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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즐기는 배지은∙한정은 모녀 "어머니에게 배운 차, 내 방식으로 마셔요"
어머니가 차를 즐겨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자란 딸이 취향을 대물림해 일상에서 차를 누리며 산다. 물, 불, 흙, 꽃, 향, 맛을 만끽하며 차 삼매경에 빠진 이들은 하늘과 산이 잘 보이는 곳을 찾아 4년 전에 대구 앞산이 펼쳐지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화기에 담은 녹차나무, 이름표를 적은 차함, 자연의 색을 고스란히 닮은 꽃 자수… 곱고 소담한 온기가 집 안 전체에 가득하다. 입춘에 만난 모녀의 차 예찬가.

한옥 느낌을 내려고 문살 있는 창을 내어 꾸민 다실. 차를 주거니 받거니 마시며 담소를 나누면 대여섯 시간이 훌쩍 흐른다. 이전에는 누리지 못한 선물같은 모녀의 시간. 
KTX를 타고 동대구역에 도착하니 피부에 와 닿는 찬 공기 속에 봄기운이 느껴졌다. 차 마시기 좋은 계절이다. 어머니 배지은 씨는 먼 곳에서 온 손님이라고 찻상 대신 밥상을 먼저 내온다. 일하는 사람, 배부터 채워야 한다며 인심이 후하다. 예상치 못한 대접으로 입이 호사를 누리는 가운데 베란다 앞에 놓인 소쿠리가 눈에 띈다. 소쿠리 안에는 우엉, 구기자, 블렌딩 차가 햇살을 쬐고 있다. 차가 봄의 온기를 골고루 받도록 다구로 쓱쓱 흩트리는 건 딸 한은정 씨의 일이다.

맨 아래쪽부터 세작, 중작, 우리 고유의 발효차인청태전 그리고 발효차들. 한국차도 취향대로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이 한은정씨의 조언이다
한옥을 닮은 한 칸 다실
모녀는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방 한 칸을 다실로 꾸몄다. 아이디어는 어머니 배지은 씨와 딸 한은정 씨가 함께 냈고, 아버지 한성근 씨는 꾸밈을 도왔다. 한옥의 분위기를 내고 싶어 문살 있는 창을 들였고, 조명등은 한지로 감쌌다. 좌탁은 아버지가 나무 잘 다루는 집을 소개받아 직접 차로 실어온 것. 좌탁 앞에 두어 여럿이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작은 다판은 아버지가 직접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만들었다. 한 달에 한 번 청도 용천사 약수터에 들러 찻물이 끊이지 않도록 물 항아리를 채우는 것 역시 아버지의 몫. 차를 즐기는 것은 모녀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든든한 조력자다. 찻장과 다기는 불자인 어머니가 사찰을 다니며 오랜 시간에 걸쳐 하나씩 얻어온 것이 많다. 다구 하나 허투루 구입한 것이 없다. 차함에는 구입 날짜와 다원 이름, 차를 만든 날짜 등이 꼼꼼하게 적혀 있다. 그중에는 한은정 씨의 법명인 ‘지혜장Jihyejang’도 보인다. 직접 블렌딩한 차를 날짜와 함께 메모한 것. 다실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환기다. “가정집이니까 음식 냄새가 많이 나잖아요. 요리할 땐 찻방의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최대한 냄새가 고이지 않도록 신경 씁니다. 환기가 잘돼야 차 숙성도 잘되거든요. 그리고 화장품이나 향수를 진하게 사용하는 사람, 방귀 뀌는 사람도 출입 금지예요. 후후.”

