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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작가 이경희 씨 미안하고, 사랑하고, 고맙습니다
드라마 작가라면 한 번쯤 수상의 열망을 품는 한국방송작가상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 <고맙습니다>의 작가 이경희 씨는 ‘사람들이 많이 추웠구나, 보듬어줄 사람이 필요했구나’라며 담담하게 웃었다. <고맙습니다>의 엔딩 자막은 “내가 당신께 기적이 되었다면 당신이 먼저 내 삶에 기적을 일으켜줬기 때문입니다”였다. ‘TV 드라마’라는 자칫 가벼울 수 있는 장르에 ‘기적’과 ‘위안’을 심어 온 작가 이경희 씨. 그는 작품을 만들 때 부모님이 보고 부끄럽지 않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쓴다고 했다. 그렇게 가족을 생각하는 소박한 마음으로 그 착하고 귀한 드라마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옛날에, 숲을 지나니 할머니 집 앞에 할머니가 마중 나온 것처럼, 그의 드라마 <고맙습니다>는 우릴 향해 그렇게 따뜻한 손을 흔들어줬다. ‘어여 와 따순 품에 안기라고, 할미 무릎 베고 화롯불 좀 쪼이라고.’ 인스턴트 양념을 배제한 채 착한 감동을 준 드라마 <고맙습니다>는 2007년 한국방송작가상, 앰네스티 언론상, 대한민국인권상, 푸른미디어상 등을 휩쓸었다. 김운경 작가(<서울의 달> <파랑새는 없다>)의 계보를 잇는, 마이너들의 뜨거운 삶을 그려내는 작가라는 찬사도 함께 받았다.

“<상두야 학교 가자> 대사 중에 교도소로 면회 온 은환이에게 상두가 하는 말이 있어요. ‘난 내가 불행하다구 생각했던 적 한 번도 없었어. … 그게 걱정이 돼. 내가 불행했다구 니가 생각할까 봐. 행복이 어떤 건진 잘 모르겠는데 아침에 눈을 뜨면… 은환이 니가 내 귀에다 대고 이렇게 속삭이는 거야. 상두야! 안녕! 좋은 아침이야.’ 나도 행복이 어떤 건진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 ‘<고맙습니다>를 보면서 한 계절 울컥했고, 덕분에 어머니 손 한 번 더 잡게 됐다’고 말한다면 나도 ‘안녕! 좋은 아침이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계절 우릴 울컥하게 했던 작가는 한 번도 소원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처럼 무심하게 말했다. 그의 관자놀이엔 느슨한 피로가 걸쳐져 있었다. 하루 전 인터뷰 ‘두 탕을 뛰고’ 잠을 설친 데다, 촬영하러 분당에 오는 길에 친구 박연선 씨 (<연애시대>의 작가)를 만나고 갈 요량으로 아침부터 좀 서둘렀단다.

1969년생 닭띠, 경남 진주 출생, 연륙교가 놓이기 전 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던 남해 산동면에서 고등학교까지 보낸 경상도 가시내, 낙도의 국어 선생님이었던 ‘섬마을 인텔리’ 아버지, ‘우리 새끼에겐 돼지고기, 남의 새끼에겐 쇠고기’라는 전인교육을 펼치던 어머니, 국어 선생님이 되려다 얼떨결에 최성실 작가 밑으로 들어간 보조 작가 시절, 그리고 이어진 <꼭지> <순정> <상두야 학교 가자> <미안하다, 사랑한다> <이 죽일 놈의 사랑> <고맙습니다>라는 ‘이경희표 드라마’들. 그가 원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몇 번의 점프를 통해 ‘극본 이경희’라는 크레디트만으로 캐스팅과 흥행을 보장하는 작가가 됐다. ‘인간을 위로하는 착한 드라마’로 ‘미사폐인’ ‘고맙소인’ 같은 열혈 마니아들도 거느리게 됐다.

