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아말테아 치즈 농장의 주인장 알레산드로Alessandro 씨는 매일 방목지에서 양치기 개와 함께 목장으로 랑게 산양을 데리고 온다.
오른쪽 전통 방식의 치즈 숙성실을 안내하는 안주인 아리아나Arianna 씨가 어제 만든 싱싱한 치즈부터 3개월 이상 된 치즈를 소개하고 있다.
음식은 지식이다.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에서 보듯이 인류는 하루를 온통 음식과 관련한 각종 기억과 이벤트, 노동으로 살아간다. 선조의 지식에 새로운 기록을 업데이트하면서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렇기에 인류의 음식 전통은 현재이면서 미래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산업화를 거치면서 인류는 더 이상 음식 도서관이 필요 없게 되었다. 그간의 음식 전통에 새 기록을 덧붙이지 않아도 사는 데 전 혀 불편하지 않게 된 것. 이제는 산업이 주는 음식 안에서 즐기면 되고 오직 쇼핑 전단지와 메뉴판을 읽을 줄만 알면 생존이 가능하다. 새로운 지식은 ‘먹방’이면 충분하다. 어떤 사회학자는 이런 인류를 ‘음식 문맹자’라 일컫는다. 빠르고 높은 생산성만 추구하는 현재의 글로벌 푸드 시스템은 단조롭고 자극적인 음식을 전 세계로 확산하며 ‘경쟁력에 뒤지는’ 지역의 전통 음식을 무너뜨리고 있다. 소규모 가족농과 장인 생산자들은 대를 잇지 못하고, 다양한 생물종과 토종 자원은 사라져가며, 환경과 지역 경제는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 이러한 때 슬로푸드 운동은 더 이상 세계화에 휩쓸려 지역 음식이 사라지지 않도록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 생명 농업과 느린 삶을 강조하며 1백60개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아말테아 슬로 치즈 농장
치즈는 인류의 오래된 발효 음식이다.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민이 동물의 위로 만든 주머니에 담긴 우유가 변한 것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만들기 시작했다는 치즈. 기원전 2000년경 이집트 무덤 벽화와 기원전 1000년경 <성경> 속에도 치즈 이야기가 등장할 정도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치즈는 젖소, 물소, 양, 산양 등 동물 종류에 따라 맛이 다르다. 계절이나 발효균이 달라도 다른 맛이 난다. 동물이 자라는 토양의 질과 풀에 따라서, 생산자마다 만드는 제조 노하우에 따라서 모두 다른 맛이 난다.
치즈의 다양성은 19세기 중반에 목축과 제조 모두 전통 방식이 아닌 공장식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연에서 풀을 뜯던 젖소는 축사에 갇혀서 패스트푸드 사료를 먹으며 우유를 생산하게 되었고, 공장으로 옮겨진 우유는 살균 처리해 표준화된 맛의 치즈 상품이 되었다. 공장식 생산품은 여러 농장에서 모인 동물 젖을 섞어서 가공하니 품종적 다양성은 대량생산과 표준화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젖이 많이 나오고 꾸준히 나오는 품종이 1등이 되어 권장ㆍ보급되면서 서서히 지역 고유의 동물종이 사라져갔고, 이제는 응고 방식, 수분 함량, 발효균 종류에 따라 치즈를 구분할 뿐이다. 동물종과 자연은 사라지고 인간의 기술만 남았다. 자연에 대한 지식 없이 기계 조작만으로도 치즈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치즈 각각의 독특한 맛이 사라지고 첨가물이나 모양으로 특징을 만든다.
2~4개월 숙성 기간에 따라 맛이 다른 소젖과 산양 젖 치즈. 아말티에 농장의 치즈는 태어날 때부터 호르몬제를 투여하지 않은 소와 산양의 생유로만 매일 아침 손수 만든다.
발사믹 식초 농가의 벽에 전시한 옛 식초 만드는 도구.
