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소중한 물건 하나쯤은 물려주고 싶은 것이 이 세상 모든 엄마의 마음일 것입니다. 옷, 조리 도구, 그릇 등 수많은 물건이 있을 테지만 문인영 요리연구가가 엄마에게 물려받은 것은 40년도 지난 빛바랜 레시피 카드와 모서리가 닳아버린 그야말로 오래된 요리책입니다. 그런 그에게 엄마의 맛이 주는 의미를 물었더니, 단 네 글자 “다양하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유쾌하게 웃습니다. “영양사 출신인 엄마 덕분에 식탁 위는 항상 새로운 음식으로 가득했어요. 깐풍기, 칠리 새우 등 집에서 먹기 힘든 특급 요리를 별미로 만들어주실 때도 많았어요.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밥 먹을 때 대화의 주제가 소스나 재료 알아맞히기였을 정도로 매번 다양한 음식을 해주셨지요. 그래서 엄마가 주신 집밥 하면 수십 가지 음식과 다채로운 맛이 머릿속에 떠올라요.” 그가 요리 연구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다양한 음식을 먹고 자라서였을까요?
핏줄은 못 속인다더니 서로를 쏙 빼닮은 모녀는 진로마저도 같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문인영 요리 연구가는 대학에서 엄마와 같은 식품영양학을 전공했지요. 엄마의 레시피 카드와 요리책을 간직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라고 합니다. 그의 엄마 심찬진 씨는 “잘 기록하는 이가 살아남는다”는 믿음으로 대학 시절부터 레시피 카드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직접 해보고 맛있었던 요리만 골라 정갈한 글씨로 빼곡하게 채운 레시피 카드를 딸이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물려주었다고 해요. 그래서 요리 스튜디오 책장 한쪽에는 전설적 요리사 줄리아 차일드의 <마스터링 디 아트 오브 프렌치 쿠킹>을 비롯해 엄마가 물려준 오래된 요리책과 레시피 카드가 빼곡히 차 있습니다. 졸업할 무렵 엄마를 따라 영양사의 길을 걷지는 않았지만, 그가 요리 연구가가 된 후에도 엄마의 맛은 늘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2003년 푸드 스타일링 과정을 들을 때 직접 준비한 레시피로 사람들 앞에서 강의하는 과정이 있었어요. 어떤 레시피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 엄마표 연어연근 샐러드가 섬광처럼 번쩍 머릿속에 떠올랐어요. 엄마에게 물어 레시피를 준비했고 꽤 좋은 반응을 얻으며 마무리할 수 있었지요.” 이미 여러 권의 요리책을 낸 문인영 요리 연구가는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할 때도 혀끝으로 엄마의 맛을 더듬고 레시피 카드를 뒤적거리곤 한다지요. 엄마는 요리 연구가인 딸의 고단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자신의 일처럼 항상 응원합니다. 레시피 카드와 함께 딸에게 물려주고 싶은 또 한 가지는 기본 레시피는 따르되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마음가짐이라고 합니다. 엄마의 레시피가 딸의 다양한 도전에 의해 진화하고 확장할 날이 머지않아 보입니다.
아삭한 연어연근 샐러드와 소박한 새우 샐러드
“집에서 종종 파티가 있을 때마다 엄마는 아삭아삭한 식감이 입맛을 돋우는 연어연근 샐러드를 준비했어요. 양상추와 연근 위에 부들부들한 훈제 연어를 올리고 레몬즙, 식초, 올리브유, 다진 양파와 깻잎으로 만든 새콤달콤한 드레싱을 뿌리면 돼요. 엄마만의 비법은 연근을 미리 식초, 설탕, 소금을 넣은 물에 재워두는데 간이 배어 떪은맛이 없어지면서 피클처럼 아삭하게 즐길 수 있어요. 지인에게도 인기 높은 메뉴였지요. 엄마의 레시피에서 발견한 새우 샐러드는 찐 새우와 감자, 당근 등을 마요네즈에 버무린 후 체에 거른 달걀노른자를 뿌리면 완성이에요. 경양식집에서 내놓는 샐러드가 절로 생각나는 맛이랍니다.”
- 심찬진&문인영 모녀 [엄마의 맛을 기록하다] 엄마의 맛을 ‘레시피 카드’로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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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먹었니?” 엄마는 늘 끼니 걱정부터 하십니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 보는 게 가장 행복한 일인 것이 부모의 마음이니까요. 삼시 세끼 밥해 먹이는 일을 숙명처럼 여기며 이른바 부엌데기를 자처하는 이들이 바로 우리의 어머니, 엄마입니다. 자식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정성껏 만든 음식이니 세상 모든 아들딸에게 엄마의 맛은 배속과 마음속을 가득 채우는 행복한 먹거리인 동시에 최고의 미식美食일 수밖에요. 고단한 세상살이를 견디게 하는 위로이자 “괜찮아, 괜찮아” 하며 엄마가 넌지시 건네는 응원이 기도 합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마음이 시리고 아플 때, 홀로 적적할 때 가장 먼저 엄마가 해준 따뜻한 집밥이 떠오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미식이 범람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요즘 한창인 집밥 신드롬은 집에서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싶다는 현대인의 절절한 호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뿐인가요. 엄마의 음식은 입맛의 기준이기도 합니다. 태어나서부터 내내 길들여진 입맛인지라, 어떤 음식이든 맛의 기준은 엄마의 손맛에 따라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엌에서 문지방을 넘어 안개처럼 부옇게 스며들던 찌개 냄새, 그 냄새와 맛에 홀려 밥 한 그릇 뚝딱 먹어치운 기억은 ‘우리 엄마’의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를 천상의 맛으로 등극시키기도 합니다. 가슴을 아련하게 하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지요. 레시피 카드로, 사진으로, 그림으로, 스크랩북으로, 요리책으로… 삶의 근간이 되는 엄마의 맛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록하는 이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추억하는 엄마의 음식도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엄마의 맛을 기록하는 순간을 치유의 시간이라고 입 모아 말합니다. 엄마가 해준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나서야 비로소 배뿐 아니라 영혼의 허기를 달랜 경험, 당신이라고 없을까요? 언젠가는 엄마의 김치, 엄마의 찌개를 절절하게 그리워할 날이 오겠지요. 내 입에 달고 내 몸에 약이 되는 우리 엄마의 손맛을 기록해보세요. 가족을 위해 헌신한 엄마에게 바치는 헌사로 내게는 물론 우리의 엄마에게도 마음 훈훈한 선물이 될 겁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