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은 참으로 간사하다. 평범한 음식이 주는 익숙함에 길들여 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쉽게 싫증을 낸다. 미식을 탐하는 것이 당최 종잡을 수 없는 입맛의 본성이라 하면, 맛 역시 알다가도 모를 존재다. 서로 떼어놓아야 각각의 맛을 찾는 것도 있고, 의외의 재료가 만나 새로운 맛을 내기도 한다. 요즘 세계 곳곳의 레스토랑에서 떠오르는 주스 페어링 역시 이것저것 섞고 곁들여서 기대 이상의 맛을 내며 또 하나의 미식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선두 주자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미슐랭 별 두 개를 받으며, 최근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요리사로서 집념과 열정을 보여준 레네 레제피Rene Redzepi의 ‘노마’다.
오이 주스와 토마토 토스트
새콤한 토마토 잼을 바른 토스트는 단맛이 도는 오이 주스와 잘 어우러진다.
1 껍질을 깨끗하게 벗긴 오이(2개)를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면포에 거른다.
2 ①의 오이즙과 설탕을 2:1 비율로 섞은 후 기호에 따라 소금을 약간 넣는다.
다양한 선택과 경험을 위한 배려
“술을 전혀 마시지 않거나 임산부와 노인 그리고 어린아이까지 다양한 고객을 위해 10년 전부터 주스 페어링을 시도했습니다. 주스 페어링은 셰프와 주방 입장에서 맛을 새롭게 표현할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지요. R&D를 담당하는 주방에서 레네 셰프와 함께 다양한 주스를 개발합니다. 제철 식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고, 각 식재료가 지닌 본연의 맛에 집중하지요.” 노마의 팀 리더인 캐서린 본트의 말이다. 건강을 생각한 저도주와 무알코올이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런던의 클로브 클럽Clove Club, 뉴욕의 일레븐 매디슨 파크도 주스 페어링을 메뉴로 내놓았다. 미슐랭 별 두 개를 받은 뉴욕의 모모푸쿠를 운영하는 데이비드 장 셰프는 2011년 시드니에 모모푸쿠 세이보를 오픈하면서 가장 먼저 주스 페어링 문화를 이끌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레스토랑에서는 논 알코올 메뉴로 탄산음료나 오렌지 주스처럼 지극히 평범한 주스가 전부였습니다. 지금은 훨씬 다양해졌고, 와인처럼 주스 리스트를 만들어 식사할 때 술 대신 즐길 수 있어요.” 모모푸쿠 세이보의 소믈리에인 앰브로즈 치앙의 말에 따르면 주스라 일컬으며 떠오르고 있는 논 알코올 음료는 이국적인 아로마, 복합적 맛의 구조 등 다채로운 형태를 띠며 음식의 맛을 보충한다.
경계가 없는 맛의 조합
“모든 페어링 음료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느끼는 맛의 구조, 미각의 반응에 기초해서 만듭니다. 접시 속에 숨어 있는 맛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하고, 입맛을 돋우거나 메인 접시와 대비되는 맛을 내기도 하지요. 그러나 반드시 메인 접시의 맛을 보충한다는 기본 역할에 충실해야 해요.” 앰브로즈 치앙은 훈제한 오리구이에 호박과 만다린을 섞어 만든 주스를 곁들인 페어링 메뉴를 그 예로 들었다. 달콤한 주스 맛이 오리구이의 부드러운 육질과 구운 양배추, 호박 소스와도 조화롭게 어우러져 호평을 받았다. 현재 모모푸쿠 세이보에서는 일곱 가지 논 알코올 음료를 선보이고 있는데, 흥미로운 메뉴로 진저비어를 발효시켜 만든 거너gunner를 꼽았다. “거너의 경우 먼저 생강을 약한 불에서 구워 캐러멜라이즈드한 후 아페롤perol(이탈리아 리큐어로, 쌉싸래한 맛과 달콤한 오렌지 향이 난다)과 캄파리Campari(붉은색을 띠며 쓴맛이 강한 이탈리아 리큐어)로 디글레이즈합니다. 이때 알코올 성분이 날아간 뒤 진저에일을 넣어 2주 동안 보관해요. 그 후 생강을 건져내고 즙을 내어 발효시켜 탄산수를 섞어 손님에게 내지요.” 노마 역시 신선한 과일과 채소로 즙을 낸 주스부터 콤부차 같은 발효차, 차갑게 여과해서 내린 주스 등 형태가 다양하다. 요리에 후춧가루나 소금, 허브를 뿌려 시즈닝하는 것처럼 주스에 감초 가루나 아로마가 강한 허브차를 첨가해 맛을 낸다. 대표 메뉴는
양배추 주스. 양배추를 끓인 뒤 다시맛과에 속하는 해초 켈프를 넣어 한 번 더 끓인 다음 구스 베리 주스와 파슬리, 러비지를 넣어 시큼하면서도 독특하다. 소나 송아지의 정강이뼈로 만드는 서양식 요리인 본매로와 궁합이 좋다.
