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메리와 페퍼우드로 감싸며 은은하게 지속되는 시트러스 향의 에로스 플레임은 베르사체 제품. 그리스 신화 속 진정한 사랑을 향으로 표현했다. 블랙 셔츠와 팬츠는 베르사체, 톱은 렉토 제품.
답을 찾는 남자?
영웅 이아손이 황금 양털을 찾아 떠나는 모험 이야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 첫 장을 차지한다. 외짝 신을 신은 이유를 묻자 이아손은 “잃어버린 것을 인식하는 순간, 사람은 신발 한 짝 이상의 것을 획득하는 게 아닌가”라고 되묻는다. 모든 사람의 생은 무언가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아채는 과정, 그리고 그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는 과정일 것이다. MBC 4부작 로드 다큐멘터리 <뭐라도 남기리>에서 바이크를 타고 방방곡곡의 다양한 삶을 만나는 그에게 붙은 수식은 ‘답을 찾는 남자’다.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몰라서 기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답을 찾는 사람’이라니…. 나는 지금 그 남자를 만나러 간다.
가을 냄새를 훔치려는 듯 바람마저 서성이던 오후, 꾹 다문 입술로 그가 한옥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모델 출신 배우로 아는 이가 많을 정도로 우월한 비율의 슬렌더 체형이 맨 먼저 눈길을 잡는다. 그리고 저 목소리. 스피치 전문가들이 소리, 발음, 호흡, 감정 등에서 ‘스피치 발성의 가장 이상적인 표본’이라 분석했다는 저 나긋한 중저음(제헌절 경축식에서 헌법 전문을 낭독하기도 했다는 그 목소리!). 본디 사람의 신체 중에서 제일 변화가 없는 게 목소리라 했다. 목소리가 가장 깊숙한 가슴속에서 울려 나오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의 깊숙한 가슴속…. 그런 생각에 빠져들 즈음 일순에 유쾌한 웃음소리가 작열한다. 다시 ‘연예계 수다왕’ ‘투 머치 토커’란 그의 별명을 떠올릴 즈음 내 눈을 잡은 안광을 숨긴 눈빛. 처마처럼 완고하게 드리운 그의 눈꺼풀 안에는 고요, 격정이 한데 숨어 있다.
좁은 대문을 지나 돌계단을 올라서면 마주하는 풍경. 가을이 드리운 넓은 정원을 1908년에 지은 세 채의 한옥과 고택이 에워싸고 있다. 정원과 본채, 아래채, 포석정으로 이루어진 2백80평의 아름다운 한옥은 프라이빗 한옥 갤러리 이음 더 플레이스. 베이지 더블브레스트 블레이저는 피어오브갓, 슈즈는 와쿠와 제품. 모자와 티셔츠, 팬츠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답을 찾는 남자요? 지금 난 별로 찾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자기들 마음대로 붙인 거죠. 하하. 한동안 답을 찾으려 노력하긴 했죠.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그게 답은 아니었구나 싶을 때도 있었고요. 지금은? 찾는 과정보다 결과만 도드라지는 걸 걱정하게 된 정도?”
<뭐라도 남기리> 속에서 김남길은 배우 이상윤과 함께 조금 다른 삶을 선택한 길 위의 스승을 만난다. 오지 어른들의 삶을 챙기는 왕진 의사 양창모, 촐라체를 등반하다 손가락 여덟 개를 잃고도 또 다른 모험가로 나선 박정헌 산악대장, ‘빨치산의 딸’이라는 태생적 아픔을 딛고 베스트셀러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쓴 정지아 소설가, ‘유쾌한 털보 할아버지’로 불리는 푸른 눈의 사제…. 김남길은 네티즌들의 질문 “어른이 된다는 건 무엇인가요?” “꿈이 없는 게 고민입니다.” “제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등을 전하고 스승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길을 발견하려면 길을 잃는 과정이 필요하다. 길을 잃는 것도 용기가 좀 필요하다”(왕진 의사 양창모), “추락도 등반의 한 과정이다. 내 번뇌와 고통이 사라지는 건 바로 내가 행동할 때였다”(산악인 박정헌), “어른이 된다는 건 ‘오죽하면 걔가 그랬겠냐’라고 말할 수 있게 될 때”(소설가 정지아)…. 갱지 위에 꾹꾹 눌러 써서 간직하고픈 이야기들이다.
