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약초밥상. 남자 밥상과 여자 밥상의 돌솥밥은 다르다. 붉은 기운이 도는 밥은 여성의 혈을 잘 다스려 몸을 따뜻하게 데우는 약초로 지은 것. 이와 함께 일고여덟 가지 찬을 낸다. 두 가지 약초 돌솥밥과 함께 곁들인 찬은 양하장아찌, 마튀김, 연근, 둥굴레나물. 특히 둥굴레는 권인옥 대표가 좋아하는 재료 중 하나로, 흔히 차로 먹는 둥굴레를 끓는 물에 데쳐 무친 것.
대보명가에는 독특한 콘텐츠가 있는데, 바로 ‘약초’다. 권인옥 대표는 약초가 한약재로만 쓰는 게 아니라 우리 밥상에 올려도 맛있게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사계절 내내 우리 산야에서 나는 약용 식물은 그야말로 수백 가지다. 그의 고향인 충청북도 제천은 그 스스로 ‘강원남도’라고 표현할 정도로 평창이나 영월 같은 강원도 도시와 인접해 있으면서 해발고도가 높은 산이 많아 수많은 약초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개도 약재를 물고 다닌다”라고 농담 삼아 표현할 정도다. 8년 전 제천에서 식당을 처음 시작할 때 흔한 한식당이나 고깃집 대신 약초 음식을 생각해낸 건 그런 연유에서였다. ‘약초 밥상’이라는 콘셉트 자체는 당시만 해도 신선했지만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는 한정적이었다. 가지나 오이, 호박만으로 이 밥상을 차려낼 순 없었다. 그래서 직접 심고 찾기 시작했다. 식당 앞 텃밭을 만들어 재배하는 것은 물론, 전국 곳곳의 약초 농가를 돌아다니며 재래시장에서도 보기 힘든 야생 약초를 구하러 다녔고, 그렇게 스스로 연구하고 조리해보며 만든 밥상은 테이블 열 개짜리 식당이 연일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엔 이곳 수유동에도 지점을 열었다.
1 약초차를 마시는 권인옥 대표. 식당 위층의 찻집에서는 당귀 꽃봉오리나 해당화, 오미자 등의 약초를 우린 대보발효차와 철관음, 보이차 등을 다채롭게 맛볼 수 있다.
2 가을 약초인 산에서 캔 더덕은 줄기와 잎도 길고 큼직하다.
자연 밥상의 비결
“남도 음식의 대가인 친구가 처음에 이곳 밥상을 보고 ‘별거 없네’ 하더니 먹어보고 나서야 특별한 걸 알겠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바로 재료의 차이예요.” 권인옥 대표는 현란한 기교를 부리는 요리사는 아니지만, 식재료를 구해 본질을 정확히 알고 이해하는 데 탁월한 식견이 있다. 화학비료를 일절 사용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날것’은 거칠고 뻣뻣하기 마련이며, 빨리 자라지도 않는다. 가장 어리고 좋은 순간을 포착하기도 쉽지 않아 그 시기를 민감하게 살펴야 한다. 도시에 사는 사람이 시골 과수원의 사과나무를 보며 기대하는 낭만의 이면엔 오뉴월 땡볕과 비바람을 이겨내고 수확을 기다리는 농부의 간절함과 정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가 관계 맺고 교감하는 생산자도 이런 섬세하면서 고단한 과정을 잘 견뎌내며 약초를 키우는 이들이다. 그중 평창에서 곰취를 재배하는 할아버지는 유난히 남 다르다. “야산 5천 평에서 곰취를 키워요. 할아버지 혼자 관리하기 힘들어서 어떤 땐 그냥 내버려두기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수확량이 들쭉날쭉하고요. 비가 오면 수확량이 많아졌다가 땡볕의 날씨엔 얼룩덜룩 타기도 하고…. 거칠고 뻑뻑해서 시장 상인들에겐 인기가 없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오히려 자연 그대로의 햇볕과 바람과 물을 흡수한 곰취라 더 생생하거든요.
1 제천약초쟁반. 능이, 표고, 송이, 목이버섯 등 다양한 버섯과 곤드레나물, 대추, 잣 등은 음양오행을 고려해 오색으로 담아 색감과 맛의 조화를 살렸다. 약초를 우린 육수에 담가 먹는다. 처음엔 약초 향이 약간 낯설지만 은은한 풍미가 먹을수록 입맛을 당긴다. 수육을 곁들여도 좋다.
2 붉은 열매는 소화 기능을 촉진하는 산사.
환경이 좋지 않을 땐 좋지 않은 대로 그에 적응하는 질긴 생명력을 지니게 되죠.” 물론 일장일단이 있다. 무엇보다 손질하기가 쉽지 않다. 시간을 들여 손이 많이 가야 하니 인건비도 훨씬 많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수지 타산을 계산하기 이전에 재료의 특징을 살리는 데 더 집중한다. 생으로 먹는 쌈 재료로는 적합하지 않지만, 뻣뻣한 성질을 이용해 식감 좋은 장아찌를 만들고 좀 더 부드럽게 삶아서 나물을 무친다.
