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수고방이 문을 열던 날, 점심 공양 메뉴는 인연이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국수였다. 이날 정관 스님은 국수 삶는 법부터 담백한 비빔국수를 만드는 비법을 전수해주었다.
두수고방에 마련한 정관 스님의 부엌. 스님이 직접 사찰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음식을 나누어 먹은 뒤 부엌 뒤편의 작은 방에서 스님과 차담회를 한다.
본래 사찰 음식은 불교에서 승려가 수행 하면서 먹는 음식이다. 하지만 사찰 음식에 담긴 의미는 이보다 훨씬 넓고 깊다. 왕실을 통해 불교문화가 전파되면서 오늘날까지 궁중 음식과 함께 전통 식문화의 주축을 이뤄왔으며, 자연과 농부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재료의 본질에 집중한 웰빙 푸드다. 식사를 하기에 앞서 마음을 정갈히 해주니 심신을 치유해주는 약이요, 정신이 깃든 음식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을 갖춘 제대로 된 사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사찰 음식의 대가로 명성이 높은 정관 스님(<행복이 가득한 집> 5월호 ‘정관 스님과 함께한 사찰의 봄’ 기사 참고)이 주지로 있는 전남 백양사 천진암이 그중 하나다. 제철 식재료가 지닌 맛과 질감을 살린 음식은 사찰 요리가 생소한 이도 한 번쯤 맛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다만 온전히 하루 일정을 비워서 다녀와야 하기에 좀처럼 길을 나서지 못하던 와중에 반가운 소식이 날아왔다. 최근 오픈한 앨리웨이 광교에 정관 스님과 제자들이 사찰 음식을 선보이는 ‘두수고방’을 연다는 것이다. 산중의 사찰 음식이 도심 한가운데로 나오다니! 설렘 반 호기심 반으로 두수고방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점심 공양에는 지역 주민 2백여 명이 함께해 어우러지는 시간을 가졌다.
여름을 건강히 나도록 국수에 에너지를 북돋워주는 비트와 삼을 올리고, 황기와 대추를 달여 만든 육수를 자박하게 담았다.
임태희 디자인스튜디오는 제철 음식처럼 매 순간 감동을 주는 공간을 위해 마감재 사용에 공을 들였다.
정관 스님과 두수고방을 이끌어가는 최병재 매니저, 김슬기 선생 그리고 오경순 방장.
점심 공양은 하셨나요?
오프닝을 하루 앞둔 두수고방은 굉장히 분주했다. 하지만 취재진을 발견한 오경순 방장이 첫 인사를 건넨다. “점심 공양은 하셨나요?”. 시간이 시간인 만큼 이미 식사를 한 터라 선뜻 대답하지 못했는데, 부엌에 들어간 오경순 방장이 어느새 열무비빔국수 두 그릇을 가져왔다. 화학조미료와 오신채(파, 마늘, 달래, 부추, 흥거)를 쓰지 않는다기에 심심하지 않을까 했는데 기우였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 그릇을 비웠으니까. 향긋한 표고버섯국과 녹두전, 참외 냉채와 오이간장절임까지 곁들인 반상은 정갈하면서 품위가 느껴졌다. 주전부리로 내온 옥수수를 한 입 베어 물며 두수고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사연인즉 이렇다. 본래 앨리웨이 광교는 즐거운 문화와 경험이 쌓여나가는 골목을 주제로 한 복합 상가로, 라이프스타일 디벨로퍼 회사 네오밸류에서 설계와 운영을 맡았다. 앨리웨이 광교를 통해 새로운 식문화를 부흥시키고 싶은 네오밸류 손지호 대표는 사찰 요리의 가능성을 내다보았고, 그길로 정관 스님을 찾아갔지만 단박에 거절당했다고. 수행을 하기 위해 먹는 사찰이 이유였다. 그런데 무엇이 스님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데 때마침 풍경 소리가 들리더니 정관 스님이 호방한 걸음으로 두수고방에 들어섰다. 그리고 짧은 인사를 나누자마자 분주한 걸음으로 부엌의 살림살이부터 살폈다. “도마는 이걸로는 안 돼, 더 넓고 큼직해야지. 칼도 이것 말고 전에 걸로 가져오시오!”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뒤에야 비로소 스님의 손에 익은 부엌이 갖춰졌다. 한시름 놓은 스님의 얼굴에 예의 미소가 번지자 질문을 했다. “여러 번 고사하셨다고 들었는데, 무엇이 스님의 마음을 바꾸게 했나요?”
