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대에서 바라본 나리분지. 예전에 이곳에 샛노란 나리꽃이 지천이어서 나리분지라 불렀다.
울릉도는 진짜 섬이다
대한민국 랭킹 10위 안에 드는 섬 중 제주도와 울릉도를 제외한 나머지 섬은 모두 연륙교로 연결되어 있어 이미 육지의 일부나 다름없다. 그러나 울릉도는 배를 세 시간이나 타고 들어가는 진짜 섬. 그러다 보니 파도가 치는 날이면 배가 묶이기 일쑤라 출발 당일까지 마음을 졸이게 된다. 이런 교통과 지리적 환경 덕분에 울릉도는 그 신비를 여전히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자연이 보존되고 울릉도의 자원과 토종 먹거리가 남아 있는 것. 하지만 거센 세계화 물결 속에 고유한 식재료와 문화는 언제까지 이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 지난 2013년 최수일 울릉군수는 울릉도의 생물자원을 관광산업으로 연계해 보존하는 ‘슬로푸드 기본 계획’을 수립했고, 덕분에 나는 지난 3년간 울릉도의 슬로푸드를 찾아서 ‘맛의 방주’에 기록하는 일과 ‘맛지킴이두레’를 조직하는 일에 참여했다. ‘맛의 방주(Ark of Taste)’에는 현재 전세계에서 2천6백30개의 품목이 기록되어 있으며 섬말나리, 칡소, 옥수수엿청주, 손꽁치, 울릉 홍감자 등 울릉군만 유일하게 다섯 개가 올라갔다. 울릉 홍감자는 앞 페이지에서 다루었으니 여기서는 네 가지 먹거리를 소개한다.
아래부터 시계 방향으로 두메부추, 참고비, 삼나물. ‘눈개승마’라고도 부르는 삼나물은 쫄깃한 식감이 고기 맛이 난다.
백합의 조상 ‘섬말나리’
울릉도 개척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883년 고종의 명에 따라 열여섯 가족 54명이 울릉도에 들어간 것이 시작이니 올해로 1백33년째다. 울릉도는 그야말로 봉우리 하나가 섬인 곳이라 평지를 찾기 힘들다. 그나마 유일한 평지인 나리분지에 사람들이 모였고 마을이 형성되었다. 나리분지란 지명은 이곳에 끝도 없이 펼쳐진 나리꽃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개척 초기 주민은 어떻게 알았는지 용케 섬말나리의 뿌리를 캐서 주린 배를 달랬다. 다른 나리와 달리 섬말나리 뿌리를 찌면 팍신팍신한 전분이 나오는데 맛이 달달해 먹거리로도 손색이 없다. 그래서 울릉도 주민은 섬말나리를 ‘참나리’라 부르고, 뿌리를 먹지 못하는 나머지 나리류를 ‘개나리’라고 부른다.
섬말나리 뿌리. 수십 개의 비늘 조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많던 울릉도 섬말나리가 지금은 성인봉 근처에 올라가야 볼 수 있다. 생산량이 많은 다른 먹거리에 밀려 단지 희귀한 꽃이 되면서 남획ㆍ반출되었고, 농경지를 개간하면서 설 자리를 잃은 것. 내가 섬말나리의 맛을 본 것은 2013년 여름 산마을 식당의 한귀숙 대표가 범벅을 만들어주셨을 때다. 어릴 때는 알뿌리가 작고 아린 맛이 강해 먹지 못하고 5년 이상 자란 것을 쪄야 한다. 현재 울릉군농업기술센터에서 조직 배양에 성공해 종자 보급에 나섰으니 앞으로 2~3년 후부터 울릉도에서 섬말나리범벅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얼룩무늬가 호랑이를 닮았다 해서 ‘범소’, ‘호랑무늬소’라 불리는 칡소.