서울에서 만나는 주스 페어링
주스 페어링이 생소한 국내에서 첫 주자는 류니끄의 류태환 셰프. “정해진 공식은 없어요. 영양학적으로 따지기보다 는 많이 먹어보고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맛의 궁합을 찾아야 해요. 류니끄의 경우 음식과 어울리는 차 지도를 만들었어요. 보성의 녹차, 제주의 영귤차 등 지역마다 어떤 차가 유명한지 찾아내 페어링 메뉴를 짤 때 적극적으로 반영해 요.” 류태환 셰프가 추천하는 페어링은 항정살구이와 우엉 주스다. 그릴에 구워 숯불 향이 강하게 나는 항정살이 우엉의 쌉싸름한 맛과 잘 어울리는 것. 단맛이 강한 소스를 곁들이고 싶다면 맛이 비슷한 꿀차와 곁들여도 좋다. 미러의 심주석 셰프도 북유럽에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주스 페어링을 제안한다. 레스토랑을 오픈한 후 지금까지 애피타이저와 함께 내는 것이 바로 진저에일이다. 흔히 바삭한 스낵을 애피타이저로 낼 때 샴페인을 곁들이는 것처럼 이곳은 흑미로 만든 칩을 진저에일과 함께 낸다. 진저에일의 상큼한 탄산요소가 흑미 칩의 고소하면서도 짭조름한 맛을 풍성하게 끌어올려주는 역할을 한다. “진저에일은 도미나 광어 같은 흰 살 생선과도 궁합이 좋아요. 예를 들어 생선 요리는 뼈를 우려내 만든 끈적한 소스를 곁들이는 경우가 많은데, 진저에일이 생선 비린내를 잡아주고 입안의 끈적한 소스를 말끔히 헹궈줍니다.” 가니시로 곁들일 만한 채소나 과일을 주스로 만들면 주스 페어링이 어렵지 않다. “쇠고기나 오리 스테이크의 경우 부족한 탄수화물을 보충하기 위해 비트를 가니시로 많이 내곤 해요. 이를 응용해 와인 대신 비트 주스를 곁들이거나 돼지고기에는 생강 향을 더한 당근 주스를 곁들여도 좋아요.”
셰프에게 배우는 주스 레시피
진저에일과 흑미 칩
흑미 칩이 지닌 고소한 맛과 바삭한 식감이 진저에일과 만나 맛의 농도가 한층 짙어진다. 톡 쏘는 듯한 청량감이 메인 식사를 시작하기 전 입맛을 돋워준다.
1 유리병에 생강(1톨)을 반으로 잘라 레몬(1/2개), 꿀(1약간)과 함께 넣고 약 15일간 재운다.
2 탄산수(140ml)에 ①의 절인 생강청(60g)을 넣고 잘 섞은 뒤 체에 거른다. 라벤더 오일(약간)을 더한다.
우엉차와 항정살구이
그릴에 구워 숯불 향이 밴 항정살구이는 우엉차의 쌉싸름한 맛과 잘 어우러진다. 부드러운 육즙이 숯불 향을 확장시킨다.
1 물(1L)에 말린 우엉(12g)을 넣고 1시간 정도 우린다.
오리구이와 비트 주스
마멀레이드 잼을 곁들인 오리와 달큼한 비트 주스는 맛의 구조가 비슷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1 비트(1개)는 180℃로 예열한 오븐에서 20분간 익힌 후 믹서에 넣어 곱게 간다.
2 ①에 오렌지즙(1개분), 매실청(약간), 레몬즙(약간)을 넣는다.
요리와 도움말 류태환(류니끄・노멀바이류니끄), 심주석(미러), 캐서린 본트Katherine Bont(노마Noma), 앰브로즈 치앙Ambrose Chiang(모모푸쿠 세이보Momofuku Seibo) 소품 협조 한국로얄코펜하겐(02-749-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