“사찰 음식은 수행자의 음식이지만 이십사절기에 맞춘 계절 음식이기도 합니다. 된장과 고추장, 간장, 소금, 조청 등을 최소한만 사용해 제철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지요. 절기를 따라 흐르는 사찰 음식에는 자연과 사람을 잇고 순환시키는 효과가 있어서 요즘처럼 책상 앞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내는 현대인에게 도움이 됩니다. 특히 저장 음식과 발효 음식은 몸에 쌓인 독소를 없애는 데 효과적이에요. 이러한 이유로 사찰 음식에 관심을 갖고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는데,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탤리언이나 프렌치 레스토랑만 선호하지요.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사찰 음식을 널리 알리고 나누고자 두수고방을 열었습니다.” 두수고방은 오경순 방장과 최병재 매니저가 주축이 되고 김슬기 선생이 함께 운영한다. 정관 스님의 철학을 이어받은 젊은 요리사들이 재해석하는 것으로, 스님이 담근 장을 이용해 배운 그대로 조리한다. 메뉴는 절기에 맞춰 바뀌며(운영 시간과 메뉴는 www.instagram.com/doosoogobang 참고), 음료는 수정과와 식혜·미숫가루·과일청 등 식재료를 근간으로 하되 허기를 달랠 수 있는 것으로 준비한다.
스님이 손수 꾸민 그릇장. 고재로 만든 가구와 발우, 놋그릇, 정감 있는 빈티지 접시가 조화를 이룬다.
두수고방 공간은 천진암의 푸근한 분위기를 그대로 옮오면서도 현대적인 멋을 더했다.
발우가 가지런히 정돈된 모습과 반질반질한 세간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두수고방의 채식 반상. 이날은 연잎밥과 된장국, 두부조림, 참외냉채와 오이간장절임으로 구성했고, 주전부리로 자두와 옥수수를 제공했다.
결코 마르지 않는 음식 창고
식재료는 앨리웨이 내 다곳마트의 청년농부연합과 직거래하며, 부족한 채소는 옥상정원의 텃밭에서 직접 재배한다. 텃밭은 클래스 참가자나 앨리웨이의 이웃 셰프들과 나눠 쓸 요량인데, 식재료를 알아야 건강하게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사찰 음식에 대해 깊이 고찰하며 자신을 단련하는 특별한 시간도 경험할 수 있다. 한 달에 두 번, 정관 스님의 사찰 음식 시연회를 진행할 계획이기 때문. 두수고방의 인테리어를 맡은 임태희 대표(임태희디자인스튜디오)는 전반적으로 검박한 공간을 꾸민 가운데 스님의 부엌만큼은 천진암에서 경험한 경건함을 담아 완성했다. 환복을 하는 것도 그의 생각이다. “이곳은 스님이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감상하고 함께 음식을 먹으며 수행하는 공간입니다. 절에서 일주문에 들어서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처럼 이곳에도 특별한 장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한복으로 갈아입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어요.”
이곳에서 수행자들은 스님의 요리 시연을 보고 함께 식사한 뒤 다실로 옮겨 차담회를 이어간다. 이처럼 두수고방에서는 다양한 이와 인연을 맺고, 나누며 온정을 더해간다. 클래스 공간에서는 매주 목요일 오경순 방장이 채식 반상에 대해 수업하며, 이웃 셰프와 협업해 세계의 가정식과 플레이팅에 관한 수업도 진행할 계획이다. 9월과 11월에는 고추장과 김장 담그는 행사가 준비돼 있다. 이때 만든 음식의 일부는 어려운 이웃 주민에게 전달할 예정이다. “두수고방의 의미를 물어보셨지요? 과거 수행자는 탁발한 음식을 한데 모아서 몸이 아픈 이는 물론 그날 탁발을 가지 못한 이와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음식을 모아두는 창고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두수고방이지요. 수행자는 저녁에 금식을 하지만 병자나 식사를 해야만 수행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곳에서 음식을 꺼내어 나누어 줍니다. 우리도 이곳 두수고방을 통해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고자 합니다.” 다음 날, 두수고방이 문을 활짝 열었다. 지역 주민이 함께한 점심 공양에서는 주요리로 국수를 제공했다. 불가에서 국수는 미소의 음식. 새롭게 맺은 인연이 오래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기 때문. 그 마음이 서로 통했을까. 한데 어우러져 국수를 나눠 먹는 이들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정관스님과 함께하는사찰 음식 체험
일시 9월 9일(월) 오전 11시-오후 1시 30분
장소 수원시 앨리웨이 광교 3층 두수고방
참가비 10만 원
인원 16명
신청 <행복> 홈페이지 ‘클래스’ 코너 또는 전화(02-2262-7222)기타 사항 스님의 사정에 따라 수업 일정이 변경될 수 있으며, 이 경우 개별적으로 안내해드립니다.
- 정관 스님의 두수고방 스님이 아파트촌으로 온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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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 식재료로 올바르게 만든 사찰 음식은 허기를 달래고 미식의 기쁨을 느끼게 하며, 정신을 맑고 건강하게 해준다. 바쁜 일상에서 ‘나’를 잊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자연이 내준 건강한 밥상은 다정한 위로가 되지 않을까. 깊은 산중에서만 만날 수 있던 정관 스님의 사찰 음식이 도심으로 한 걸음 다가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