우리가 방문한 ‘아말테아Amaltea 슬로 치즈 농장’은 토종 산양 품종의 젖으로 치즈를 생산하는 곳이다. 농장이 위치한 피에 몬테 주는 이탈리아에서 와인과 치즈 생산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높은 지역이다. 피에몬테 주 브라Bra 시는 작은 도시지만 슬로푸드 국제본부가 자리하고, 2년마다 ‘슬로 치즈’ 박람회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생태적 미식에 대한 흐름을 주도하는 ‘미식과학대학교’도 피에몬테 주에 자리 잡고 있다. 유명한 와인 바롤로Barolo와 바르바레스코Barbaresco의 산지이면서 피에몬테 주민들이 자랑하는 파소네Fassone라 불리는 토종 품종의 소가 있는 곳. 이처럼 다양성을 즐기는 식문화가 몸에 밴 피에몬테에 ‘아말테아 농장’을 비롯 주변 몇 곳의 농장이 ‘산양 치즈 생산 공동체’를 이루어 전통 방식으로 천천히 느리게 치즈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아말테아 농장의 산양은 생김새가 특이해서 옆에서 보면 꼭 배우 앤서니 퀸이 연상된다. 귀여우면서도 약간 매부리코에 코믹한 느낌이 드는 산양은 ‘랑게’란 토종 품종이다. 랑게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마을에서 점차 사라져갔는데 이탈리아 슬로푸드협회와 함께 소멸 위기에 처한 토종 자원 보호 운동을 하면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아말테아 농장은 앳된 얼굴의 젊은 부부가 운영한다. 토종 치즈의 맛을 지키기 위해서 산골의 초지를 알뜰하게 돌려가면서 순환 농법으로 사료를 키우고, 전통 방식대로 생유(raw milk)를 사용해 치즈를 만든다. 랑게종이 생산하는 생유는 다른 종의 양유보다 훨씬 진해서 많은 영양분이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젊은 부부의 멋진 집에서 숙성 정도에 따라 맛이 다른 소와 산양 치즈 다섯 가지를 맛볼 수 있었다. 이제 몇 마리 남지 않은 산양 젖으로 만드는 치즈의 맛을 특별히 기억하기 위해 감각기관을 모두 깨우는 순간이었다. 신선한 치즈부터 2개월, 4개월까지 숙성 기간에 따라 향과 맛, 입안에서 녹는 정도가 각기 달라 작은 한 접시에서 다양한 맛을 보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진정 아끼고 지키려면 잘 먹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기간이 오래된 치즈일수록 바람과 시간이 만든 향이 더 깊게 밴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저 쿰쿰한 냄새처럼 느껴지는 것이 안타깝다.
아말테아 농장의 젊은 부부는 양과 소, 그리고 이들을 지키는 양치기 개와 함께 농장을 운영할 뿐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치즈 만들기 체험 교실을 진행하는가 하면 소비자 시식회를 통해 전통 방식으로 만든 치즈의 맛을 알리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잊혀가는 맛을 지키고 전통 식재료와 먹을거리를 선보이는 농가가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이 더욱 커진다.
1815년부터 이어져온 발사믹 식초 농가의 작업장.
팔트리니에리 농장의 IGP 발사믹 식초는 100% 포도즙을 나무통에 숙성시켜서 탄생한다.
팔트리니에리 발사믹 식초 관광 농원
다음 날 모데나Modena에 있는 팔트리니에리Paltrinieri 발사믹 식초 농장에 갔다. 포도 농장과 발사믹 식초 제조장, 농가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곳이다. 요즘 한국에서 추진 중인 1차 산업인 농업에 2차 산업인 식품가공업과 3차 산업인 서비스업을 연계하는 농촌 ‘6차 산업화 정책’의 본보기 같은 관광 농원이다.
