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다. 바람이분다. 마흔이 제 2의 사춘기라더니, 청소년기 못지않은 질풍노도가 닥쳐오나보다. 그런데 누군가 말하길, 이 바람은 잘하면 에너지이자 열정으로 환원될 수 있단다. 선례도 쟁쟁하다.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한 셀파인 텐징 노르게이, 태평양을 발견한 마젤란, 문호 톨스토이 모두 마흔 즈음에 비로소 과업을 이루었다. 소설가 박완서씨는 결혼하고 아이 낳아 키우다 가마흔에 등단했다. 나, 나이 마흔에 이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날아오르고 싶다. 여기서 지칭하는 ‘마흔’이란 호적상의 나이 40세를 이르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갈등을 경험하는 시기이며, 사람에 따라 서른 후반 혹은 마흔 중반의 나이일 수도 있다. 여기에 ‘바람이 분다’고 감지한이 시대 모든 여인들을 위한 이야기가 있다.
Part 1_누구나 공감한다, 마흔의 증상
‘제2의 사춘기’인 마흔 즈음 몸과 마음은 10대 못지않게 변화를 겪는다. 그래서 청소년 때의 사춘기와 이란성 쌍둥이라고 표현한다. 동국대 일산한방병원 부인과 김동일 교수에게 마흔 즈음 여성에게 나타나는 몸의 증상에 대해 들어보았다. 그리고 이 시기의 마음을 대변하는 문구를 찾아보았다. 마흔 즈음의 사람들이 말하는 고민도 들어보라. 당신에게만 나타나는 특이 증세가 아니다. 누구나 그렇다.
* 공허하다 감정이 절제되지 않아 쉽게 화내는 때가 많다
누군가로부터 따뜻한 애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강해진다
* 남편이 내 곁에 가까이 오기를 꺼리는 것 같다
더 이상 여자가 아닌 것 같다
* 변화가 두렵다 새로 나오는 작은 기계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젊은 녀석들과 괴리감을 느낀다
* 이틀쯤 밤을 지새도 아무렇지 않았던 20대와 달리 육체적 에너지가 감소해 밤샘이 괴롭다
대신 20~30대에 없던 경험과 연륜이 생겼다
모발 새치가 늘고 가늘어진다. 탈모가 시작된다.
얼굴 눈가의 주름이 현저하게 늘고 얼굴에 털이 나기도 한다. 가끔 열이 얼굴로 뻗친다.
눈 눈의 피로가 심해진다.
목 목뼈가 일자형으로 뻣뻣해지고 목 피부의 주름이 현저하게 늘어난다.
어깨 오십견이 일찍 올 경우 팔을 들어 올리기 불편해진다.
팔과 손 팔뚝에 살이 많이 찐다. 손가락 관절에 조금씩 통증이 느껴지기도 하고, 아침에 뻣뻣한 느낌이 잦다.
등 앞으로 구부정하게 숙여져 키가 약간 줄어든 느낌이 든다.
유방 탄력이 떨어지고 크기가 줄어든다.
비만한 경우에는 전체적인 무게가 늘어 어깨를 아프게 하기도 한다.
복부 체지방이 축적되어 복부 비만이 오기 쉽다
허리 척추 사이가 좁아지고 복부 비만으로 인해 상반신이 앞으로 많이 쏠려 허리에 통증이 느껴진다.
골반 골반을 지탱하는 근육이 약화되어 요실금이 생긴다.
자궁 생리 양이 준다. 자궁근종이 생기기 쉽다.
일부 자궁근종의 경우 월경 양이 많아지기도 한다.
난소 여성호르몬을 생성하는 난포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든다.
질 점막이 얇아지고 건조해지기 쉽다. 성감이 떨어지기도 한다.
무릎 체중이 늘면 관절에 부담이 가서 무릎에 통증이 생긴다.
발 발가락 관절이 쉽게 변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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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_ 심리 전문가와 나누는 지상 상담
<마흔의 심리학>(위즈덤하우스)은 마흔의 열병을 앓던 사십대 남자 이경수 씨가 정신과 전문의 김진세 원장과 대화를 나누며 새로운 도약의 길에 접어든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김진세 원장에게 <행복> 독자를 위해 상담을 의뢰했다.
