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
패션 디자이너. 영화 <해어화>부터 국립 오페라단의 <동백꽃 아가씨> 무대에 이어 최근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도 의상을 선보였다. 전통 맞춤 한복 브랜드 차이 김영진과 현대적 코드를 접목한 기성복 차이킴 두 개의 브랜드를 운영하며, 한국의 멋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푸른 뉴똥 드레스에 레드 깃의 흰 철릭 누비 코트를 걸친 모습이 멋스럽다.
“한복을 현대화해야겠다는 어떤 거창한 사명감으로 시작한 건 아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나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한국적 레디투웨어 차이킴이 탄생한 것이다. 디자인이란 곧 디자이너의 정체성이니까.”
한국적 기성복 차이킴의 옷을 곱게 차려 입은 선남선녀는 이동찬ㆍ강유진 예비부부. 파티복으로도 손색없는 룩으로, 여자는 화사한 꽃 패턴 철릭 원피스에 블랙 튀튀를 덧입고, 남자는 사폭 바지에 울 소재 포를 입었다.
그 누구도 한복을 입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복의 부가가치가 실용성, 합리성, 가성비 등 매우 건조한 가치 기준으로 평가받는 현실이 안타깝다. 매일 편한 레깅스와 셔츠만 입고 살 수는 없지 않나. “한 번밖에 못 입네, 가성비가 떨어지네…”라고 말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한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갖고 싶은 옷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때로는 전통에 대해 편협한 시선이 존재한다.
사람들의 한복에 대한 인식이 20세기 초반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철릭 원피스는 16세기 무관이 입던 공복에서 모티프를 얻어 지금의 소재로 만든 옷이다. 오래된 것으로 따지면 더 전통성을 지니고 있는데 왜색이 짙다고 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더라. 불분명한 전통이라는 관점으로 나를 묶지 않았으면 한다. 차이킴은 실용적 한복도, 생활한복도 아니다. 레디투웨어, 즉 패션 의상이다.
무엇보다 현대인의 공감을 얻어야 의미가 깊다.
철릭 원피스는 출시 이래 실크, 면, 리넨, 데님, 맨투맨 티 소재 등 여러 버전으로 선보이며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카피 제품도 무수히 나왔을 정도다. 하지만 모방한 유사 제품 대부분이 평면 재단 방식까지 따라 하진 못했더라. 차이킴 고유의 철릭 원피스는 몸에 걸쳤을 때 자연스럽고 더 예쁘다.
현대 한국인, 김영진의 색깔을 만드는 게 목표다.
난 단지, 내가 만드는 건 기본적으로 예쁘고 최고여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모두 빨간 것을 입을 때 난 초록 입으면 안 돼? 하는 기질이 발동했다. 요즘 유행이라고 베트멍, 구찌 흉내 내는 건 싫다. 어디에도 없는 확실한 내 색깔, “김영진이 아니면 절대 만들 수 없어”라는 말을 듣는 브랜드가 되고 싶다.
차이킴 서울시 마포구 연희동 188-58 문의 02-736-6692
이진희
의상 감독이자 하무 대표. 무대미술과 의상을 전공하고 동서양 복식사를 공부했다.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구르미 그린 달빛> 등 사극의 의상을 맡아온 그는 단순하면서 힘이 있는 한국적 디자인에 매료됐고, 그 차별성을 더욱 단단히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평면 재단으로 완성한 에메랄드 블루 컬러의 튜닉 원피스를 입은 그의 모습이 단아하다.
“상고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지금까지 관통하는 그 무엇을 찾고자 한다.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우리가 즐겨왔고 좋아해온 그것을 찾아내고 현대와 소통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하는 것, 이 시대 디자이너의 숙명이 아닐까?”
