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는 <K FOOD: 한식의 비밀>(디자인하우스 발행)에서 발췌 구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옛 한국인의 부엌에서 국물 요리의 필수 도구이던 가마솥. 제대로 끓기 시작하면 뚜껑 안쪽에 수증기가 솥 바깥으로 흐르기 시작하는데, 이를 ‘가마솥의 눈물’이라 불렀다.
국물, 한국의 맛을 해독하는 코드
서양의 요리 코드가 ‘고체-액체’ ‘건식-습식’의 대립 항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한국의 요리 코드는 이 대립의 경계를 없애고 음식의 건더기(고체)와 국물(액체)을 함께 먹는 혼합 체계로 이뤄져 있다.
밥과 국, 건더기와 국물이 함께 뒤섞인 한국식 국물 문화는 ‘음식’이라는 말 자체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음식의 음飮은 마시는 것이고 식食은 씹어 먹는 것으로, 한국의 음식은 반드시 고체식과 유동식을 한데 묶어 생각한다. 마시는 것과 먹는 것이 동일 선상에 놓이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한자 문화권인 일본에서는 음식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음식을 ‘다베모노(食物)’라고 해 마시는 것을 제외한다. 마시는 것과 먹는 것을 다른 층위에 놓는 것이다. 영어의 푸드food에도 음료 개념은 포함되지 않는다. 서구의 고체·액체 요리 코드로 볼 때 우리의 국물 음식은 빵이나 비프스테이크를 수프에 말아 먹는 것과 같다. 다분히 탈코드적인 요리로 보일 것이다.
서양 요리에선 (수프처럼 정식으로 국물 요리를 만들 때를 제외하면) 조리 시 생기는 국물은 음식을 익히는 수단으로, 일종의 노이즈noise로 생각해 철저히 없애버린다. 반면 한식에서 국물은 수단이자 목적이다. 면을 끓이기 위해 부은 물도 버리지 않고 국수와 함께 요리 속으로 끌어들인다. 김치 국물을 활용해 전골도 만들고 찌개도 끓인다. 남들은 불필요하다 생각하는 것, 부수적이고 잉여적인 것을 제거하지 않고 포섭하는 것이다. 노이즈를 허용할 뿐 아니라 그 우연성을 적극적으로 살려 맛의 체계를 변화시키는 것, 이것이 한식에 담긴 또 하나의 지혜다. 그리고 이러한 측면에서 서양 음식 문화를 배제적이라고 한다면, 한국 음식 문화는 포함적이라 정의할 수 있다. _ 중 이어령 선생의 머리글
주식인 밥에 부족한 여러 영양소를 동시에 섭취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국물 음식 된장찌개.
국가 대표 국물 요리
된장찌개와 설렁탕 명실상부한 한국인의 솔 푸드 된장찌개. 하지만 그 등장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800년대 말, 저자 미상의 조리서 <시의전서>에도 골조치, 처녑조치, 생선조치 등의 이름으로 등장하지, 된장조치 혹은 된장찌개란 명칭은 없었다. 된장찌개는 지금 가장 사랑받는 한국 음식이면서, 가장 홀대받은 음식이기도 하다. 먹을 것이 많지 않던 시절, 채소로 끓인 맑은국으로는 단백질을 공급받을 길이 없었다. 그런데 집에 늘 담가두는 ‘콩 단백질 덩어리’ 된장을 수용성비타민의 보고라는 쌀뜨물에 풀어 끓이면 영양가가 풍부한 국이 되었다. 이렇게 훌륭한 발명품이 토장국이다. 이 토장국에서 발전한 것이 된장찌개로, 토장국의 국물을 적게 잡아 끓여낸 것이다.
설렁탕은 언뜻 보기에 간단한 것 같지만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 깊이 있는 음식이다. 소뼈·도가니·쇠고기 등을 큰 솥에 통째로 넣고 보통 한나절 정도, 보다 깊은 맛의 국물을 원할 때는 좀 더 많은 양의 쇠고기와 뼈를 넣어 하루 이상 ‘푹’ 고아야 설렁탕 한 그릇이 나온다. 섬세한 조리 과정 없이도 음식 맛을 제대로 살릴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설렁탕 맛은 아무것도 가 미 안 한 듯한 맛, 즉 단맛·짠맛·신맛·쓴맛·매운맛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 것 같은데 입안에 국물이 들어오는 순간 깊은 맛이 느껴진다. 바로 이것이 설렁탕 맛의 진수이자 수천 년 이어 내려온 민족의 깊은 맛이다. 물론 그 순수한 맛도 말할 수 없이 중요하지만, 높은 영양가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게다가 이 음식은 먹는 방법도 독특하다. 그냥 밥을 말아서 후딱 해치우니 말이다.
경상도 지방의 향토 요리에서 시작했지만, 이제 전국구 속풀이탕으로 사랑받는 재첩국.
쇠 화통이 달린 냄비에 불을 지펴 끓이면서 먹는 신선로. 가장 호화로운 국물 음식 중 하나다.
