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80년대 초반 영화 <프랑스 중위의 여자> 속 영국 남부 해안가에서 존재감을 발휘한 메릴 스트립의 화이트 셔츠. 2 영화 <클로저> 속에서 화이트 셔츠 하나로 여성스러운 지성미를 뽐낸 줄리아 로버츠. 3 CH 캐롤리나 헤레라를 대표하는 화이트 셔츠 컬렉션. 4 화이트 셔츠를 대표하는 캐롤리나 헤레라 여사. 5 완벽한 테일러링이 돋보이는 진태옥 디자이너의 유니크한 화이트 셔츠. 6 퍼프소매 셔츠로 소녀적 매력을 드러낸 펜디의 2016 봄・여름 시즌 컬렉션.
스타일의 초석, 화이트 셔츠
남성성을 상징하는 슈트의 필수적 아이템 은 재킷도, 타이도 아닌 화이트 셔츠다. 화이트 셔츠가 없다면 완전한 슈트라고 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셔츠는 여성도 남성 못지않게 즐겨 찾는 의상이 되었고, 누구라도 옷장에 한두 벌 갖고 있을 정도로 지극히 대중적인 아이템이다. 화이트 셔츠는 일반적으로 ‘와이셔츠’라고 불린다. 이는 오래 전 일본인이 화이트 셔츠를 편하게 부른 데서 유래한 것. 셔츠는 기본적으로 목 부위의 칼라와 가슴께의 포켓, 단추가 달린 소매가 있는 구조이며 실크 소재의 셔츠는 보통 블라우스라고 부른다. 의상 코디네이션의 기본 아이템이다 보니 의류학자들은 세월에 따른 트렌드와 복식사를 연구할 때 셔츠를 가장 먼저 주목하기도 한다. 1600년대에는 네크라인에 셔링을 장식한 과장된 셔츠가,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이후 신사의 품격을 중요시하던 시대에는 높은 스탠딩 칼라의 셔츠가 등장했다. 요즘 형태에 근접한 셔츠가 개발된 19세기 후반 이후에 셔츠 디자인은 더욱 세분화되었다. 1930년대에는 캐서린 헵번의 매니시 룩이 유행하면서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 사이에서 ‘잇 아이템’으로 부상하기도. 이후 디스코 문화가 대두된 당시에는 동그란 어깨선을 강조한 퍼프소매를, 미니멀리즘 트렌드가 주목받을 때는 단추를 안쪽에 숨기고 실루엣이 간결해지는 등 셔츠가 더욱 모던해졌다. 이렇듯 셔츠는 문화와 시대상을 자연스럽게 반영하면서 남녀노소를 막론한 패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허리 라인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면ㆍ실크ㆍ합성섬유 등 어떤 소재를 얼마나 혼방했는지 등에 따라 화이트 셔츠의 느낌은 천차만별이다. 심지어 셔츠 단추를 하나, 두 개, 세 개 풀었을 때 그 미묘한 차이로 인해 분위기가 각각 달라진다는 사실. 또 칼라가 둥근지 뾰족한지부터 양옆 칼라의 간격, 각도에 따라 클래식 슈트용 셔츠인지 캐주얼 셔츠인지 구별된다. 요즘엔 셔츠 위쪽 단추를 몇 개 풀어서 한쪽 어깨를 드러내 입기도 하고, 밑단을 묶어 짧게 입기도 한다. 일부 디자이너들은 화이트 셔츠를 연출할 때 목 부분은 그대로 잠근 채 아래쪽 단추를 모조리 풀어 스트리트 무드의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이기도 했다.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스타일로 연출할 수 있는 화이트 셔츠의 가장 큰 장점이자 꾸준히 인기를 누리는 이유다.
사회 배경을 반영한 디자인
현재의 화이트 셔츠가 있기까지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고대 아시리아 제국의 모직 셔츠가 그 전형이라는 견해가 있으며, ‘셔츠shirt’라는 단어는 스칸디나비아 지방에서 간단히 입는 것을 뜻하는 ‘스키르타skyrta’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진다. 이후 ‘스키르타’는 ‘scryte’ ‘schirte’의 단어 변형을 거쳐 16세기경 비로소 ‘셔츠’라는 이름이 정착한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셔츠는 본래 상반신용 속옷이었다. 약 18세기까지 속옷으로 취급하던 셔츠는 19세기 후반부터 앞쪽 단추로 여미는 방식으로 변형되며 지금의 셔츠 모습을 갖추었고, 속옷과 겉옷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겉옷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옷에 땀이나 오물이 묻는 것을 막기 위한 속옷으로 입었던 셔츠는 과거에는 하의용 속옷인 브리프의 역할도 담당했다. 셔츠 뒤쪽 밑자락을 앞쪽으로 돌려 단추로 고정해 입었다. 현재의 셔츠 밑자락이 길이가 길고 큰 라운드 형태인 것도 이 때문이다. 요즘의 클래식 화이트 셔츠 소매 단이 재킷보다 1cm 정도 길고 칼라가 위로 올라와 있는 것은 재킷의 목 부분과 소매가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19세기 말까지 화이트 셔츠는 규칙적으로 옷을 갈아입고 자주 세탁할 수 있는 부유한 사람의 전유물이었기에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화이트 셔츠가 남성복 슈트의 격식 있는 의상이 아닌, 가볍게 입을 수 있는 스타일로 변화한 것은 20세기 초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이후다. 전쟁 후 사회 관습이 약화되자 남성의 옷차림도 한결 편안해진 것. 정장과 이브닝용 화이트 셔츠 이외에 요즘과 같은 컬러풀한 셔츠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화이트 셔츠의 소매에 달려 있던 커프스링크는 보다 캐주얼하게 단추로 대체되었다.