“인터뷰를 끝내고 정지아 선생님이 ‘저건 어떤 산이고, 저건 어떤 산이고’ 하며 뒷짐 지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부끄러웠어요. 그분들께 ‘어른이 뭔가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화두를 던지고 ‘제가 생각하기엔 이런 것 같아요’라고 했던 게 부끄럽더라고요. 나도 웬만한 이들이 겪지 못한 것을 경험하며 살았다는 자부심이 있어서 이야기가 통할 것 같다 싶었는데, 그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죄송스러웠어요. 그리고 내가 느낀 부끄러움마저 ‘마흔 넘으면 세상 좀 알 것 같았지? 다 괜찮아, 그땐 그럴 수 있어’라며 그 뒷모습으로 품어주는 듯했어요.”
묵직한 향으로 관능적 남성의 매력을 표현한 에로스는 베르사체 제품. 투명한 청록색 보틀에 담겨 뚜렷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트러커 재킷, 팬츠는 베르사체 제품.
생은 숨은그림찾기와도 같다. 직선으로 여기던 것이 사실은 곡선이고, 곡선으로 여기던 것이 직선일 수도 있다는 것을 찾아내는 일. 인생에는 훌륭한 바보도 있으며, 불행한 영웅도 있고, 뻔뻔스러운 희생자도 있다는 ‘가능성’을 찾아가는 정도. 길 위의 스승들은 그에게 말 없는 뒷모습으로 그 말을 전한 게 아닐까.
“모두 너무 귀한 이야기죠. 그런데… 내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들이 몸소 겪으며 알아낸 이야기인데, 그걸 내 것인 양 가져오려 하면 안 되잖아요. 내 이야기를 찾아야죠. 다만 그들이 대단한 건 누구에게나 주어진 조건은 똑같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파로호에 갇힌 육지 속 섬마을의 집배원 김상준 선생님은 다섯 살 때부터 등지게를 지고 살았다는데, 주어진 조건이 똑같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분의 ‘비교하지 않았다’라는 말이 가슴에 남더라고요.”
방송이 끝난 후 김남길은 그 길 위의 스승들을 다시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방송에서 못다 한 이야기, 솔직한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그들의 땀이 존중받아야 마땅함을 알리고 싶었다”는 그는 그 인터뷰를 모아 11월에 인터뷰집 시리즈 <컵CUP>을 출간할 예정이다. 판매 수익금은 그와 왕진 의사의 인연으로 시작한(농촌 지역 어르신의 집을 수리해주는) 크라우드 펀딩에 기부금으로 사용된다.
이쯤에서 나는 그에게 ‘답을 찾는 남자’가 아니라 ‘질문하는 남자’란 수식을 붙여주고 싶다. 대답은 이미 있는 지식이나 지혜를 주워먹고 누가 요구할 때 뱉어내는 것이다. 자기가 주인인 사람만이 스스로 질문하고, 문제를 풀어보려 안간힘을 쓴다. 그는 분명 질문하는 남자다.
헤링본 울 코트는 호프, 스웨트셔츠는 보디 by 미스터 포터, 데님 팬츠는 셀린느 옴므 by 에디 슬리먼, 벨트는 아워레가시, 슈즈는 레페토 제품. 목걸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우주최강배우’ 김남길
데뷔 24년 차, 영화로만 쳐도 스물다섯 작품, 드라마로 치면 더 많은 작품을 했다. <선덕여왕>의 비담, <나쁜 남자>의 심건욱, <열혈사제>의 김해일 신부,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의 송하영 형사…. 언뜻 떠오른 그의 배역만 해도 이만큼이다. 그런데도 그는 늘 “필모그래피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배우로서 제 강점은 큰 특징이 없다는 점”이라고도 한다. 시든 꽃잎에도 영광이 깃들었다고 믿게 만드는 그 눈빛으로 비극적 서사를 펼쳐내다가도, 웃긴데 슬프고 슬픈데 웃긴 변화구를 꽂는다(<열혈사제> 속 김해일 신부를 떠올려보라).