“이 바람을 후반전 에너지로 돌려라”
고려제일신경정신과 김진세 원장
고려제일신경정신과 김진세 원장의 설명은 언제나 쉽고 재미있다. 그는 책 <마흔의 심리학>에서 마흔의 심리를 딱 집어낼 단어로 ‘바람’을 골랐다. 가슴에 부는 바람을 어떻게 조율하느냐에 따라 그 바람은 영양가 높은 에너지가 되어 인생 후반전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마흔 바람의 정체 “마흔 무렵이 되면 현재의 나로부터 벗어나고 싶은데, 나를 옭아맨 제약이 먼저 떠올라 생각만 간절할 뿐 시도할 수 없습니다. 이 무렵 문득 따뜻한 산들바람이 불면 견고할 줄 알았던 가슴 한쪽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 바람이 우울증일 수도, 방황일 수도, 때때로 외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흔은 일과 가정을 통해 경험과 연륜이 쌓인 나이입니다. 이 바람을 에너지화할 수 있는 때입니다.”
김진세 원장은 마흔 무렵 불어오는 ‘바람’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말한다. 바람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자신을 위한 긍정적인 동력으로 쓸 수 있다. 사춘기의 바람은 어디로 튈지 몰라 예측이 어렵지만 사십대의 바람은 현실에 기반을 둔 것이다. 멀리 내다보는 혜안도 갖추어진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사십대에는 잘만 하면 그 바람을 컨트롤해서 열정으로 바꿀 수 있다. 그런데 이 바람이 왜 하필 마흔 살 무렵에 불어오는 걸까? “육체적인 측면을 먼저 볼까요. 마흔 무렵 남자들은 남성 호르몬이 감소하고 여성들은 여성 호르몬이 감소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문에 젊을 때보다 상대적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이 떨어지게 되지요. 몸의 변화와 함께 가정이나 사회에서의 위치가 안정세에 접어드는 때입니다. 그러니 문득 자신을 돌아보게 되지요. 그동안 자신을 위한 에너지는 잊고 가족이나 조직을 위해 에너지를 써왔거든요. 어느 순간 공허해집니다. 이런 모든 변화가 ‘바람’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마흔을 대처하는 방법의 차이 “거의 100%의 부부가 마흔의 고민을 같은 시기에 겪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도 함께 경험하지요. 라이프사이클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반드시 부부는 대화를 열어나가야 합니다.”
김진세 원장은 이 무렵 각자 심기가 편치 않을 테니 서로를 조금 더 배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부란 서로를 가장 편하게 여기는 동시에 쉬이 여기는 사이 아닌가. 배우자의 처지를 알면서도 종종 상처를 주는 말이 앞선다. 게다가 아내들은 남편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을 것이다. 낯설고, 당황스럽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라 괜히 남편을 윽박지른다. 그러면 남편들은 맥이 빠진다. 이즈음 남자들이 외모가 예쁘기보다는 마음이 푸근한 여자와 외도를 하는 확률이 높은 것도 지친 어깨를 기댈 언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선 마흔을 대처하는 방법에서 남자와 여자는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남자들은 자기 고민을 혼자 해결하려고 합니다. 여자는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들과 수다로 풀거나 주위에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동네 아줌마’들끼리는 모여서 친구가 되지만 ‘동네 아저씨들’이 떼로 몰려서 담소를 나누는 경우는 조기 축구회 때밖에 없습니다.”