한복 모티프의 일상복 하무 의상을 입은 건축가 손인선과 무용가 조형준은 곧 결혼을 앞둔 커플이다.한복의 깃 형태를 수정해 만든 화이트 튜닉 원피스에 두루마기에서 착안한 마 원단 코트를 입은 여자. 워싱 면 생지에 직접 문양을 그려 넣은 셔츠와 너른 바지에서 착안한 와이드 팬츠를 입은 남자. 둘의 사랑스러운 모습은 흡사 웨딩 사진 같다. 꽃 스타일링 신현선
한복의 정의부터 다시 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금 알고있는 한복은 조선시대의 예복 위주이며, 서민 복식은 덜 알려져 있다. 사료적으로 더 연구하고 찾아내야 한다. 예복으로서 한복의 전통은 지키고, 일상복으로서 한복은 현대화된 문화나 생활에 맞게 수정해야 할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 인지하게 됐다.
지난 6년간 ‘베세토 연극제’ 프로젝트를 맡아왔다. 지난해 공연에서는 40년 식민지 기간에 대해 연극화했는데, 공연을 올린 후 엄청 울었다. 식민지 이후 한국어를 읽고 쓰는 선생님이 손에 꼽힐 정도로 우리 글, 노래 등 문화는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렇게 우리 전통은 흐름을 잃었고, 근대로 자연스럽게 진화하지 못한 채 현대로 넘어와버렸다.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옷이 자연스럽게 진화해왔다면 우리나라에도 세계적 디자이너가 나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역사에서 아이덴티티를 가져와 작업하는 일본 대표적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 이세이 미야케, 가와 쿠보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급진적인 것에 대해 쉽게 공격하고, 편협한 기준으로 평가하고, 발전할 수 있는 부분이 차단되는 경향이 있다.
‘한국스러움’의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싶다.
양복처럼 몸에 달라붙지 않는 편안한 실루엣, 직선과 곡선의 조화미, 평면 재단과 자연에서 온 색감 등 내 방식대로 한국적 DNA를 다듬어가고 있다. 특히 단순하면서도 힘 있고 유니크한 우리 감성을 깨닫는 과정을 통해 지금의 하무HAMU를 론칭했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지만 벌써 홍콩, 뉴욕 등 해외에서 기자나 바이어의 관심을 받고 있어 뿌듯하다.
하무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1길 12 문의 02-444-2115
양정은
보자기를 이용한 친환경적 포장과 한국적 멋이 담긴 생활 소품을 선보이는 호호당 대표. 지난해 책 <사는 동안 좋은 일만 있으라고>를 냈고, 여러 강연을 통해 삶에 행복을 더하는 비법을 전하고 있다. 1월부터 새롭게 선보이는 한복 라인 ‘히스토리바이호호당’의 양단 한복을 입고 미소 지은 그의 자태가 참 곱다.
“한국 사람이 기쁜 날, 중요한 날에 자연스럽게 한복을 입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려면 예쁜 한복을 누구나 좀 더 합리적 가격대로 손쉽게 구입할 수 있어야 한다. 언제든 필요할 때 꺼내 입을 수 있는 양질의 대중적 한복이 필요한 때다.”
히스토리바이호호당 한복을 입고 화보를 찍는다는 이야기에 유난히 기뻐했던 어린이들. 루비 케이브는 색감이 고운 노방 한복을 입고 플레이모빌 피겨를 장식한 노리개를 고름에 걸어 재미를 더했다. 이한규는 귀여운 백호 문양을 넣은 양단 한복을 입었다.
한복을 가까이하며 살아왔다.
사극 의상을 만드시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여러 시대 한복을 보며 자랐다. 그 덕분에 어릴 때도 계절별로 한복을 가지고 있었고, 결혼할 때도 다이아몬드 반지보다 녹의홍상을 갖고 싶었다. 요즘도 중요한 날엔 한복을 입곤 한다. 조만간 해외에서 열릴 가족 모임에도 한복을 입고 참석할 예정이다.
편하게, 합리적으로 살 수 있는 한복 브랜드가 거의 없다.