흥미로운 점은 유독 그가 이름을 여러 개 지닌 역할을 많이 맡았다는 점이다. <선덕여왕>의 비담과 김형종, <폭풍전야>의 임수인과 임유진, <나쁜남자>의 심건욱과 홍태성/최태성, <상어>의 한이수와 김준/요시무라 준, <무뢰한>의 정재곤과 이영준, <명불허전>의 허임과 허봉탁처럼. 탁월한 캐릭터 흡수력이 주된 이유겠고, 그늘과 퇴폐미와 ‘허당끼’를 모두 담은 그의 외모 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은 삶에 대한 태도와도 관계 있는 듯하다.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어요. 궁금한 건 다 해봐야 했어요. 세상에는 좋다, 나쁘다로 양분되지 않는 일이 있잖아요. 그걸 직접 부딪혀보니까 이건 어떤 느낌이 들고, 이건 나랑 안 맞고… 그걸 경험해보고 싶어서 더 빨리 어른이 되려 했던 것 같아요. 그걸 다 해보고 나니 정작 다른 사람들이 놀거나 방황하거나 길을 찾아다닐 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고요.” (학교에서 깨달음을 얻기보다 몸으로 직접 부딪쳐보겠다는 생각으로 대학을 두 번이나 자퇴하고 연극계로 뛰어든 이야기는 꽤 알려져 있다.)
옐로 니트 카디건은 보디, 팬츠는 렉토, 벨트는 드레익스, 슈즈는 벨지안슈즈 by 유니페어 제품. 이너 톱과 목걸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어차피 자기가 아는 인물을 연기하는 거다. 배우가 자기를 벗어나서 어떻게 연기를 하나. 모양새나 색깔을 흉내 낼 순 있겠지만, 살아온 경험이 연기에 다 나오는 거다. 박완서 선생의 동화책 구절처럼 ‘아이고 뜨거워 하면서 매운맛도 보고, 아이고 쓰라려 하면서 짠맛도 보고, 아이고 저려 하면서 신맛을 보는 게’ 삶이고, 그 삶에 시달려본 김남길이므로 저런 연기를 한다.
그리고 또 한몫하는 그의 천진성. 뉴스 인터뷰에서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어리진 않은데 어른은 아닌 것 같다. 항상 파란 들판을 뛰어다니는 일고여덟 살 소년으로 살고 싶다.” 깨지는가 안 깨지는가 보려고 머리로 통유리를 들이받는 그 또래 아이처럼 새로운 눈으로 보니 세상은 한편 신비하고, 한편 신나고, 한편 진지하다. 그는 스스로를 ‘우주최강배우’라 부른다. 나태해질 때마다 “우주에서 최강의 배우가 되자”는 스스로의 다짐이라 했다.
티셔츠는 렉토, 팬츠는 꼼데가르송 제품. 브라운 로브와 안경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그런 그가 올가을 넷플릭스 시리즈 <도적: 칼의 소리>를 선보였다. 1920년 무법천지의 땅 간도에서 가족과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도적단의 리더가 된(독립군이 아닌! “나라를 위해 싸우면 독립군, 가족을 위해 싸우면 그게 도적”이라고 김남길이 풀이했다) 이윤 역을 연기했다. 시리즈 공개 후 ‘동양 히어로의 매운맛’ ‘김남길표 K-액션의 마침표’라는 기사 타이틀이 등장했다. 마상 액션, 장총·권총·단검·활·도끼·낫이 출몰하는 액션, 모래 폭풍 액션…. 총천연색 액션 시네마스코프의 한가운데서 간도협약, 남만주 철도 부설권, 간도 지방 불령선인 초토화 계획 등 실제 사건이라는 서사의 중심을 잡은 건 김남길표 연기였다.
이윤이 일본군일 때 저지른 과오에 끊임없는 죄책감과 고뇌를 드러내는 건 그의 깊은 눈빛만으로 족했다. ‘내 편 니 편’ 식 가르기가 아니라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야”라는 말(극 중 일본군인 오오카의 대사)이 그대로 이해되는 드라마의 무드를 그가 만들었다. 이에 관객들은 “도적을 보는 것이 애국이다. 항일 역사의 본질을 볼 수 있었다”라는 찬사로 호응했다.