화이트 셔츠, 남자만의 기본이 아니다
본래 남성용이던 화이트 셔츠의 매력은 오히려 여성에게서 더 자주 엿볼 수 있다. 화이트 셔츠 하나면 연출하기에 따라 우아하거나 지적인 이미지부터 편안한 이미지까지, 여성이 지닌 매력을 무한대로 끌어낼 수 있다. 남자 친구의 커다란 셔츠를 입은 여성이 영원한 로망임은 대부분의 남성이 동의할 것이다. 영화 <미스터&미세스 스미스>에서 화이트 셔츠 하나만으로 우아하면서도 와일드한 캐릭터를 만들어 낸 여배우 앤젤리나 졸리처럼! 화이트 셔츠의 단추를 두세 개 풀어 헤친 모습으로 뭇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섹시 아이콘의 원조, 브리지트 바르도와 샤론 스톤은 어떠한가. 몇 년 전 한 남성복 정장 브랜드 광고에서는 빼어난 몸매로 유명한 여배우가 남성용 셔츠와 재킷만 걸친 채 등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화이트 셔츠를 입은 여성은 남성뿐 아니라 같은 여성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여성용 샤넬 마드모아젤 향수의 2010년 광고 속에는 단발 머리를한 여배우, 키라 나이틀리가 중절모와 화이트 셔츠로 강한 인상을 남겼으며,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 속 케이트 윈즐릿은 셔츠 아랫부분을 질끈 묶은 듯한 스타일로 그녀의 신경질적인 캐릭터를 반영했다. 응용하는 방식에 따라 보다 새롭고 다양한 스타일로 연출할 수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현대의 개성적 변주
마치 화가가 하얀 캔버스 위에 작업을 시작하듯, 화이트 셔츠는 디자이너에게도 패션 디자인의 시작이자 무한한 영감을 주는 매개체다. 동시대 디자이너들은 각자의 개성과 아이덴티티를 담아 화이트 셔츠를 만들어낸다. 대표적 디자이너는 바로 셔츠와 드레스의 대가, 캐롤리나 헤레라다. 브랜드 초기부터 화이트 셔츠 컬렉션을 론칭하며 여성성을 강조한 아이코닉한 화이트 셔츠를 디자인한 그녀는 “어떤 것을 입을지 모를 때 나는 항상 화이트 셔츠를 고른다. 다양한 방법으로 입을 수 있기에 매력적인 아이템이다. 주얼리가 있어도, 없어도 잘 어울리며 청바지 또는 길거나 짧은 스커트에 두루 매치하기 좋다. 일할 때부터 특별한 날까지 입을 수 있으니까”라며 화이트 셔츠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단추를 풀었을 때 살짝 보이는 세 가지 색상의 그로스그레인 플래킷gross grain placket으로 유명한 톰브라운의 화이트 셔츠도 빼놓을 수 없다. 셔츠 한 장에도 확고한 아이덴티티를 표현한 사례다. 요즘 패션계 인사들이 가장 주목한다고 해도 무리 없는 프랑스 브랜드, 베트멍의 소매가 긴 화이트 셔츠는 오버사이즈 열풍을 불러오기도 했다. 이 외에도 컨템퍼러리 디자이너들은 소매 (cuff)를 극단적으로 넓게 만들거나 컷오프 스타일로 연출하는 등 화이트 셔츠로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냈다. 클래식한 디자인에서 출발해 개성을 가미한 디자인으로 요즘 가장 주목받고 있는 화이트 셔츠. 지금까지의 모습보다 앞으로의 디자인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는 화이트 셔츠 하나로도 무한한 변주가 가능하기 때문이리라.
셔츠 디테일 알아두기
화이트 셔츠는 칼라 형태, 또는 다른 디테일한 차이에 따라 다양한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1 스프레드 칼라 셔츠 칼라가 90도 이상으로 넓게 벌어진 셔츠는 주로 클래식 슈트와 매치한다. 폭이 넓은 클래식 타이가 잘 어울리는 셔츠다.
2 버튼다운 셔츠 칼라의 끝부분을 단추로 잠그는 형태의 셔츠. 주로 캐주얼 셔츠가 버튼다운 형태를 취하지만 요즘엔 정장 버튼다운 셔츠도 많다.
3 차이니스칼라 셔츠 곧게 세운 스탠드업 칼라가 특징으로, 만다린 칼라 셔츠라고도 불린다.
4 윙팁 칼라 셔츠 턱시도용 셔츠에 자주 사용하는 디자인. 칼라 끝이 꺾인 형태로 가장 격식을 갖춘 셔츠다.
5 핀턱 셔츠 앞면에 세로로 주름이 잡힌 셔츠. 핀턱 디자인은 주로 차이니스칼라, 윙팁 칼라 등 포멀한 셔츠에 적용한다.
6 클레릭 셔츠 칼라와 몸통 부분을 다른 컬러나 다른 패턴으로 디자인한 셔츠를 총칭한다.
참고 도서 <셔츠 매뉴얼>
- 화이트 셔츠의 모든 것 1 가장 평범하고, 가장 화려하고, 가장 변화무쌍한 화이트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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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평범하고, 가장 화려하고, 가장 변화무쌍한 화이트 셔츠 가장 기본적 아이템이기에 어떠한 스타일로도 활용할 수 있고, 하나만 갖추어도 요긴하게 입을 수 있는 화이트 셔츠. 스타일링의 기본이자 필수인 이 아이템에는 어떤 특별한 매력이 있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토록 오랜 시간 사랑받는가.#화이트 셔츠 #셔츠 종류 #매니시룩 #버튼다운셔츠 #차이니스 칼라 셔츠글 이재은 기자 | 일러스트레이션 김나리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