민기서(장혁 분) 고맙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고맙습니다.
… 할아버지가 그딴 식으로 손녀들 가르치니까 맨날 등신 짓이나 하고 무시당하고 밝히기나 하고. …그딴 마인드로 어떻게 살아요? 이 드러운 놈의 세상. 아름다운 세상? 개뼉다구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이병국(신구 분) 네, 형은 개뼉다구예요. 민기서 내가 개뼉다구가 아니라 세상이 개뼉다구라구요. 이병국 네, 형이 개뼉다구니까 세상이 개뼉다구예요. 바보똥개야. _<고맙습니다> 중


착해서 미안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되기 힘들면서도 또 따분한 게 착한 거잖아요. 왜 ‘착한 드라마’만 만들어내나요?”
“난 인간은 누구나 착하다는 성선설을 믿어요. 사람이 나빠 보인다면 그건 오해나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모르는 게 생기고 그래서 나빠지는 거지 원래 못된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착한 사람들이 바보 소리 듣는 요즘 같은 세상에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소크라테스 선생도 이렇게 말하셨다. “인간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심이 부족해서이고, 세상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세상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의 드라마 속엔 에이즈, 미혼모, 자살, 입양까지 흔히 ‘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위협적인 클랙슨을 울려댄다. <고맙습니다>만 봐도 그 설정이 지극히 자극적이다. 재벌의 아들이자 천재 의사였던 기서(장혁 분)는 연인(최강희 분)을 췌장암으로 잃었고 미혼모인 영신(공효진 분)은 치매 걸린 할아버지 미스타 리(신구 분)와 에이즈 걸린 딸을 돌봐야 한다. 영신의 딸 봄의 생부인 석현은 불임인 약혼녀 은희를 혼전 상상임신하게 만든다. “난 드라마에서 그런 것들이 음…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단지 좀 다른 것이라는 이야길 전하고 싶었어요. 영신이 대사 중에 ‘내가 미혼모인 것은 이상한 게 아니라, 나쁜 게 아니라 다른 거죠. 봄이가 에이즈에 걸린 건 이상한 게 아니라 나쁜 게 아니라, 그냥 다른 사람과 다른 거죠’라는 게 있어요.

난 편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실제로 에이즈 환자의 30%가 병이 아닌 자살로 죽는다는 통계가 있는데 편견이 그들을 죽이는 거잖아요. 사실 죽음에 대한 문제도 편견 아닐까요? 죽는다고 해서 영원히 사라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에서 신구 선생님이 죽은 다음에도 사진 속에서 손녀 봄이를 지켜주고 있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죽는다는 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가는 것일 뿐이에요.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도 은채(임수정 분)가 죽어요. 은채는 늘 남을 위해 희생하고 양보하며 살아온 아이인데 일생에 단 한 번 자기 의지대로 마음대로 해본 게 무혁이를 따라가는 거였어요. 이 죽음엔, 죽음이 꼭 비극적인 일만은 아니라는 내 가치관이 들어가 있죠.”

세상의 편견을 가르고 <꼭지>의 명태는 연상의 미혼모를 사랑했고,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무혁은 자신을 입양 보낸 엄마를 위해 엄마의 또 다른 아들을 대신해 목숨을 버렸고, <고맙습니다>의 기서와 푸른도 사람들은 미혼모 영신과 에이즈 걸린 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이경희표 드라마’는 세상을 당장이라도 개혁할 것처럼 몰아치거나 고매한 논리로 뻐기지 않지만, 세상의 편견을 담담히 걷어내는 그 선한 의도가 드라마 안에 묵직하게 담겨 있다. 그리고 그건 하늘로 오르는 ‘잭의 콩나무’처럼 그의 작품을 히트작으로 부상시키기도 했다.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이경희 작가님은 불교 신자 같기도 하고 기독교 신자 같기도 해요. 구원, 희생, 희망, 기적 같은 걸 이야기하잖아요.”
“불교 신자이긴 한데 어떤 종교든 기본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기’라고 생각해요.”
와, 이건 비범한 능력, 시적 능력이기도 하다. 삶과 시간 속에 묶인 인간과 자연 모두를 훼손된 존재로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니까.
“그럼 이 세상엔 천사가 있다고 믿나요?”
“크리스천인 친구가 그러대요.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이 하느님에게 살려달라고 기도했더니 응답이 오기를 ‘한 발짝 앞으로 더 가라’고 했대요. 벼랑 앞으로 한 발짝 더 가라는 건 고통을 주려 함이 아니라 날개가 있다는 걸 깨닫게 하려는 거래요. 자신이 천사라는 걸 믿게 하려는 거죠. <고맙습니다>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기서가 할아버지를 대신해 초코파이를 나눠주는 신이에요. 자기밖에 몰랐던 기서가 할아버지를 대신해 말 그대로 천사가 돼요.”

