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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셔츠의 모든 것 2 화이트 셔츠는 입는 사람의 품격으로 완성하는 옷
흰 셔츠와 검정 치마에 운동화를 신고 카메라 앞에 선 한국 패션계의 거장 진태옥은 그 흔한 귀고리나 목걸이 하나 없이도 화려하게 빛났다. 누군가는 그저 평범하다 여길 법한 흰 셔츠가 그녀에게는 마치 우아한 드레스처럼 존재감을 드러냈다.

‘화이트 셔츠’를 기사 소재로 다루면서 어찌 디자이너 진태옥을 만나지 않을 수 있으랴. 지난해 10월, 진태옥이 자신의 패션 업적을 집약해 연 50주년 기념 전시를 다녀온 이라면 알 것이다. 그의 패션 역사에서 화이트 셔츠가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지. 디자이너의 시작점이 화이트 셔츠였다 말하고, 화이트 셔츠를 최고의 옷이라 여기며, 매 시즌 다양한 변주를 통해 화이트 셔츠를 선보이는 진태옥. 청담동 부티크 건물 3층에 위치한 아틀리에에서 만난 그는 벌써부터 가을・겨울 시즌 준비에 한창이었다. 3층까지 계단을 가뿐히 오르내리고(운동을 생활화하기 위해 일부러 엘리베이터를 폐쇄했단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서대영(배우 진구 분)이 좋다며 미소 지으며, 뷰욕Björk과 아델Adele 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는 패션 거장은 80대라는 나이가 거짓말인 것처럼 젊은 세대의 트렌드를 꿰고 있었다. 마치 네버랜드의 피터팬처럼 언제나 소녀일 것 같은 그는 디자이너로서의 감성과 영감의 원천이 사춘기 시절 가슴속에 품은 화이트 셔츠에 대한 환상에서 비롯됐노라 고백했다.



"이제는 더 빼려고, 더 단순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셔츠가 심플할수록 입는 사람의 내면, 라이프스타일, 미적 수준, 미감까지 드러내 셔츠를 입은 사람을 더 빛나게 만들어주니까요."


선생님께 화이트 셔츠는 왜 그토록 특별한가요?
내가 디자이너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과연 나에게 무엇이 잠재되어 있을까 생각하다 딱 떠오른 장면이 있었어요. 사춘기 시절, 창밖 너머로 본 빨랫줄에 걸려 있는 흰 셔츠가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끼는데, 마치 빛이 창호지를 뚫고 전해지는 것처럼 햇살이 셔츠의 면을 비추자 따스하고 아름다운 오브제로 다가온 거죠. 낙엽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영향을 받던 소녀의 눈에 그 이미지는 운명 같았지요.

1950년대 당시 사람들은 흰색 셔츠를 어떻게 매치했나요?
그때는 패션이라는 것도 없던 시절이에요. 여자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남자가 검은 면바지에 입던 게 흰 셔츠지요. 그렇게 흰 셔츠는 남자들만 입었어요.

선생님은 그러한 화이트 셔츠에 여성성을 부여하셨죠.
셔츠가 지닌 남성성이 나에게는 묘한 어필을 했어요. 남자의 넉넉한 셔츠를 여성이 입었을 때, 큰 옷속에 폭 싸인 작은 여자의 몸은 보호 본능을 일으키며 섹시하죠.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여자인 순간이에요.

서양 복식의 기본인 화이트 셔츠를 한국적 감성으로 녹여내는 게 선생님표 화이트 셔츠의 큰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한국적 정서는 무엇인가요?
난 한국에서 나고 자랐어요. 모든 DNA가 그냥 한국인 거죠. 그러니까 어떤 특별한 의도로 노력한 게 아니라 그냥 토종인 내가 만들어서 그런 정서가 느껴지는 게 아닐까요? 파리에서 활동할 때 바이어들이 그러더군요. 진태옥의 셔츠는 유럽 디자이너의 셔츠와 뭔지 모르게 다르고, 특별하다고. 결국 내 영혼이 담긴 옷이기에 그런 한국적 감성이 나오는 것 같아요.