대한민국 한우 ‘칡소’
칡소는 고구려시대 벽화에 나오는 우리 고유의 한우 품종이다. 한반도에 여러 품종의 한우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남은 품종은 황우와 칡소, 제주흑우, 흑우 총 네 종. 이 가운데 황우를 제외하고 모두 소멸 위기에 처해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오늘날까지 정책적으로 황우만 육성했기 때문이다. 최근 활발한 복원 사업으로 전국에 자라고 있는 칡소는 1천5백 마리. 이 가운데 4백여 마리가 울릉도에 있다. 울릉도에서는 2006년부터 칡소를 지역 특화 품목으로 육성했고, 이런 노력이 울릉도를 칡소의 원산지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칡소는 황우보다 가격이 30〜50% 비싸지만, 고기 맛은 뛰어나다. 보통 칡소 같은 흑모黑毛 계열의 소는 불포화지방산 함량이 다른 소에 비해 높기 때문에 녹는점이 낮아 입에서 잘 녹고 풍미가 고소하다. 여기에 더해 울릉도 칡소는 품종 차이뿐 아니라 사육 환경에서 나오는 독특한 맛이 있다.울릉도 소는 예전부터 ‘약소’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울릉도에 흔한 독활, 부지깽이 같은 약초를 먹고 자랐다는 뜻이다. 일부러 약초를 먹인 것이 아니라 육지에서 사료를 수입하는 것보다 주변에 흔한 풀을 베어 쇠꼴로 쓰는 게 수월했기 때문이다.
어떤 소라도 건강한 먹이를 먹으면 그 맛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울릉도 칡소의 가치는 바로 울릉도 자연에서 나오는 맛이다. 그래서 우리는 울릉 칡소의 맛을 대대로 물려주기 위해 울릉도의 자연을 지키는 것이다.
울릉도 토종 옥수수. 할머니들은 아직도 알이 꽉 찬 옥수수를 남겼다가 종자로 쓴다.
울릉도의 맛 ‘옥수수엿청주’
‘울릉도 아리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옥수수 엿청주淸酒에 흑黑염소 고기 꾸어놓고 혼자 먹기 하도 심심해서 산山고랑이 처녀處女가 나를 농락籠絡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세계 어디를 가도 술이 없는 나라와 지역은 없다. 술은 그 지역의 생태계와 문화를 반영하는 대표적 맛이다. 쌀이 귀하던 울릉도에서는 옥수수를 이용해 밥을 지어 먹고 막걸리, 청주까지 담가 먹었다. 육지에서 쌀과 소주가 들어오면서 자연스레 진노란 황금색의 토종 옥수수와 옥수수엿청주는 사라져갔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만들던 옥수수엿청주를 기억해서 맛의 방주에 신청한 이는 역시 산마을식당의 한귀숙 대표다. 지금 나리분지 어디에서나 팔고 있는 ‘씨껍데기술’은 한 대표가 옥수수엿청주를 관광 상품으로 개량한 술이다. 단맛이 느껴지면서도 순하고 부드럽다. 옥수수엿청주를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옥수수 알을 훑어내 맷돌이나 분쇄기로 갈아서 하룻밤 물에 불린다. 이런 다음 옥수수죽을 쑤어 식힌 뒤 엿기름과 섞어 불을 지펴 3분의 2가량 남을 정도로 달인다. 이렇게 달인 물을 식힌 뒤 누룩을 집어넣어 술을 담근다.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열흘이 지나면 술이 완성된다.
1 꽁치 젓갈은 울릉도와 포항, 울진 등 동해안에서 밥도둑이라 불린다.
2 꽁치완자를 넣어 끓인 엉겅퀴된장국과 꽁치물회. 아쉽게도 지금은 손꽁치를 맛볼 수 없지만 봄철에 잡은 꽁치를 손질해서 급랭시킨 후 두고두고 요리에 사용한다.