남편들은 아내에게 자기 고민을 털어놓으려 하지 않거니와, 눈물이 나와도 숨기거나 참으려고 한다. 남편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이거나 우울해하면, 아내가 둘만의 시간을 마련해 차 한 잔 나누거나 맥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자연스럽게 속 이야기를 하도록 배려한다. 별것 아닌 듯싶은 시간이 남편에게는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여자들은 마흔 즈음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면서 드는 새로운 욕구와 갈망에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 “병원을 방문한 어느 주부는 아이를 키운 뒤 새롭게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데 남편이 극심하게 반대했다고 하더군요. 밖에서 보면 단란한 가정의 이상적인 현모양처이지만 이 주부는 늘 무언가가 공허했던 거지요. 그러다 이 여성이 외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워낙 철두철미한 성격이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눈치 챌 틈도 주지 안았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갈등이 심해 깊은 우울증에 빠져서 병원을 찾았던 거지요. 거짓 삶을 산다는 생각에 ‘내 자신이 밉다’며 괴로워하고 동시에 ‘나를 이렇게 만든 남편이 밉다’며 분노하더군요.” 김진세 원장은 그에게 가정으로 돌아가도록 노력해보라고 말했다. 단순히 ‘가정을 지켜야 하는 의무감 때문에’ 돌아가기를 권한 것이 아니다. 남편, 자녀 등 모든 것을 던질 만큼 가치가 있는 바람인지 스스로 반문해보았을 때, 이 경우 아니라는 답이 거의 의 확실했기 때문이다.
“어떤 바람이든 사람을 들뜨게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왕이면 이 바람이 잠깐 코끝을 건드리고 사라지도록 놓쳐버리지 말고 강력한 추진력으로 바꾸어보는 게 어떨까요.” 마흔이라는 나이는 인생의 전반전과 후반전 사이의 휴식 시간과도 같다. 열띤 전반전을 보낸 뒤 또다시 능동적으로 후반전을 즐길 준비를 할 때다. 그래서 바람은 꼭 필요하다.
(위쪽) 고찬규 ’삶·그 이면-환승’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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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도전을 만들어라”
마흔 넘어 암벽 등반을 시작한 주미경 씨
마흔 세 살에 시작한 암벽 등반 덕분에 주미경 씨는 주말마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암벽 등반뿐 아니라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의 도전을 스스로 만들어 꾸준히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릴 때는 마흔 무렵이 되면 혜안을 가지고 정리된 삶을 살 것 같았어요. 그런데 막상 마흔 즈음 되었을 때는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살다가 죽을 것 같더군요. 아무것도 흠뻑 느끼지 못하고, 뭐 하나 이루지도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았어요.” 논술 강사인 주미경 씨는 서른 아홉 살 무렵 ‘늙었다’기보다는 ‘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산다고 살았는데, 낡은 상태로 앞으로 반이나 더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겁도 났다.
그 즈음의 일이다. 신문 귀퉁이에서 광고 하나를 봤다. 무박으로 ‘가야산 산행과 해인사 새벽 예불’을 갈 사람들을 모집한다는 여행 광고였다. 순간 ‘새벽’에 ‘산사’를 가는 풍경이 떠올랐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한 번도 체험해본 적이 없는 풍경인데 마치 언제 가봤던 양 그를 강력하게 끌어당겼다. 그래서 즉흥적으로 이 여행에 참여했다.
가야산에 오르는 내내 충격이었다. 감동 때문이 아니었다. 도통 걷지를 못했던 것이다. 오르막길을 걸어야 하는데 다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주미경 씨는 맨 뒤로 밀렸고, 같이 출발했던 사람들이 정상에서 그를 세 시간 동안 기다려야 했다. 그날의 충격으로 ‘산도 못 오르면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바로 다음 주부터 주말마다 산에 올랐다. 최소한 걷기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에 홀로 서울 근교의 산에 올랐다. 일요일 아침마다 나가기 싫은데, 그 이른 아침을 놓치면 갈 수 없기 때문에 몸을 일으켜서 나갔다. 신기하게도 4개월이 지나니까 고통이 반으로 줄었다. 귀찮더라도 나갈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오직 산 속에 머물렀을 때의 그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다.