배우님들, 미안합니다 “배우 복이 많은 건가요, 좋은 배우를 알아보는 건가요?” “배우 복이 많은 거죠. 난 드라마 쓸 때 스토리보다 캐릭터에 더 중점을 두기 때문에 그 캐릭터를 제대로 담아낼 배우가 가장 중요한데, ‘순수한’ 배우들만 만나는 복이 있었어요. 그림 좋아하고 화분 키우는 거 너무 좋아하는 순도 100% 여자 공효진, 어릴 때 집에서 잠잘 때도 ‘국기에 대한 경례’ 하는 자세로 손을 올리고 잤다는 순진한 강원도 총각 원빈, 가슴팍에 웬 할머니가 들어앉아 있는 임수정,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진짜 사나이 장혁. 그리고 비. 비는 내가 존경하는 친구죠. 몰입이 정말 대단해요. <상두야 학교 가자> 찍을 당시 비가 ‘태양을 피하는 법’을 부르고 있을 때였는데 비가 그러더라구요. ‘보리(극 중 딸) 입원비 벌려고 가수 아르바이트 하는 것 같다’고.” 이경희 작가는 <이 죽일 놈의 사랑> 촬영 때 비에게 보약을 해주기도 했다.

“다 내 새끼들 같더라구요. 보통 열 달 일해야 한 작품이 끝나는데 그래서인지 열 달 만에 세상에 내놓은 내 자식들 같아요. 지섭이 보면 지섭이가 아니라 그냥 무혁이 같고, 빈이는 명태 같고 혁이는 기서 같고 비는 상두 같고. 그래서 이름 안 부르고 배역 이름만 계속 불러대요. <미안하다, 사랑한다> 땐 지섭이가 죽어가는 연기를 하면서 나중엔 살도 빠지고 힘도 없어지는 걸 보니까 ‘제발 밥 좀 먹으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대요. 엄마 맘이 이런가 봐요.”

“말 안 듣는 자식도 있었죠?”
“<상두야 학교 가자> 할 때 교도소 신에서 ‘절대 울지 말 것’이라고 써서 보냈는데 연출자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애들이 눈물을 안 그친다’고. 그런데 그렇게 하게 그냥 뒀어요. 난 드라마의 전부를 끌어안고 가다 보니 머리로 생각하는데 그 친구들은 자기 배역 하나만 잡고 영신이가, 상두가 돼버렸어요. 그러니 그들이 옳지 않겠냐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보니 그 친구들이 옳더라구요. 효진이가 나중에 전화를 해서는 “울었어요. 어떡해요?”라고 하대요. 잘했다고 했죠, 뭐.”
그렇게 태어난 그의 자식들은 연기자로서 처음 세상에 큰 보폭을 떼는 배우가 됐다. ‘명태’ 원빈은 <꼭지>로 ‘그냥 스타’의 이미지를 벗었고 ‘상두’ 비는 <상두야 학교 가자>로 비가 아닌 정지훈으로 거듭났고, ‘무혁’ 소지섭은 <미안하다, 사랑한다>로 출세했고, ‘기서’ 장혁은 <고맙습니다>로 ‘리틀 정우성’의 올가미를 벗고 배우로 성장했다.

“어떻게 해야 이경희 작가의 자식들이 되나요?”
“연기 한 번 안 해본 비는 처음 만나 <상두야 학교 가자> 대본을 읽는데 마음이 배어 나오더라구요. 다른 배우를 거의 확정한 상태였는데 감독이나 나나 홀딱 반해, 엎었어요. 아, 혁이는 <고맙습니다> 찍을 때까지 잘 모르는 사이였는데 연습 들어가기 전에 쓰레기를 치우고 매니저들한테 커피 돌리는 모습을 봤어요. 이 친구라면 ‘날개 잃은 천사’ 기서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이들처럼 만났을 때 ‘결과 생각하지 말고 이 친구라면 한번 해보고 싶다’라고 감이 오는 친구들이 자식이 돼죠.”
“그런데 참 이경희 작가님은 아직 마흔 살도 안 된, 그것도 꽃띠 미혼이잖아요?”
“그러게요. 허허. 원래 마음이 생겨먹은 게 좀 늙었나 봐요. <꼭지> 쓸 땐 서른두 살이었는데 꼭지 외할아버지로 나왔던 박근형 선생님이 대본 보면서 ‘이 작가는 한 오십 됐겠군’ 하더래요. 노인네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니까. 촬영장에서 어슬렁거리는 내가 스크립터인 줄 알고 커피 심부름 시키고 그랬어요. 허허.”