대학생 때 일본 도쿄 여행 중 하나비 축제를 보러 갔다. 남녀노소 멋쟁이든 아니든 모두 전통 의상을 입고 하나가 되어 불꽃놀이를 즐기더라. 그런 문화를 받아들이는 젊은 세대가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런데 다음 날 유니클로에 가니 유카타를 기성복으로 팔고 있었다. 대중적 브랜드에서 전통 의상을 판매하니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우리 삶 속에서 활용해야 가치가 있다.
호호당은 옛것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일상에서 자주 꺼내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디자인한다. 한복은 특별한 날 입는 옷이다. 그렇게 좋은 날, 손쉽게 꺼내 입을 수 있는 한복을 부담 없이 가지고 있다면? 고궁에 갈 때도 굳이 빌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전통적이되 현실적인 한복이 늘어나야 한다.
길이를 짧게 하거나 소재를 달리하는 절충은 하지 않았다. 그저 예쁜 전통 한복은 꼭 맞춰 입어야 한다는 점, 그래서 비싸다는 아쉬움을 개선하고자 했다. 고가의 아름다운 한복 시장을 존중하지만, 대중 시장에는 고민 없이 공장에서 찍어낸 중국산이 판친다. 철학과 매력을 담고 있으면서, 합리적 가격대로 소장할 수 있는 중간 시장이 더 커지길 바란다.
호호당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129 문의 02-704-0430
김혜순
전통 복식 연구가이자 예정藝丁 김혜순 한복 대표. 드라마 <황진이>, 영화 <광해>의 의상을 제작하고, ‘2010년 G20 패션쇼’와 지난해 프라하에서 주 체코 대한민국 대사관 초청 한복 패션쇼를 열었다. <한 가지 생각> <아름다운 우리 저고리> 등 저서를 통해 한복의 멋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흰 블라우스에 한복 스카프를 맨 그의 모습이 참 우아하다.
“한복이 시대의 생활 방식에 따라 변하는 건 당연하고, 늘 그래 왔다. 굳이 한복 앞에 ‘신’ ‘개량’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도 없다. 다만 현대 일상에 맞게 수정하되 한복의 기본 틀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혜순 선생의 주선으로 만난 청춘 남녀가 나들이용 한복을 입고 추억을 남겼다. 조용준은 아랫단의 대님을 없애고 허리춤에 고무줄을 달아 한결 입기 편하게 만든 바지에 한복 소재 트렌치코트를 걸쳤다. 중국에서 유학하며 종종 한복을 입고 친구들에게 그 멋을 알려왔다는 이솔잎은 고름을 떼고 소매 끝을 술처럼 잘라 재미를 더한 저고리, 길이와 폭을 줄인 사각 치마를 입었다.
한복이 잊히고 있다.
쉽고 편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겹겹이 입는 과정도 복잡하고 활동이 불편하고 보관과 관리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늘 간편한 게 답일까? 오늘날 한복은 예를 갖출 때 입는 옷이다. 자주 입을 필요는 없다. 대신 한복은 귀하다는 것, 우리의 고유함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것, 우리가 이렇게 격조 있는 민족이라는 것만큼은 사람들이 느끼고 알면 좋겠다. 생애 특별한 날만큼은 불편함도 기꺼이 참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복의 현대화는 자유로워야 한다.
다만 한복의 기본 틀을 벗어나는 순간, 한복이라고 부를 순 없다. 구분이 필요하다. 현대 한복과 한복적 요소를 가미한 현대 의상. 이 둘은 가는 길이 다른 옷이니까. 또 현대인이 한복을 입지 않는다고 애통해할 필요도 없다. 입히려고 애쓰다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한복이 판치게 됐다.
한복에 대한 안목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진짜를 입어봐야 차이를 알 수 있다. 궁에 무료로 입장하기 위해 입는 대여한복은 가짜다. 아시아권 예복이 섞여 있는 정체불명의 옷인데, 대부분이 뭐가 잘못되었는지, 어디까지가 한복인지 모른다. 그게 가장 큰 문제다. 우리 선조들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기본은 알아야 한다. 공부가 답이다.
