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때는 제법 날렵하던 가방이 돌아올 때는 십중팔구 살이 쪄서 온다. 짐은 쉽사리 불어나는 법이다. “설마 그렇게 큰 트렁크를 가져가는 건 아니겠지? 그 옷 다 입을 거야?” 남편은 여행 때마다 짐을 줄이고 ‘노른자위’만 챙기라는 잔소리를 했고, 그 덕분에 ‘여행 패션 일정표’를 작성하는 습관이 생겼다. 이 표는 여행 기간동안 입을 옷을 미리 구상해 요일별 차림을 A4 용지에 그리는 것이다. 여행이든 출장이든 일정에 맞춰 옷을 챙기면 자연스럽게 짐을 줄일 수 있다. 그림을 못 그려서 망설여지나? 그럴 필요 없다. 그저 자신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만 그리면 된다.
처음 시작은 출발 당일 공항에 입고 나갈 옷부터 정한다. 일을 위해서든 휴가를 위해서든 기내에서 몇 시간 동안 뒹굴 옷은 무엇보다 편안해야 한다. 신축성이 좋은 저지 소재 옷이나 레깅스(엉덩이를 덮는 넉넉한 길이의 상의와 입는다), 다리를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는 긴 치마, 통풍성 좋은 원피스 등을 추천한다. 그다음은 현지에서 입을 옷을 선택해야 하는데, 여기에 절대적 수칙이 하나 있으니, 며칠간 입을 옷들이 사이좋게 어울려야 한다는 점이다. 크로스 코디네이션은 여행 짐 꾸리기의 핵심이다. 챙겨간 옷을 서로 어우러지게 입기 위해서는 무지無地의 단순 담백한 옷들을 대표 주자로 뽑는 게 좋다. 상부상조의 장은 고른 옷들을 바닥이나 침대에 펼쳐놓고 하나씩 맞대면서 차림을 완성하는 식으로 해결한다. 일주일 여정을 기준으로 상의는 대략 세 개, 하의는 두 개, 원피스는 하나 정도를 준비하면 될 듯하다. 머리를 잘 써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하나의 옷이 이틀 연이어서 등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하루를 건너서 입되 새로운 차림을 선보이는 기지를 발휘해야 한다. 같은 옷을 새롭게 변신시키는 힘 있는 조력자 는 목걸이, 귀고리, 브로치, 스카프 등으로, 부피 대비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다. 특히 스카프는 두르는 방식에 따라 옷맵시가 달라 보일 뿐 아니라 벨트를 대신할 수 있어 두루두루 활용도가 높다.
여행 옷에서 요긴한 또 하나의 아이템은 바로 원피스! 상의와 하의를 맞추는 부지런함이 지속되다 보면 하루 이틀 정도는 옷을 편하게 입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럴 때 원피스는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도 무던하게 보이도록 하는 재간을 발휘한다. 여행 트렁크에 어김없이 들어가는 효자 품목을 하나 더 밝히자면 카디건을 빼놓을 수 없다. 티셔츠나 블라우스 위에 입으면 겉옷으로, 맨살 위에 입으면 온전한 상의로 소화할 수 있어 실용적인데, 특히 벨트를 카디건 바깥에 두르면 위아래가 명확하게 나뉘면서 긴장감 어린 라인을 연출해 기존 카디건 차림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여행 가방을 꾸릴 때마다 “혹시 모르니 이것도 가져가볼까?”라는 질문을 얼마나 쏟아냈던가. 여행을 앞둔 설렘은 필요 이상의 옷에 손이 가도록 바람을 넣는다. 그러나 여행 착장표를 작성하면 가방도 주인도 여유를 품을 수 있어 ‘홀가분한 짐 싸기’를 할 수 있다. 소식小食이 건강에 이롭듯 여행 가방도 가볍게 꾸리는 것이 여행을 더욱 즐겁게 만들어준다.
글을 쓴 김은정 씨는 <마리끌레르> <엘르>의 패션 디렉터와 <마담휘가로> 편집장을 거쳐, 현재 각종 잡지와 신문에 칼럼을 연재하는 패션 칼럼니스트이자, 감각적 으로 옷 입는 방법을 쓴 <옷 이야기>의 저자이기도 하다. |
일러스트레이션 이명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