발사믹 식초는 모데나 지역에서 생산하는 포도 식초를 부르는 특별한 이름이다. 마치 프랑스의 샹파뉴Champagne 지역 포도를 사용해 전통 양조 방식으로 생산한 스파클링 와인만 ‘샴페인’이라 부르듯이. 발사믹 식초는 수확한 포도즙을 끓인 뒤 수년에서 수십 년간 발효 과정을 거친다. 바테리에batterie라는 둥근 나무통에 넣어 2년 간격으로 떡갈나무, 밤나무, 벚나무, 물푸레나무, 뽕나무, 향나무 통으로 바꿔가며 12년 이상 숙성한다. 모데나 사람에게 다락방은 우리의 장독대와 같다.
75L의 큰 통부터 10L짜리 작은 통까지 줄지어 발사믹 식초를 보관하고 있다. 통 속의 식초는 해마다 12%씩 자연 증발하므로 첫해에 큰 통에 담은 식초는 해가 갈수록 작은 통으로 옮겨가며 계속 농축된다. 숙성 과정에서 목재 종류에 따라 바닐라향, 신맛, 단맛 등 서로 다른 맛과 향을 뿜어내 발사믹 식초의 풍미를 깊게 만든다. 12년산, 25년산, 50년산으로 해가 묵을수록 가격이 올라가니 시간의 음식이라 부를 만하다.
숙성실은 전통적으로 항상 처마 밑에 위치한다. 바테리에가 놓인 모습은 장독대를 연상시킨다.
12년 이상 숙성된 식초에는 ‘Aceto Balsamico Tradizionale di Modena’라는 특별한 라벨을 붙일 수가 있으며, 특별 디자인한 병에 담을 수 있다. ‘전통(tradizionale)’이라는 단어는 오직 모데나 지역의 특정 품종 포도로 12년 이상 숙성시켜야 표기할 수 있다. 병은 현대자동차 포니를 디자인한 조르제토 주자로가 디자인했다. 12년이 안 된 식초는 이 병에 담을 수도 없고 ‘전통 식초’라고 표기할 수도 없다.
발사믹 식초가 소비자에게 특별하게 대접받는 원인은 모데나 농민들 스스로 엄격한 품질 기준을 만들어서 인증 제도를 운영하기 때문이다. 12년산을 인증하는 과정은 매우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다. 여기에 고품질을 향한 생산 공동체의 노력이 소비자로 하여금 인증 시스템을 믿고 따르게 만들었다.
발사믹 식초가 유명해진 결정적 원인은 지역 주민들의 지역 소비 의식이다. 지역 음식을 사랑하고 즐기는 소비자가 있었기에 발사믹 식초가 세계적 식품으로 성장했다. 견학을 마치고 농가 레스토랑에 갔더니 발사믹 식초 외에도 람브루스코Lambrusco 와인과 파르미지아노 치즈가 나왔다. 모두 모데나가 자랑하는 음식이다. 모데나가 고향인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고향의 치즈를 늘 갖고 공연을 다녔다고 한다. 서민부터 유명인까지 자기 지역의 음식을 사랑하고 소비하는 의식이 뒷받침될 때 슬로푸드 식문화가 발전한다.
사진 제공 디자인하우스 디자인융합연구소
- 이탈리아 슬로 치즈&발사믹 식초 농가 느리게 그리고 천천히 가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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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밀라노 엑스포’의 주제관이라 할 UN관은 거대한 도서관으로 시작한다. 이는 세계 곳곳의 음식 기억과 체험, 기록이야말로 인류의 생존과 문명을 있게 한 음식 자체라는 점을 말해준다. 세계화와 산업화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지역 고유의 전통 지식과 기술, 문화와 음식 등이 사라져가는 요즘, 진정한 슬로 라이프를 실천하는 이탈리아의 아말테아 치즈 농장과 팔트리니에리 발사믹 식초 농장을 다녀왔다.#밀라노엑스포 #슬로라이프 #치즈농장 #발사믹식초농장 #슬로치즈글 김원일(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 사무총장)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