선생님의 화이트 셔츠의 과거와 오늘은 어떻게 다른가요?
젊을 때는 의욕이 넘치다 보니 장식을 더 달고 싶고 디테일을 더 넣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 일을 50년째 하다 보니, 디자인에 대한 철학이 많이 바뀌었죠. 이제는 가능하면 더 빼려고, 더 단순하게 디자인하려고 노력합니다. 셔츠가 심플할수록 입는 사람의 내면, 라이프스타일, 미적 수준, 미감까지 드러내 셔츠를 입은 사람을 더 빛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하니까요.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 건가요?
옷을 예쁘게 잘 만드는 게 끝이 아니라, 옷을 입을 사람을 생각하게 된 거죠. 저는 제 옷을 입는 분께 이렇게 말해요. “저는 그저 제시하는 겁니다. 이 옷이 돋보이는 건 입는 분의 인격, 교양, 역사가 완성해주었기 때문입니다”라고요. 그래서 옷을 통해 소통하는 법을 알게 됐고, 그래서 행복합니다.

그러한 깨달음을 얻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딱 어느 시점이라고 할 순 없고, 디자이너 이전에 인간으로서 성숙한 결과 같아요. 나이가 들면 자연을 보더라도 예전과 다르거든요. 오늘도 무심코 창밖을 보니 화단에 제비꽃 하나가 피어 있더라고요. 새가 물어왔건 바람이 데려왔건 기적처럼 그곳에서 발아한 거예요. 그런 작은 일이 크게 다가오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그래서 선생님의 화이트 셔츠는, 요즘의 실험적이고 장식적인 셔츠들과 달리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주는 사람도 있어야 하죠. 어떤 스타일이든 취향이 맞는 소비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뭐가 옳고 그른 건 아니에요. 모두 과정이지요. 그런데 젊은 디자이너의 컬렉션을 보다 보면, ‘저 나이에 벌써 이걸 알아?’ 하며 놀라고, 컬러와 소재 선택, 디자인이 일치되고, 무대를 만들 줄 아는 모습에 ‘내가 저 나이에 저랬나?’ 생각하게 되는 몇몇이 있죠. 그 존재가 나에게 황홀하게 다가와서, 몇 년 전부터 주시하고 있습니다.

누군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그렇지 못한 디자이너에게 상처를 줄 수 있으니까 공개하진 않을래요. 다른 후배를 칭찬하자면, 디자이너 정욱준이 잘하는 걸 보면 행복해요. 정욱준이 유럽의 명품 브랜드 아트 디렉터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날이 빨리 오면 좋겠어요. 내가 그걸 봐야 하는데….

화이트 셔츠가 등장하는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나요?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잉그리드 버그먼이 사랑하는 남자가 송중기처럼 전쟁터로 가야 하는 순간에 적에게 들킬까 봐 숨어 있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셔츠를 입고 있어요. 그 장면이 그렇게 예쁘고 잊히질 않아요.

지금 입고 계신 화이트 셔츠를 설명해주세요.
이번 봄・여름 시즌 제품이에요. 전 이렇게 큰 셔츠를 목덜미와 뒷목 뼈가 훤히 드러나게 뒤로 젖혀 입는답니다. 소매도 길게 늘어뜨리고요. 열여덟 살 때부터 줄곧 이렇게 입었어요. 내가 생각하는 가장 여자답고 섹시한 화이트 셔츠 룩이죠.

평소에 화이트 셔츠를 어떻게 활용하나요?
휴가 갈 때 트렁크 속에 챙기는 건 화이트 셔츠밖에 없어요. 수영복 위에도, 잘 때도, 밥 먹고 활동할 때도 늘 화이트 셔츠를 입지요.

화이트 셔츠를 멋지게 소화하는 법을 조언해주신다면요?
어떤 마음으로 화이트 셔츠를 대하는지가 중요하죠. 같은 옷이라도 캐주얼하게 연출할 수 있고, 이브닝드레스에 진주 목걸이와 매치하면 파티 룩으로도 손색없어요.



#화이트 셔츠 #진태옥
글 강옥진 기자 | 사진 김정한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