좌탁에 나란히 앉아 녹차를 마시는 모녀. 야생화 찻잔 받침은 어머니 배지은 씨가 직접 수놓은 것이다.
어머니에게서 취향을 물려받다
“서향西向이에요. 한낮에는 햇빛이 아늑하게 비추고 해 질 무렵에는 다실이 제일 밝죠. 차의 말간 색이 잘 보이는 백자에 차를 우리고 앉으면 격자무늬의 창살이 찻물에 그대로 비쳐요.” 집에서 다실을 가장 좋아한다는 한은정 씨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가 차 즐기는 모습을 보아왔다. “엄마를 따라 영천 백흥암에 간 적이 있어요. 어깨너머로 보이는 다담을 나누는 스님의 모습이 참 멋있었어요. 그릇을 다루는 자태를 보고 막연하게 차가 궁금했지요.” 차를 흠모하던 한은정 씨가 본격적으로 차를 공부하게 된 건 대학교를 휴학하고 1년간 한국 티인스트럭터협회에서 강좌를 들으면서다. 이때 차의 효능과 다도를 비롯해 다화, 다식, 테이블 세팅 등을 체계적으로 공부했다. 어머니 건강을 위해 홍승 스님의 사찰음식문화연구원에서 약선, 사찰 음식을 함께 배우기도 했다. 현재는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소비자학과를 전공하며, 차를 만들고 종종 차에 관한 강연을 한다.

찻장과 다구는 직접 구입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친분이 있는 스님이나 지인에게서 얻었다. 
‘내 멋대로’ 즐기는 차
한은정 씨가 가장 좋아하는 차는 녹차, 즉 한국차다. 향과 맛이 부드러워 일상에서 매일 즐겨도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향이 짙은 보이차는 누가 봐도 딱 알 수 있죠. 가향이 많은 홍차도 마찬가지예요. 그 특유의 향과 맛이 강해 일상생활에서 계속 찾게 되지는 않더라고요. 제겐 언제나 잘맞고 편하게 마실 수 있는 것이 한국차예요. 녹차에도 맛있는 발효차가 많고 종류도 다양한 것 아시나요? 녹차 만드는 과정에서 발효 단계를 추가해 더 오래 산화시켜요. 찻잎이 햇빛과 산소를 만나면 색깔이 점점 붉게 변합니다. 산화하면서 발효되는 과정이죠. 만드는 사람이나 다원에 따라 그 맛도 참 달라요.” 그는 한국차를 가장 좋아하지만, 우엉차, 귤피차 같은 대용 차를 만들어 마시거나 다양한 차를 섞는 블렌딩을 하기도 한다.예를 들어 성질이 차다고 하는 녹차는 성질이 따뜻한 생강, 모과, 국화 등을 섞어 수차례 반복해 덖거나 찌는 과정을 거친다.

인터뷰 중에 그가 직접 블렌딩한 차를 권했다. 진한 흑갈색을 띠는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입안에 녹차 특유의 쌉싸래한 맛과 함께 시트러스 향의 여운이 오래 남는다. 블렌딩한 다양한 차 맛을 느낄 수 있으니 혀가 즐겁다.“선물 받은 차도 많고, 잘 마시지 않는 차도 있어요. 이런 걸 모아두었다가 어울리는 재료를 생각하죠. 젊은 사람들은 차가 밍밍하고 맛이 없다고 느낄 수 있잖아요. 그럴 때 일상에서 캐주얼하게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재료를 섞으면 좋아요. 색감과 향을 조절할 수 있고, 시각적 즐거움도 줄 수 있죠. 차가 문화가 되려면 많은 사람이 일상에서 다양하게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은정 씨는 여름엔 녹차에 오미자, 매실, 블루베리, 오디, 복분자청을 넣어 차갑게 마시고, 겨울엔 달달한 다식을 곁들여 따뜻하게 마신다. 단맛을 함께 섭취했을 때 차의 효능을 세배 이상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를 마시면 소화ㆍ이뇨 작용으로 금세 허기가 지는데, 다식이 배를 든든하게 해준다.

1 돼지감자차, 구기자차, 우엉차 등 대용 차와 배에 통후추를 끼우고 생강ㆍ배청을 섞어 만든 티 베리에이션. 모두 한은정 씨 솜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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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은정 씨가 직접 만든 다식들. 단맛과 어우러질 때 차의 효능도 높아지고 맛도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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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실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다도구. 