미안합니다, 사랑해서. 고맙습니다, 사랑해줘서 작가 이경희가 잉태한 자식들 중에 아들들은 모두 형제처럼 닮았다. 목 놓아 울지도 않고, 울면서 미소 짓고, 억울해도 해명 한 번 하는 법이 없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변명하지 않는다. 상처 입은 마초들이다. 작가는 그 가난한 목숨들이 죄다 자신의 피붙이인 양 끌어안는다.
“내가 홍콩 누아르 광팬이어서 그런가 봐요. 마이너적이고 외로운 마초들의 월드 <영웅본색>을 스무 번쯤 돌려 보고 외로운 남자들의 세계가 나오는 홍콩 영화라면 수업도 빼먹고 보러 다니고. 나보다 남이 더 중요하고 친구가 중요하고 의리가 중요하고 의리에 목숨 거는 남자들을 우상으로 알았어요.”
그러고 보니 이경희표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랑도 어쩐지 의리의 냄새가 더 나는 것 같다. 질투 같은 감정의 소모를 하지 않고도, 피가 솟구칠 것처럼 열렬하게 사랑을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를 믿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사랑하는 사람들. 사람들이 한 여자를 둘러싸고 돌을 던지면 어떤 것도 가지지 못한 남자는 그저 여자와 함께 돌을 맞을 뿐이다.
“경상도식 감성에 익숙한 것 같아요. 무뚝뚝하게, 자신이 산산이 부서진다 해도 여자를 우직하게 지키는 남자. <천장지구>의 사랑 같은 거에 끌리죠. 나도 발가락이 간질간질해지는 로맨스 한번 써보고 싶긴 한데 자꾸 인물들이 ‘하던 대로 하시죠!’ 하는 거 같아요.”

동자승 저 안의 영정 사진이 여자 친구예요? 기서 …어. 동자승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다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기서…. 동자승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성경에 나오는 말이에요. 인생이 그래요, 원래. 너무 슬퍼 마세요. 나무관세음보살._<고맙습니다> 중

함께 살아줘, 고맙습니다 보통의 젊은 작가들은 가족에 대한 자의식이 희박한데, 그는 멜로가 주축인 <미안하다 사랑한다>나 <이 죽일 놈의 사랑>에서도 가족 이야기가 멜로를 든든히 지탱하게 했다.
“둘째 삼촌이 돌아가셨을 땐데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졌어요. 아버지를 찾아낸 곳은 삼촌 무덤이었는데 무덤 위의 진흙을 손바닥으로 문질러서 고운 가루로 만들고 있더라구요. 그 무뚝뚝한 양반이 그러고 앉았는데 나도 모르게 진물 같은 눈물이 왈칵 흐르데요. 수선스럽지 않지만 진짜 가족애라는 건 그런 거 아닐까요? 그런 토양에서 자란 내겐 늘 가족이 화두이고, 드라마 쓸 때 부모님이 보시고 부끄럽지 않으면 된다, 이 맘으로 써요.”

“그러고 보니 이경희표 드라마에 나오는 여자 캐릭터들은 어린 여자여도 다 모성애를 가지고 있잖아요.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도 어머니 노릇을 제대로 못하는 무혁이 어머니 대신 가녀린 은채가 어머니가 되고 무혁을 변화시켜요. <꼭지>에서도 어머니는 집안의 대들보구요.”
“<꼭지>는 80% 정도 자전적인 이야기인데 할아버지 할머니는 집안일을 돌봐주지 않고 막냇삼촌은 철부지고, 그래서 모든 걸 어머니가 보듬잖아요. 어떻게 하면 저렇게 모두 용서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이었어요. 엄마는 햇볕이 바람을 이긴다는 걸 가르쳐줬어요.”

모성과 가족애가 든든한 뿌리가 되어서일까. 이경희표 드라마에선 사랑을 말할 때도 ‘사랑’보다 ‘사람’이 앞선다. <고맙습니다>의 푸른도 사람들처럼 휴머니즘이 그저 드라마의 빈틈 사이사이를 메워주는 가벼운 메시지가 아니라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철학이라는 걸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그의 드라마는 동화 같고 판타지 같다. 서로가 서로의 힘에 의해서 상처를 치유받는 판타지.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동화.