핑크 니트 카디건은 마리아노, 티셔츠는 아워레가시, 팬츠는 엠에프펜, 슈즈는 크로켓앤존스 by 유니페어 제품. 목걸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리더의 오라
<도적: 칼의 소리>에 대한 외신 반응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 “타고난 리더의 오라”다. 극 중 이윤은 도적단을 지배하는 우두머리가 아니라 함께 행동하는 책임감 있는 리더다. 그리고 그는 소속사 길스토리이엔티를 이끄는 리더다.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 배우와 아티스트 입장에서 매니지먼트가 운영되면 좋겠다는 생각, 전적으로 배우의 의지로 출연을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 그러려면 세분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2021년 회사를 만들고, 대표를 맡았다. 그러나 좋은 어른과 성공한 어른의 등식처럼 좋은 대표와 성공한 대표의 등식은 성립되기 힘든 법인데….
“리더는 좋은 방향성을 제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구성원들이 실패하는 것까지도 계획 안에 다 넣어둬야 하는 거죠. 열 번 했던 실수를 일곱 번, 여섯 번으로 줄여가는 방법을 같이 찾아가는 사람, 실패에 대해 함께 책임지는 사람,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만들어주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대표보다 리더가 되고 싶었죠. 사실 우린 좀 느릴 수 있어요. 능력이 출중한 사람을 스카우트하면 그게 더 수월할 테고 성공한 대표에 더 빨리 다가갈 테지만, 좀 늦더라도 동료들과 함께 단단해져가는 좋은 리더가 되고 싶어요.”
옐로 모헤어 카디건은 아워레가시, 팬츠는 리바이스 제품. 티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그는 문화 예술 NGO ‘길스토리’를 이끄는 리더이기도 하다. 2013년 설립한 길스토리는 그동안 한양도성·제주·삼척·남해 등 ‘길’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 콘텐츠로 만드는 ‘길이야기 캠페인’, 시민들이 자신의 콘텐츠를 나누면서 성장·공감·위로를 발견하는 공공 예술 캠페인 ‘공동관심’, 창작가를 위한 공유 공간을 건립·운영하는 ‘아트 빌리지’ 프로젝트, 시리즈 단행본 <컵> 발행 등 여러 캠페인을 진행해왔다. 화가·사진가·작가·디자이너 등 예술가들이 캠페인에 프로보노로 참여한다는 것도 흥미롭다.
“길스토리는 ‘예술을 통해 만드는 공유 가치’라는 모토에 맞춰 공공 예술 중심의 캠페인을 주로 선보였어요. 예술을 통해 세상을 위로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문화를 실험적으로 만들어보고 싶은 게 우리 꿈이죠.”
세헤라자데의 이야기처럼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던 대화가 끝이 났다. 나는 이 독특한 배우, 남자 김남길의 이야기를 받아 적으며 계속 사람 인人 자를 떠올렸다. 사람 인 자의 두 획이 서로 기대선 것처럼 사람의 ‘사람됨’은 서로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수많은 배역의 삶을 연기하며, 배우로 대표로 리더로 살아가며 그가 세상에 던지는 질문은 결국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일 것이다. 그 답을 찾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사람을 이해해보려는 남자,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질문하는 남자다.
화보 진행 오지은 | 사진 신선혜 | 스타일링 박태일 | 헤어 김태현 | 메이크업 김하나촬영 협조 레페토(02-540-2065), 렉토(1522-7720), 베르사체(02-3483-4806), 베르사체 향수(02-3453-7577) 장소 협조 이음 더 플레이스(02-736-8118)
- Story Fashion 배우 김남길이 남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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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을 넷플릭스 시리즈 <도적: 칼의 소리>로, 로드 다큐멘터리 <뭐라도 남기리>로 돌아온 배우 김남길. 익히 들어 알았지만 그는 정말 깊은 사람이었다. 드라마와 영화 연기, 소속사 대표 일, NGO 대표 일 등 화제를 넘나들며 길고 빠르게 많이 오간 대화 속에서 발견한 김남길의 요체는 이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가는 이의 불안과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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