산이 익숙해지자 2002년 3월에 암벽 등반 학교에 들어갔다. 5주 동안 교육을 받고 같이 졸업한 ‘동문’들과 함께 암벽 등반을 시작했다. 혼자 걷는 것과는 다른 세계가 열렸다. 그는 암벽 등반의 경험과 단상을 담은 에세이 <하늘길 타는 여자>(일조원P&P)에 이렇게 썼다. “손가락을 파고드는 그 거칠고 생생한 감촉, 천천히 성실하게 사지를 움직여 한 발자국씩 가까워져가는 정상,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사람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그 소리 없는 격렬함, 그것이 바위였다.” 마흔세 살에 시작한 암벽 등반 덕분에 그는 주말마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암벽 등반을 시작한 지는 벌써 5년째. 주미경 씨는 “반드시 암벽 등반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무언가를 거르지 않고 꾸준히 지속했기 때문에 진정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즉, 자신에게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도전’을 하나 만들어서 꾸준히 노력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암벽 등반은 또 다른 도전의 길을 열었다. 바위를 타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까, 말까, 해도 될까’하는 수준이 아니라, 도전에 응하지 않으면 욕구불만이 생길 것 같았다. 그래서 밤새도록 자판을 두드렸다. 그 또한 산을 한 번 오르는 일과 같았다. 정신적으로 땀을 뻘뻘 흘리고 나면 평화로워졌다. Part 3 _ 마흔에 날아오른 사람들 이야기
사람들은 대부분 성장통을 앓듯 ‘마흔통’을 앓는다. 통증은 당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더라도 시간은 똑같이 흐른다. 이왕이면 당신의 에너지를 몸과 마음을 윤택하게 하는 데 쓰도록 하자. 저마다의 방법으로 마흔 고비를 슬기롭게 넘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혼자 놀 줄 아는 마흔이 진짜 아름답다”
<여자 나이 마흔으로 산다는 것은> 저자 박경희 씨
하고픈 것을 홀로 당당히 할 수 있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자가 되라. 자기 정체성을 모색하려고 시도해본,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줄 아는 여자가 앞으로 반 넘게 남은 인생을 스스로 디자인할 수 있다고 박경희 씨는 전한다.
책 <여자 나이 마흔으로 산다는 것은>(고려문화사)은 이런 서문으로 시작한다. “나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서른아홉에서 마흔이라는 선으로 들어설 때의 아득함. 두려움을 넘어 어지럽기조차 했다. 가고 싶지 않아도 가야만 하는 거역할 수 없는 나라, 마흔이란 나이가 괴물처럼 여겨졌다. 어느 날 휘청거리던 발길이 이끈 곳은 ‘양희은의 콘서트’ 장이었다. (중략) 나는 노래를 들으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해결하지 못한 숙제와 같은 일들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이들 학교에서 내 나이쯤 되는 학부모를 볼 때마다 나는 혼돈스러웠다. 모든 사람들이 과거가 지워진 존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 자식만이 이 세상에서 주목받는 아이이길 바라는 눈길들이었다. 그들의 이상과 신념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두 아들을 치열하게 키운 주부이자 20여 년간 방송 작가로 활동한 박경희 씨는 이 책에서 휘청거렸던 마흔 무렵을 찬찬히 기록했다. 책에 담긴 에세이는 자신의 아픈 속내이자 기자 정신을 발휘해 주위 친구들의 ‘살 냄새 나는 이야기’를 취재한 르포 기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에게는 이 책을 쓰는 시간 자체가 치유의 과정이었다. “그때 양희은 씨의 노래를 들으며 저는 왜 울컥했던 걸까요? 지금은 알 듯합니다. 그즈음 저는 손으로는 밥을 푸고 있는데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도대체 아들의 엄마도, 남편의 아내도, 시부모의 며느리도 아닌 ‘나’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사실 제가 이렇게 상투적인 문제로 고민한다는 사실이 더욱 못 견디게 싫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이었어요. 양희은 씨는 자기 세계를 구축해 저렇게 호소력 있는 노래를 뽑아낼 줄 아는데, 나는 여태껏 뭐 하면서 왔나? 답이 나오지 않더군요. 더 무서운 건 ‘앞으로 뭘 해야 할까’를 스스로에게 묻는 일이었습니다.”