1 어린 시절의 상처로 세상을 향한 마음을 닫은 의사와, 에이즈에 걸린 어린 딸을 키우는 당찬 미혼모의 기적 같은 사랑을 다룬 드라마 <고맙습니다>. 편견 없이 사람 사는 동네를 바라보게 한 이 드라마는 2007년 앰네스티 언론상, 한국방송작가상, 푸른미디어상 같은 굵직한 상을 휩쓸었다.

“혼자 살면서 일에만 매달리는데 건강은 누가 챙기나요?”
“한번 쓰기 시작하면 48시간 동안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앉아 있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술도 좋아하고. 건강에 해로운 일만 하죠. 그런데 나는 너무나 좋은 생장 환경에서 사는 식물 같아요. 드라마 쓰기 시작하면 친구들이 홍삼 달여주고 김치 담가다 주고 그래요.”
“친구들이요?”
“<연애시대> 쓴 박연선, <오!필승 봉순영> 쓴 강은경, <봄날> 쓴 김규완 언니 같은 사람들이요. 김규완 언니는 지금 <불한당>을 쓰고 있는데 내 드라마 할 땐 잘되게 해달라고 빌어본 적 없지만 언니 드라마는 잘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드라마 쓸 땐 늘 기도하는 심정인가요?”
“시청률 높게 나오라고 빌어본 적은 없어요. 허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이 죽일 놈의 사랑> 끝나고 나선 감사하는 사람, 만족하는 사람 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앞으로 내가 쓰는 드라마로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게 해달라고. <고맙습니다> 땐 전라도 신안 근처 죽도에서 촬영했는데 그저 무사히, 사고 없이 촬영 끝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볼수록 그는 누가 죽으면 가장 먼저 조전을 칠 것 같은 다감함을 지녔다. 그는 시골 출신이라 착한 동시에 행복한 사람들을 보고 자라서 팔 걷어붙이기 좋아하는 것뿐이라지만.
“난 부모님의 안녕을 위해 산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이 말 진심이에요. 이거 우리 노인네들 보면 참 좋을 텐데, 이거 엄마 아빠 드리면 맛나게 잡술 텐데, 그러다 보니 내 걸 충분히 즐기지 못할 때도 있죠. 그런데 다 그렇듯이 그분들이 나한테 준 게 백만 배 더 많죠. 무엇보다 휴머니즘. 좀 거창한가요? 근데 뭐 별건가요? 친구랑 싸우면 우리 엄마는 무조건 날 야단쳤어요. 친구는 쇠고기 주고 나는 돼지고기 줬어요. 아직도 우리 엄만 김장하고 나면 자기 집엔 딱 두 포기 남기고 남들 다 퍼줘요. 엄마 닮아 나도 퍼주는 걸 좋아하나 봐요.”
“정말 명실상부하게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 자라신 거 같아요. 그래서 왠지 정답을 알고 있을 듯하구요. 행복이 가득한 집은 어떻게 만들어지나요?”
“세 잎 클로버 꽃말이 ‘행복’이고, 네 잎 클로버 꽃말이 ‘행운’이래요. 네 잎 클로버 찾으려고 세 잎 클로버는 다 짓밟잖아요. 가장 가까운 데 있는 행복이 바로 행운인 건데, 그런데도 실체도 없는 거에 집착하고 외롭다고 하잖아요. 행운에 집착하지 않으면 행복이 눈에 보이게 되지 않을까요?”

“행복의 순간은 언제 다가오나요?”
“나도 상두처럼 행복이 어떤 건진 잘 모르겠지만, 드라마 쓸 때 가장 벅차고 드라마 쓸 때 가장 괴로워요. 적어도 세상에 큰 공해는 되지 않는 드라마를 계속 쓴다면 행복할 거 같아요.”
누군가는 그가 <고맙습니다>라는 드라마를 썼다는 사실만으로 훗날 실록에 등재되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그런 찬사 속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수줍은 눈빛으로 ‘적어도 세상에 큰 공해는 되지 않는 드라마를 쓰겠다’는 작가 이경희는 2009년 방송 예정인 대작 드라마<사계>를 준비하고 있다. 어떤 작품이 나오든 논란을 완전히 피해 갈 순 없는 게 작가의 숙명이지만 그에겐 단순한 믿음이 있다. 자신만 진실하다면 누구든 설복시킬 수 있다는 믿음. 그가 만들어낸 숲을 지나면 그 숲의 끝에서 그는 할머니처럼 또 손을 흔들 것이다. 어서어서 희망의 문턱을 넘어오라고. 어서 와서 누군가의 또 다른 삶에 기적을 일으켜달라고.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