 좋아요.”
“타인을 믿는다는 게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인데, 그렇다면 선생님은 새를 믿으시나요?”
“난 새를 믿어요. 아침부터 일어나서 벌레 잡는 새의 부지런함을 믿고, 항상 같은 계절에 나타나고 같은 계절에 짝짓기를 하고 같은 계절에 떠났다가 같은 계절에 돌아오는 철새의 정확함을 믿지요. 작은 숯조각 같은 새가 제 몸의 몇 배나 되는 돌을 들어 올리거나, 생긴 건 막무가내로 생긴 애가 아름다운 소리로 우는 걸 보고 누구나 한 가지쯤 재주는 반드시 타고난다는 걸 믿어요. 차가운 머리로 하는 사랑이 아닌, 따뜻한 심장이 이끄는 사랑을 하기 때문에 한번 부부의 연을 맺으면 바람도 안 피우고 이혼도 안 하고 자식도 버리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들의 사랑을 믿어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행복의 나라로’라는 노래가 입 안을 맴돌았다. “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 번 더 느껴보자 / 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주세 /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 /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주 / 나도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비록 이렇게 가벼이 불러선 안 되는 저항과 자유의 노래라 하더라도, 그의 세상 안에선 꼭 이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새 얘기 앞에선 눈빛이 새잎으로 돋는 노인을 바라보는 내내, 황사 바람에 자꾸 눈이 아려왔다.
윤무부 씨는 평생을 새와 함께 살면서 새의 습성, 식생, 노랫소리, 탄생과 죽음 등을 지켜봤고 그것이 4천 장의 사진으로 남았습니다. 새와 함께 산 그가 말하는 행복론은 이런 것입니다. “만족을 아는 사람이 부자라고 합니다. 아무런 소원 없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세상은 행복일 것입니다.”
새가 잘 살아야 인간도 잘 산다
역시나 그의 집은 온통 ‘새판’이다. 서른 몇 평짜리 아파트에 새소리와 새 필름과 새에 관한 책자가 그득하다. 새 사진만 해도 4천여 장에 이를 정도다. 그런데 여염집에서 흔히 키우는 앵무새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새 박사님 집은 동물원 같을 거라 생각했는데, 새를 안 키우시네요.”
“새를 가두는 게 싫어요. 좁은 새장 안에 있는 새는 자신이 날개가 있는 줄도 모르고, 날개를 어떻게 써야 하는 줄도 모르고, 죽어서야 하늘로 날아오르잖아요. 자기 안에 갇힌 사람처럼 새장 안에 갇힌 새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어요. 그리고 밖에 나가기만 하면 새가 있는 곳을 단박에 알아내는데 뭐. 지금도 팔당 가면 고니가 한 2백 마리 와 있을 거야.”
“이번 태안반도 원유 유출 사고를 보도한 뉴스 사진 중 기름에 뒤덮여 고통스러워하는 새의 모습을 사람들은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어요.”
“서해안은 도요물새들의 이동 루트예요. 겨울이면 걔들이 북녘 땅에서 서해안으로 내려오는데 이번 사고 나고 걱정돼서 매주 내려갔어요. 다행히 검은머리물떼새 2천5백 마리는 군산 유부도 쪽으로 일찍 이동하는 바람에 피해를 막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부터가 문제지. 남쪽으로 내려갔던 새들이 5월 달 전후해서 북상할 텐데 걱정이에요. 새들은 깃털에 기름이 묻으면 깃털이 엉켜서 무거워지고 그러면 이동을 못하게 돼요. 그러면 죽게 되는 거지. 새들이 먹는 먹이도 기름에 오염되면 그 독성에 새들은 맥을 못 추게 돼요.”
“그럼 조류학자로서 대운하 사업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아, 이거 꼭 자세히 써주세요. 조류학자로서 난 대운하 사업에 반대해요. 운하란 게 땅을 깊이 파서 그 위로 물을 담는다는 말이고 그러면 얕은 물은 다 없어진다는 말인데, 수리부엉이나 황조롱이처럼 얕은 물에 사는 천연기념물은 죄다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꼬마물떼새, 흰목물떼새, 삑삑도요, 깝짝도요, 새물닭, 논병아리, 개개비처럼 얕은 물에 사는 새 50여 종도 다 없어질 수 있어요. 텃새들은 머리가 나빠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갈 줄을 몰라요. 계절이 바뀌면 옮겨 다니는 철새가 아닌 담에야. 오죽하면 새대가리라고 하겠어? 새로운 정부에서 여러 연구 하겠지만 새에 대해선 아무런 연구도 안 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 토종 물고기도 다 없어질 거야. 정말 국민을 위한다면 전문가에게 자문도 받고 미리 실험도 해보고 환경 영양 평가도 해보고 제대로 해야죠. 그래서 내가 국가에 제안서 써서 내려구요.”
이 이야기에 대해 그가 쓴 글이 좋은 덧붙임이 될 듯하다. “딱따구리는 나무를 서서히 죽게 하고 나무 속을 다 파먹는 사슴벌레, 딱정벌레 등의 어린 유충을 잡아먹는 이로운 새입니다. …딱따구리 둥지를 살펴보면, 이 새들이 살아 있는 생나무에 구멍을 파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겉은 살아 있으나 속은 물이 들어가서 썩은 부드러운 나무에 구멍을 파서 둥지를 만들지요. 자연에 있는 어느 것 하나 그냥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살아가는 자연은 어느 것 하나 필요 없는 부품이 없습니다. 모두 하나의 생명으로 저마다의 가치를 지니고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고 있지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만난 이유도 아마 자연의 그것처럼 나를 위해서,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닐까요. … 우리도 자연 속에 있는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하여 남을 위하여 그리고 서로를 위하여 행복을 빌어주는 축복, 자연이 축복이며 우리가 축복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해로운 곤충을 잡아먹고 고운 소리를 내던 꾀꼬리, 황금새, 산솔새, 굴뚝새, 박새가 우리 곁에서 사라졌습니다. 새가 떠난 세상에서는 인간도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청년 새 박사 윤무부, 비상하다
그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새들의 세상’이라고 말한다. 40년 넘게 새에 파묻혀 산 것도 모자라, 새에 대해 공부를 좀 더 할 셈이란다. 가부좌를 튼 수도승처럼 결연하게 새로이 배우겠다는, 고희를 앞둔 노인. 아직도 가끔씩 인간의 논리에 자연의 논리, 새의 논리를 몰아붙이려는 자신이 부끄럽다는, 이 겸손한 사람. 인생이 비록 새들의 날갯짓처럼 아름답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에게 새는 아름다운 세상의 이상이자 이치다. 잠시 나는 그가 인생의 추운 계절에도 끄떡없는 청년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청년의 몸처럼 호르몬으로 들끓고 있다. 그러니 노년은 추상명사에 불과하다. 윤무부 씨는 영원한 아저씨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줄 낮과 밤은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