직접 및 간접 경험으로 전문가가 된 그가 여자 나이 마흔에 가장 필요한 것으로 ‘혼자 놀기’를 꼽았다. “학창 시절 똑똑하던 친구들이 결혼하고 애 키우며 집에서 ‘퍼져버리고’ 말더군요. 어디 가고 싶으면 남편을 조르지요. 혹은 친구들끼리 모여 하릴없이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냅니다. 이렇게 남편, 자녀 혹은 또래 아줌마들에게 기대기 시작하면 홀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다 마흔 무렵 문득 자기의 좌표는 어디쯤인지 묘연해지고 말지요.” 그런데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홀로 자유롭게 떠날 줄 안다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간이 생기고 스스로를 잘 이해하게 된다. 직장이 있건 없건 중요치 않다. 자기를 들여다본 시간이 많은 이들은 정체성을 모색하기 마련이고, 곧 흔들리지 않는 여유로움이 자리 잡게 된다.
박경희 씨는 ‘걷기 예찬론자’다. 낙산공원 근처에 있는 집에서부터 인사동까지 걸어가 전시회를 보거나, 동대문을 걸으며 윈도쇼핑을 하거나, 대학로 공연장 일대를 샅샅이 뒤져 좋은 연극 한 편 골라 보고 들어온다. 전에 있던 무기력증이 사라지고, 생각이 정리되고, 무엇보다 체중을 7kg 감량했다.
“에세이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점에 용기를 얻어 몇 년 전부터 소설을 습작했어요. 작년 말 청소년 소설 한 권을 완성해서 곧 출간할 예정입니다. 마흔에 들어설 무렵 휘청거렸던 경험 덕분에 저는 처음으로 앞으로 할 일을 고민한 거죠. 그때 열병을 앓아 참 다행이에요.”
“대화와 존경하는 마음은 모든 고비를 넘는다”
각양각색 취미 활동 함께 하는 윤대성·김정림 씨 부부
서울 외곽의 한 캠핑장에 오토 캠핑을 나온 윤대성·김정림 씨 부부를 만났다. 둘이 심혈을 기울여 고른 휴대용 램프, 더치 오븐 등에는 세월의 더께가 쌓여가고 있었다. 이들은 벌써 올해 여행갈 곳과 배울 것을 적은 리스트를 엑셀 파일로 작성해두었다.
마흔 무렵 부부간의 갈등이 늘어나는 이유는 자신뿐 아니라 배우자도 함께 고비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누구나 자기의 고통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에, 배우자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점에 야속해하고 마음을 닫아버린다. 그러니 뭘 해도 손발이 맞지 않는다. 차라리 따로 노는 게 훨씬 편하다. 그러곤 돌아서서 말한다. “으이구, 저이가 저렇지 뭐.” 그러나 전문가들의 조언을 종합하면 ‘부부간의 원활한 대화’만큼 마흔 시기를 서로 든든하게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하지만 꿈이 그렇지, 나이 들면 젊을 때 같은 열정이 사라지니 으레 건조하고 뻣뻣하게 살려니 싶다. 그런데 여기에 어느 ‘참신한 부부’가 있다. 윤대성(수입자동차협회 전무)·김정림(서울대학교 병원 운영 시립 보라매 병원 근무) 씨 부부다. 올해로 결혼 25년 차인 이들 부부는 매 주말 승용차에 캠핑 장비를 싣고 전국 곳곳을 다니며 오토 캠핑을 한다. 틈날 때마다 함께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겨울이면 스노보드를 타며 여름에는 세일링을 한다. 지금껏 함께 여행한 나라만 해도 수십 개국이다. 남편은 얼마 전부터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아내는 조만간 키보드를 배울 생각이다. 올해에는 MTB를 구입해서 산악 자전거 여행을 시작할 것이고 꼭 카약 타는 방법을 익힐 것이다. 그러니까 이 부부는 모든 취미 생활을 함께 즐기는 사람들이다.
사실 우리 나라에는 부부가 함께 즐기는 문화가 빈약하다. 남자나 여자가 서로 각자의 동창생들끼리 모임을 가지고 여행을 다니는 풍경이 더 익숙하다. 부부동반 파티나 야유회가 연례 행사 정도로 형식적이다. 그런 가운데 이 부부는 유연하고도 단단하게 서로를 신뢰하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취미 활동을 함께 한다.
