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 중에서 기억에 가장 오랫동안 남는 것이 미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에게는 평범해 보이는 음식일지라도 나에게 가장 소중한 맛이 바로 엄마표 음식입니다. 더군다나 외할머니부터 엄마 그리고 자신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음식이라면 더욱 특별하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할 테지요. 빛깔이 아주 고운 그릇을 만드는 이혜미 도예가에게 엄마의 음식은 오랜 지혜가 담긴 인생의 묘약입니다.
“외할머니와 엄마 모두 종갓집 맏며느리셨어요. 1년에 수차례 제사를 지내고 손님치레를 하면서 살아온 두 분은 맵고 칼칼한 음식을 좋아하셨지요. 매운 음식이 스트레스 해소에 최고잖아요. 그래서인지 저희 집 음식에는 고춧가루나 청양고추가 많이 들어가요. 저 역시 슬플 때나 마음이 힘들 때 청양고추가 팍팍 들어간 엄마 음식이 떠오르더라고요. 엄마표 매콤한 새우젓찌개나 비빔국수를 먹고 나면 막힌 곳이 뻥 뚫린 것처럼 가슴속이 시원해져요.” 그는 매일 먹는 엄마의 음식에는 외할머니의 손맛과 추억하고 싶은 맛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요리하는 엄마 옆에서 귀찮아할 정도로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손으로 직접 기록하고 싶은 마음에서 스크랩북을 만들기로 했다지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만들어온 스크랩북에는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가르쳐준 장떡 레시피와 원소병을 비롯해 잡지 속 요리 사진과 레시피를 조각조각 오려서 붙인 흔적들이 가득합니다. 종갓집에서 나고 자란 덕분에 안 먹어본 음식이 없다는 그는 민들레김치며 꽈리고추찜, 장어탕 등 엄마의 손맛을 기록해 자신 역시 언젠가 딸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 장 두 장 써 내려간 스크랩북은 그에게 또 다른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도자기를 만들 때 스크랩북을 보면서 영감을 많이 받아요. 엄마의 음식을 기록하면서 어떤 그릇에 담으면 좋을까 생각하고, 오려서 붙여놓은 사진들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저만의 그릇을 디자인해보기도 하지요. 스크랩북을 만드는 것 자체가 엄마의 요리를 기록하는 동시에 도자기를 색다르게 공부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된 거죠.”
이혜미 도예가와 웃는 모습이 닮은 엄마 조안숙 씨는 딸과 함께 요리하는 시간도 즐겁지만, 딸이 만든 그릇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무척이나 소중합니다. 그릇에 음식을 담아보고 쓰임새를 같이 고민해보면서 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이지요. 엄마는 딸이 자신의 요리를 기록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고, 딸은 엄마의 맛을 추억하며 도자기 디자인에 대한 아이디어도 얻으니 이보다 좋은 일이 또 있을까요.
매콤한 장떡과 동글동글 원소병
“된장과 고추장을 체에 곱게 내린 후 밀가루와 물만 섞어서 부쳐 먹는 장떡은 매콤한 음식을 좋아하는 우리 집 인기 메뉴예요. 엄마는 어릴 적 외할머니께서 만든 장떡이 소쿠리에 소복이 쌓여 있으면 정말 행복하셨대요. 고추장을 듬뿍 넣고 맵게 만들어 밥을 싸서 먹으면 반찬으로 좋고, 된장과 고추장을 조금씩 넣어 싱겁게 먹어도 맛있어요. 찹쌀가루를 색색으로 익반죽해 유자청을 넣어 동글동글하게 빚어 삶은 뒤 오미자물에 동동 띄운 원소병은 여름철에 빠지지 않는 음청류로, 그야말로 별미예요.”
- 조안숙&이혜미 모녀 [엄마의 맛을 기록하다] 엄마의 맛을 ‘스크랩’으로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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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먹었니?” 엄마는 늘 끼니 걱정부터 하십니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 보는 게 가장 행복한 일인 것이 부모의 마음이니까요. 삼시 세끼 밥해 먹이는 일을 숙명처럼 여기며 이른바 부엌데기를 자처하는 이들이 바로 우리의 어머니, 엄마입니다. 자식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정성껏 만든 음식이니 세상 모든 아들딸에게 엄마의 맛은 배속과 마음속을 가득 채우는 행복한 먹거리인 동시에 최고의 미식美食일 수밖에요. 고단한 세상살이를 견디게 하는 위로이자 “괜찮아, 괜찮아” 하며 엄마가 넌지시 건네는 응원이 기도 합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마음이 시리고 아플 때, 홀로 적적할 때 가장 먼저 엄마가 해준 따뜻한 집밥이 떠오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미식이 범람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요즘 한창인 집밥 신드롬은 집에서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싶다는 현대인의 절절한 호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뿐인가요. 엄마의 음식은 입맛의 기준이기도 합니다. 태어나서부터 내내 길들여진 입맛인지라, 어떤 음식이든 맛의 기준은 엄마의 손맛에 따라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엌에서 문지방을 넘어 안개처럼 부옇게 스며들던 찌개 냄새, 그 냄새와 맛에 홀려 밥 한 그릇 뚝딱 먹어치운 기억은 ‘우리 엄마’의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를 천상의 맛으로 등극시키기도 합니다. 가슴을 아련하게 하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지요. 레시피 카드로, 사진으로, 그림으로, 스크랩북으로, 요리책으로… 삶의 근간이 되는 엄마의 맛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록하는 이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추억하는 엄마의 음식도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엄마의 맛을 기록하는 순간을 치유의 시간이라고 입 모아 말합니다. 엄마가 해준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나서야 비로소 배뿐 아니라 영혼의 허기를 달랜 경험, 당신이라고 없을까요? 언젠가는 엄마의 김치, 엄마의 찌개를 절절하게 그리워할 날이 오겠지요. 내 입에 달고 내 몸에 약이 되는 우리 엄마의 손맛을 기록해보세요. 가족을 위해 헌신한 엄마에게 바치는 헌사로 내게는 물론 우리의 엄마에게도 마음 훈훈한 선물이 될 겁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