경이롭지 않은 것이 없다
한은정 씨는 일상에 차를 들이면서 크게 세 가지 내적 변화를 느꼈다. 첫째는 감사하는 마음이다. 음식을 만들고 차를 배우면서 흙에서 나고 자란 재료가 우리 몸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농부의 노고와 자연의 고마움을 온몸으로 느낀 것이다. “공기, 햇빛, 흙, 물, 바람이 있기에 우리가 먹고 살아갈 수 있잖아요. 차를 공부하기 전에는 그 가치를 알지 못했어요. 요즘엔 녹찻잎 새싹 하나가 돋는 것을 봐도 신기해요. 경이롭지 않은 게 없어요.” 둘째는 ‘깨어 있음’이다. 차를 마시고 음식을 다루는 일은 때론 위험이 따른다. 뜨거운 물과 날카로운 칼 등 예리하고 위험한 것을 항상 손으로 다룬다. 즐기고 있어도, 늘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한순간 그릇을 떨어뜨리거나 뜨거운 물에 델 수 있는 것. “불을 쓰고 차를 내리고 있다며 늘 인식하고 의식합니다. 그렇게 정신을 청명하게 유지하면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보게 돼요. 음식을 만들고 차를 마시는 순간은 제게 마음을 내려놓는 시간이자, 가장 말갛게 깨어 있는 시간입니다.” 셋째는 행복의 발견이다. 한은정 씨는 차를 공부하면서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한지 알게 됐다. 마음의 평온을 찾으면서 소탈하게 만족하며 사는 삶을 누린다. “근래 보지 못한 친구를 만나면 ‘요즘 무슨 일을 하기에 얼굴이 그렇게 좋으냐, 얼굴이 참 편해 보인다’ 라고 말해요.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고, 겉으로 드러나는 기운도 달라진 것 같습니다. 차가 인생에 이렇게 많은 변화를 가져올지 정말 몰랐어요.”

차를 구입한 날짜와 다원 이름, 차를 만든 사람을 메모해 차를 보관한다. 
2 구입한 지 오래됐거나 잘 마시지 않는 차는 성질의 조합을 고려해 블렌딩을 한다. 수차례 찌고 덖고 건조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하지만 이 또한 차를 즐기는 방법이다. 

일상에 차 들이기
“요즘은 어디에 가도 정수기가 있잖아요.빈 보온병에 찻잎만 따로 챙겨 가는 일이 일상이 됐어요. 차나 물등에 얽매이지 않아요. 진하게 먹고 싶으면 오래 우려내거나 찻잎을 더해요. 차도 취향대로 즐기면 됩니다. 냄새에 민감해서 멀미가 자주 나는 편인데, 소화가 잘 안 되거나 속이 불편하면 찻잎을 씹어서 삼켜요. 그러면 금세 소화가 되고 메스꺼움이 사라져요.” 그는 우전이나 세작 같은 여린 잎은 차를 우려 마신 후에 반찬으로 무쳐 먹는다. 가루차는 밥을 지을 때 넣거나 오차즈케(녹차밥)를 해 먹고, 세안할 때 섞어 사용하기도 한다. 차를 마시는 행위 이외에 일상에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까지, 그는 차를 온몸으로 즐기고 있었다. 직접 블렌딩한 차나 대용 차를 만들어 지인에게 나눠주는 일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한은정 씨는 “언제 차 한잔 하자”라는 인사말을 가장 좋아한다.

‘눈을 마주치며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자’는 말과 동일하게 들리기 때문이다.“사람들이 격식에서 벗어나 일상에서 차를 다양하게 즐기면 좋겠어요. 격식을 간소화하고 다양한 음용법이 있으면 젊은 세대가 차를 편하게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은정 씨는 종종차 바구니를 들고 가까운 산으로 부모님과 나들이를 간다. 차바구니를 풀면 그곳이 어디든 작은 찻방이 된다. “보온병과 잎차를 적당히 챙겨 풍치 좋은 산이나 계곡에 차 소풍을 떠나요. 여기다 싶으면 아빠가 어디서 큰 돌판이나 평평한 나무를 갖고 오신답니다. 계곡물로 흙을 닦아내고 자리를 잡으면 거기가 바로찻자리예요. 보기 좋게 다구를 펼쳐놓고 차를 마시면 그보다 좋은 신선놀음이 없습니다.” 취향을 대물림해 차 마시는 일이 취미가 되었고, 차를 만드는 일까지 확장하고 있는 그는 이제 다실 밖에서도 다실을 만들어 차를 즐긴다. 일상과 차가 교집합을 이루며 사는 다인茶人의 봄.

글 신진주 기자 | 사진 김규한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