형편에 맞게 뭐든지 즐겨라 지금 부부가 할 줄 아는 스포츠는 열 손가락을 꼽고도 남지만, 결혼 당시 남자는 가난한 청년이었다. 예식날 하객들에게 점심도 대접하지 못했다. 피로연을 하면 신혼여행 갈 돈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결혼반지도 해주지 못했다. 대신 약속했다. ‘결혼 10주년 때 다이아몬드 반지 사주고, 유럽 여행을 함께 가자’고.
부부는 결혼하자마자 매 주말마다 북한산과 수락산에 다녔다. 당시 형편에 맞게 둘만의 시간을 즐겼던 것이다. 매주 이렇게 둘이 놀러 다니니까 이웃집에서 참 유별난 부부라고 했다. 점점 형편에 맞게 해외여행도 가고 스포츠 장비도 구입했다. “처음부터 ‘그럴싸해 보이는’ 여가 생활을 할 수는 없습니다. 부부의 경제적 여유, 공통의 관심사, 스케줄 등 자신들의 여건을 고려해 취미를 정해야 하지요. 등산뿐 아니라 자전거 타기, 마라톤 등도 좋은 예입니다.”
절대로 남 사는 모습과 비교하지 말라 윤대성·김정림 부부가 젊은 부부들을 만날 때는 원칙이 있다. 반드시 이들을 캠프장으로 초대한다. “젊은 부부가 우리처럼 안정기에 접어든 부부의 아파트에 놀러 오면 집에 돌아간 뒤에 꼭 싸웁니다. ‘그 집 크고 좋더라’ ‘우린 그런 가구 언제 사나’ 하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젊은 부부가 승용차에 짐을 바리바리 싸서 단출하게 놀러 다니는 우리 모습을 보면 무척 즐거워해요. 그네들이 보기에 저희는 뜨거운 밥에 김치찌개 한 솥 끓여 먹으면서도 만족하는 모습이 신선한가 봐요.” 대개 마흔 줄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무언가를 이루고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안한 것이다. 윤대성 씨는 ‘집착하는 바가 없으면 불안할 일도 없다’고 말한다. 뭔가를 모으고 쌓아야 할 일이 없으니 남들이 가진 것과 비교할 일도 없다.
중년만의 에너지 활용법을 익혀라 놀랍게도 이들 부부는 각각 아내가 30대 후반이고 남편이 40대일 때부터 거의 모든 스포츠를 시작했다. 나이 들었다고 해서 배움이 어려워진 것이 아니다. 20대에는 에너지와 열정이 넘치지만 이것을 적재적소에 돌리는 방법을 모른다. 그러나 40대 이후부터는 근력은 약해졌더라도 근지구력이 강해졌다. 쉽게 말해 훨씬 ‘질겨진다’라고 할까.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에너지 중 일정 부분을 정말 원하는 곳에 집중시킬 줄 아는 혜안이 생긴다. 지금은 만능 스포츠 우먼이 되었지만, 사실 김정림 씨는 젊을 적에 몸이 약한 편이었고 활동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남편과 함께 하겠다는 믿음이 제게는 참 당연했어요. 같이 하니 든든했고, 뭘 해도 용기가 났지요.” 그러니 거의 모든 여성들이 40대 이후 몸이 변화하면서 시작된다는 우울함은 아주 잠시 찾아오려 했다.
하나보다는 둘이 더 강하다 부부가 함께 대화하면 어떤 일도 헤쳐갈 수 있다. 전도서에도 ‘하나일 때보다는 둘이 더욱 강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둘이 그저 함께 있다는 것도 서로에게 큰 힘이 되지만 여기에 대화를 원활하게 하면 부부 사이에 진정한 신뢰가 싹튼다.
이들은 부부간 대화에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대화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중요한 건 부부 중 어느 한쪽이 대화가 절실할 때 배우자가 인내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꼭 들어주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바쁘다’ ‘피곤하다’ ‘여유가 없다’고 하지 마세요.” 대화는 상대의 이야기를 먼저 경청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진리 중의 진리를 이들은 25년 동안 실천하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서로의 심장 고동 소리 들으며 살면 불안하지 않아요. 사는 게 뭐 별거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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