그는 “재료를 다스린다”라고 표현한다. 오가피나 여주같이 몸에 좋은 수많은 효능을 지니고 있는데도 씁쓸해서 쉽게 접하지 못하는 약초도 다스리면 맛있어진다. 여주는 소금물에 담갔다가 새콤한 피클로 만들고, 향이 강한 곰취도 소금물에 이틀 정도 담갔다가 단맛을 가미한다. 본래 어떤 성질을 지니고 있는지에 따라 편안하게 먹을 수 있도록 맛과 향을 중화하는 것이다. 그저 대충 어림짐작으로 만드는 건 아니다. 실제로 대보명가 음식에는 정확한 계량 수치를 근거로 한 레시피가 있다. “어떤 손님은 우리 음식이 싱겁다고 하지만, 모두 재료의 고유한 특성을 잘 살려 입맛뿐 아니라 건강을 고려해 만들어요. 짜지 않도록 염도계를 써서 계량화한 레시피대로 정확하게 조리하죠. 따라서 저 아닌 다른 직원도 한결같은 맛을 낼 수 있어요.
손맛이 중요하다고요? 진정한 손맛은 과학이라 생각해요. 오랫동안 손으로 다뤄 익힌 감각은 곧 저울과 같죠. 나물을 어느 부분부터 데치는 것이 좋은지, 소금 한 꼬집이 어느 정도 양인지 정확해요. 그래야 좋은 맛을 낼 수 있죠.”
3 셀러리 김치와 두메부추김치. 야생으로 자란 것이라 크고 두툼하며 특유의 향긋함을 지녔다. 특히 두메부추는 잎사귀 사이로 보랏빛 꽃을 피워 야생화 같은 느낌을 준다.
4 대보명가에 한쪽에 자리한 각종 약초와 곡물들.
천천히 다스려야 제맛이 난다
권 대표의 음식은 길고 복잡한가 싶으면서도 쉽고 단순하다. 전국 산지에서 오랜 시간 동안 키운 각종 약초를 어렵게 찾아 매번 2톤이 넘는 양을 구입한 후 서울과 제천 합쳐 50명이나 되는 직원이 적지 않은 시간과 공을 들여 손질해낸다. 그런데 그렇게 긴 시간을 걸려 준비한 재료는 정작 간단한 조리법으로 만들어진다. 3년간 장독 안 고추장에 묵혀 곰삭은 듯 깊고 진한 맛을 내는 더덕장아찌처럼 오랫동안 기다려 먹는 우리네 옛 찬거리와는 조금 다르다. 그는 때로 전통 방식이 재료 본연의 맛을 반감시킨다고 말한다. 오히려 흙과 햇볕을 머금은 자연 그대로의 맛을 살리기 위해 재료를 툭툭 썰어 고추나 마늘, 식초와 소금을 넣고 빠르게 만드는 게 요즘 입맛에도 잘 맞는 슬로푸드라고 생각한다. “현대인은 맛있는 건 물론 몸에 좋은 음식을 찾아요. 그런 점에서 약초 밥상은 슬로푸드 문화에 딱 들어 맞지요. 몸에도 좋은 음식을 위해 공장이 아닌 땅에서 온전히 사계절을 지내면서 자란 야생 재료만으로 만들거든요.”
수유동 대보명가의 식당 위층, 찻집에서는 창문 너머로 북한산과 도봉산의 오봉 능선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이 명당에 앉아 약초차를 마시면 향기가 천천히 흘러 마음까지 이완되는 것 같다. ‘제천약초쟁반’과 ‘제천약초밥상’ ‘제천약초떡갈비’가 전부인 단출한 메뉴 중 솥밥에 약초로 만든 찬을 푸짐하게 곁들인 제천약초밥상과 제천약초쟁반을 주문했다. 감탄사가 쏟아져 나오는 화려한 모양새나 맛은 아니지만, 배가 부르도록 숟가락을 놓지 않아도 속이 편안하다. 권 대표가 “비효율적 음식”이라고 표현한 이 밥상은 재료 하나하나가 길고 고단한 과정을 거쳤을 게 틀림없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최고의 약초를 키워낸 자연의 힘과 그 자연을 일군 농부의 시간과 정성 그리고 이 모두를 견뎌낸 극성스러운 기다림 덕분에 우리가 ‘맛있는 약’을 먹을 수 있으니 참 다행스럽다고.
푸드 스타일링 박혜진
- 약초 음식점 대보명가 원인옥 대표 자연을 다스린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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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들에서 재배한 야생 약초로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 충북 제천과 서울 수유동에서 약초 음식점을 운영하는 권인옥 대표다. 그가 생각하는 슬로푸드란 음식을 조리하기에 앞서 자연에서 얻은 재료를 천천히 다스리는 정성과 노력에서 시작한다.#야생약초 #슬로푸드 #권인옥 #자연밥상 #대보명가글 이정주 |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