저고리에 관한 책을 썼다.
1백 벌의 저고리 유물을 재현했다. 지금도 1600년대 우리 옷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37년째 한복을 만들고 있지만 지금도 꾸준히 민화, 풍속화 등을 찾아보면서 공부한다. 거창한 사명감 때문이 아니다. 나 스스로 저고리에 반했고, 이 아름다운 걸 그저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다.
예정 김혜순 한복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725-52 문의 02-567-6081
배시훈
한국적 소재와 기법을 바탕으로 만든 기성복 르토이아의 디자이너. 전통 한복 맞춤 브랜드인 꼬세르 배영진 대표의 큰딸이기도 한 그는 파인 아트를 전공한 동생 배시정과 함께 한국적 정서를 지닌 라이프스타일 숍 비애이 서울BAE Seoul을 삼청동에 오픈했다. 생동감 넘치는 초록색 누비 재킷을 블랙 진과 매치한 모습에 당찬 멋이 있다.
“한복 이전에 한복에 필요한 원단 산업과 기술 장인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은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다. 아름다운 전통 원단과 정교한 바느질 기술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승화해 현대인이 찾게끔 만드느냐도 함께 고민해야 할 숙제다.”
각각 피브레노와 모닝턴 웨어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임성민, 김건우 부부. 이들은 한국적 기성복 르토이아 옷을 입은 소감으로, 고급스럽고 멋스러워 돋보이고 싶은 날 안성맞춤일 것 같다고 말한다. 아내는 누비 스커트와 깨끼 바느질로 안감 없이 만든 노방 블라우스를 입고, 남편은 한국적 깃 부분에 벨벳으로 포인트를 준 누비 재킷을 입었다.
어릴 때는 한복의 소중함을 잘 몰랐다.
전통 한복을 만들어온 엄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늘 가까이에 한복이 있었다. 하지만 막연하게 매장에 있는 옷으로만 생각한 것 같다. 나이가 들어서야 우리 것이라는 자부심을 느꼈고, 현대인에게 왜 외면받을까 안타까움이 생겼다. 외국 사람이 길거리 대여 한복을 보고 예쁘다고 말하는 것이, 잘못 알려지는 것이 아쉽고 속상하다. 정말 좋은 소재로 만든 진짜 한복의 아름다움을 세계인이 알아주면 좋겠다.
한복 이전에 원단 산업부터 지켜야 한다.
경기가 안 좋다보니 한국 실크 산업, 염색 산업이 순차적으로 쇠락해가고 있다. 한복을 안 입고 원단을 안 만드니, 실을 만들 필요가 없으니, 하루아침에 서너 군데가 문을 닫는 추세다. 명주를 만드는 곳은 우리나라밖에 없는데 사라지고 있으며, 1백여 년 역사의 세계적 가치를 지닌 진주 실크도 위기에 처했다. 우리가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너무 멀리 와버린 걸까?
유니클로 같은 패스트 패션이 일상복을 장악한 시대에 “한복을 입자”고 말한다면 과연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우리가 지켜야 할 것에 대한 관심을 끌기 위한 현실적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진정한 세계화를 꿈꾼다.
우리나라에도 한국적 아이덴티티를 세계적 감성으로 승화한 디자이너가 많으면 좋겠다. 요즘 눈에 띈 이세IISE라는 브랜드가 있는데, 교포 2세 형제가 천연 염색과 소재 등 한국적 모티프를 담아 디자인한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로 미국에서 판매하는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나 역시 외국인이 봐도 입고 싶다고 느끼는 우리 옷을 만들고 싶다.
BAE Seoul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72 문의 010-9365-6586
- 스토리 패션 한복, 지금 우리의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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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고 그르다는 판단은 미뤄두어도 좋다. 전통에 관심을 가진 디자이너의 다채로운 풀이를 즐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으니까. 우리의 고유한 옷에 대한 디자이너 5인의 현대적 해석.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