속 풀고 마음 푸는 해장국
한국의 해장국은 다른 나라와 달리 뜨거운 국물을 전제로 한다. 대표적 해장국으로 알려진 콩나물국밥, 재첩국, 선지해장국 등은 뜨거운 국물로 쓰린 속을 풀어주는 음식이다. 해장국은 뚝배기에 담아야, 뜨거운 김이 올라와야, 새벽 공기를 마시며 먹어야, 잘 익은 깍두기를 곁들여야 제맛이 난다. 이 해장국은 한국 외식 문화의 첫걸음이 된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외식이라는 개념이 따로 없던 고려·조선 시대에는 주로 술을 만들어 병에 담아 파는 병술집이 있었는데, 그곳이 식사 겸 안주가 되는 해장국을 끓여 파는 주막(주점)으로 변화하면서 음식점의 효시가 되었다.
해장국을 끓여 먹기 시작한 옛 한국인은 분명 슬기로웠다. 선짓국 속 우거지는 장운동을 활발하게 하는 섬유소가 풍부하고, 콩나물국밥에 들어가는 콩나물 뿌리 속 아스파라긴산의 알코올 분해 능력은 놀라울 정도다. 게다가 재첩국, 돼지국밥, 올갱잇국에 들어가는 부추는 간 보호 기능이 뛰어난 채소다. 재첩과 다슬기 역시 간 기능에 좋은 재료인데, 특히 재첩은 즙을 내 황달 치료에 쓰는 민간요법이 전해질 정도로 몸을 보호하는 기능이 탁월하다. 북엇국의 주재료인 북어도 아미노산 성분인 메티오닌이 풍부해 주독에 지친 간을 달래는 데 좋다. 북쪽 지방에서 많이 먹는 순댓국은 철분과 칼슘 같은 무기질이 풍부한 데다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도 많은 음식이다. 추운 곳인 만큼 해장국도 열량이 높은 것으로 만들어 먹은 것이다.
신선이 남기고 간 음식, 신선로
신선로神仙爐의 유래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조선 시대 홍선표의 <조선요리학朝鮮料理學>에 나오는 다음 대목을 주목할 만하다. “연산군 시대에 정희량이라는 사람은 (중략) 선인의 생활을 했는데 수화기제水火旣濟의 이치로써 화로를 만들어 이것 하나만 가지고 다니며 거기에다 여러 가지 채소를 한데 익혀 먹었다는 것이다. 훗날 그가 신선이 되어 떠난 후에 세상 사람들이 그 화로를 신선로라 부르게 되었다.” 화로 하나 들고 걸인처럼 다니면서 먹던 음식에서 유래했다는 신선로. 신선이나 거지나 결국 마찬가지 아닌가? 사실 신선로는 온갖 동식물의 귀한 재료가 다 들어간 최고의 음식이자, 음식 사치의 전형을 보여주는 요리다. 그래서 궁중에서는 이 음식을 열구자탕悅口資湯(입을 즐겁게 하는 탕)이라 부르기도 했다.
왼쪽부터 나주 곰탕, 전주 콩나물국밥, 의정부 부대찌개, 부산 돼지국밥.
지역 대표 국·탕·찌개
나주 곰탕
이 음식이 생겨난 유래는 두 가지로 모인다. 하나는 비옥한 나주평야와 영산강·서해 바다를 품고 있어 우시장이 발달했고, 그곳에 모여든 장꾼들, 손님들에게 소머리 고기와 내장 등을 고아 판 것이 시작이라는 설이다. 일제강점기 때 나주에 생긴 군납용 쇠고기 통조림 공장에서 소 부산물이 쏟아져 나오자 이를 끓여 곰탕으로 팔았다는 설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풍요로운 산물과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나주의 음식 문화로 자리 잡은 것만은 사실이다.
전주 콩나물국밥
콩나물국밥은 해장 음식으로 첫손에 꼽힌다. 녹두의 싹을 틔운 숙주는 일본이나 동남아시아 등 여러 나라에서 먹지만, 콩의 싹을 틔운 콩나물을 먹는 나라는 거의 없다. 콩에 거의 없는 비타민 C가 콩나물에는 듬뿍 들어 있다. 전주 콩나물국밥이 유명한 이유는 전주의 물이 좋아 콩나물이 맛있게 잘 자라기 때문이라고.
의정부 부대찌개
한국전쟁 시절 우연히 만들어진 것으로, 2∼3세대로 이어오면서 여전히 사랑받는 국민 찌개. 주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소시지나 햄등을 주재료로 사용한 데에서 붙은 이름이다. 처음에는 한 가게에서 소시지, 햄, 베이컨 등에 채소를 넣고 버터에 볶아 술안주로 내놓았다. 그러다가 끓이면 위생적으로도 좋으니 자투리 소시지나 햄 등에 고추장, 김치, 국물을 넣고 끓였다. 이를 다시 찾는 손님이 많아지면서 인기 메뉴가 됐다고 한다.
부산 돼지국밥
돼지뼈로 우려낸 육수에 돼지고기 편육과 밥을 넣어 먹는 음식이다. 그 유래에는 다양한 설이 있으나, 전쟁 중 피란길을 전전하던 이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돼지 부속물로 끓인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돼지국밥에는 대구식, 밀양식, 부산식이 있으나 대중적 인지도를 얻은 곳은 부산이다. 부산식 돼지국밥은 돼지 사골로 우려내기 때문에 색이 탁하다. _ 중 정혜경 교수의 ‘국물 민족의 국·탕·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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