손가락 안에 가득 ‘울릉 손꽁치’
꽁치는 산란기가 되면 바다풀에 모여 다른 물체에 몸을 비비며 산란을 한다. 바로 꽁치의 이런 습성을 이용하는 것이 손꽁치잡이로서, 바다풀을 꽁치의 산란장에 띄워놓았다가 꽁치가 산란하기 위해 모여들면 열 손가락을 펼쳐서 담그고 있다가 잡아 올린다. 즉 손가락이 해초라고 착각한 꽁치들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모여들면서 몸을 비벼댈 때, 잡아 들어 올리는 것. 이렇게 잡힌 꽁치는 현대 방법으로 그물에 잡혀온 꽁치보다 맛이 훨씬 좋아서 인기가 높다. 사람의 손가락을 어획 도구로 이용하다 보니 상처가 적고 에너지 투입량이 대폭 줄어드는 친환경 어업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맛의 방주에는 종자나 음식뿐 아니라 농어업 작업 방식까지 포함되어 있다. 현대적 어업 방식 덕분에 우리는 저가의 생선을 소비하고 있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언제까지 구입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미 6년 전에 비해 우리나라의 꽁치 어획량은 94% 줄었다는 통계가 나왔다. 값싼 생선의 하나인 꽁치를 지금처럼 대량 어업 방식으로 싹쓸이하다보면 가장 비싼 생선으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아쉽게도 지금 울릉도에서 손꽁치를 만날 수는 없지만, 유자망이나 정치망으로 잡은 꽁치를 물회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 또 칼로 다져서 만든 완자를 엉겅퀴된장국에 넣어 먹어도 구수하고, 젓갈로 만들면 비린 맛이 나지 않는다.
울릉도 두메부추는 살이 두툼하고 끝이 둥글다.
먹어서 지키자 ‘울릉 산채’
기계화와 대규모 산업농에 밀려서 어려움에 처한 ‘고품질 먹거리 소규모 생산 공동체’는 인류의 자산이다. 소비자와 전문가 등 시민사회가 나서서 이들의 생산품을 먹지 않으면 조만간 문을 닫게 될 것이고 우리 아이들은 접할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이들 생산 공동체 주위로 다양한 자원을 연결시키는 활동이 ‘맛지킴이두레(Presidia)’다. 지난해 5월에 섬말나리, 참고비, 삼나물, 두메부추 등 울릉 산채를 생산하는 작목반이 국제슬로푸드 맛지킴이두레에 선정되어 전 세계 1백50개 나라와 10만 슬로푸드 회원 네트워크의 지원을 받았다. 지원은 다른 게 없다. 소비자는 잘 먹는 것으로 좋은 생산을 지원하는 것이다.
칡소산적과 홍감자인절미, 옥수수엿청주, 섬말나리 홍감자밥. 특히 홍감자를 쪄서 치대고 절구로 오래 찧으면 살짝 쫄깃한 식감이 생긴다. 이를 두고 인절미라 불렀다.
‘산진해미山珍海味’라는 옛말이 있다. 산과 바다의 온갖 진귀한 재료로 만든 음식을 뜻하는 것이다. 울릉도는 그 자체가 산이면서 바다인 곳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뒤처진 덕분에 아직까지 깨끗한 산과 바다, 풍부한 생물 다양성을 보존하고 있다. 울릉도 밥상을 받아보면 울릉도의 산과 바다가 그대로 그려진다. 지금 흔하게 나오는 울릉도의 산나물과 해조류, 생선이야말로 가장 ‘진귀한 재료’다. 땅과 바다가 오염된다면, 땅에서 농부가 떠난다면, 먹는 일에 소비자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밥상 위에 산나물과 해조류, 생선이 올라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육지에서 상다리가 부러지게 올라오는 진수성찬에 과연 그 지역의 자연과 맛은 얼마나 담겨 있는가? 산진해미 울릉도의 맛을 지키는 것은 우리 소비자의 몫이다.
- 산진해미山珍海味 울릉도 맛의 방주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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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바다의 먹거리가 풍요로운 여행지, 울릉도. 울릉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따개비밥, 홍합밥, 오징어내장탕, 산채비빔밥…. 지금 우리가 즐기는 이 풍요로운 자연 밥상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지난날 우리 할머니들이 만들어 먹던 토종 먹거리는 얼마나 남았을까? 울릉도로 슬로푸드 여행을 다녀왔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