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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 음식, 낙선재로 돌아오다
서울이 지난날 조선 왕조의 수도였음을 보여주는 흔적은 곳곳에 존재한다. 궁궐이 그저 하나의 건축이 아닌, 선조들이 삶을 꾸려간 곳임을 느끼기 위해서는 눈으로 보고 지나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공간에 담긴 스토리를 대중에게 꾸준히 일깨워야 한다. 지난 9월 23일과 24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조선시대의 궁중 문화와 음식 이야기를 생생하게 보고 들을 수 있는 전시가 열렸다.

대원반과 소원반, 책상반이 놓이는 수라상. 
낙선재, 궁중 음식이 전해진 곳 조선 제24대 왕 헌종이 총애하던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 낙선재는 왕실의 위엄을 담은 화려한 서까래도, 단청 채색도 없는 소박한 건물이지만 궁중 음식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 고종과 순종은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는데, 순종의 비妃 순정효황후를 모시던 한희순 상궁에게서 궁중 음식을 전수받은 곳이 바로 낙선재이기 때문이다. 국립무형유산원과 종로구가 주최하고 궁중음식 연구원 한복려 원장이 기획한 2014 조선시대 궁중 음식전의 타이틀이 ‘궁중 음식, 낙선재로 돌아오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전시는 낙선재와 낙선재에서 이어지는 석복헌, 수강재에서 진행했다. 궁중 음식의 조리법을 정리한 조리서<이조궁정요리통고>에서 재현한 궁중 음식을 생선 조개 음식, 고기 음식, 닭과 꿩 음식, 채소 음식, 곡물 음식, 편과 떡, 과자, 화채 등으로 나누어 궁중음식연구원과 궁중병과연구원, 궁연회 등에서 만들어 소개했으며,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의 팔순 잔치에 오른 진언찬안, 순조 즉위 30주년을 경축하는 잔치 음식 등도 전시해 정갈하고 화려한 자태를 뽐냈다. 그뿐 아니라 죽순과 쇠고기 등을 가을 홍시로 만든 소스에 무친 홍시죽순채, 잔칫날 교자상이나 특별한 손님의 주안상에 올린 구절판의 시연과 다식, 잣솔, 율란, 곶감꽃 등 비교적 쉽게 배울 수 있는 궁중 음식을 만들어볼 수 있는 체험 행사도 열렸다.

1 2014 조선시대 궁중 음식전을 기획한 궁중음식연 구원 한복려 이사장. 
2 수라상에는 밥과 국, 찌개 등과 아홉 가지 찬과 세 가지 별찬을 올렸다. 

조선 왕가 계보와 영상 자료, 사진으로 전해지는 왕가 인물 자료 전시, 궁중 음식 전승 관련 사진과 자료 전시를 비롯해 궁중 잔치 이야기 강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해 많은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중 백미는 고종 황제와 왕비가 상궁들에게 수라상을 받는 수라진어 모습을 재현한 공연이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된 궁중음식연구원 한복려 원장은 궁중수라진어를 재현하기 위해 <이조궁정요리통고> 등의 문헌을 바탕으로 수라상과 함께 임금에게 진상한 지역 명물과 음식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수라상을 제대로 차리는 것도 물론 중요했지만, 궁중 문화와 예법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대본과 해설까지 직접 쓰며 많은 것을 전하려 노력했지요.” 한복려 원장이 기획한 궁중수라진어 재현 공연은 상궁들이 수라상을 차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수라상을 통해 백성의 삶을 가늠하다
붉은색 주칠을 한 대원반과 소원반, 작은 책상반이 한 번에 놓이는 수라상. 왕 앞에 놓인 대원반에는 백반과 미역국, 세 가지 장과 김치, 두 가지 찌개와 한 가지 찜, 열두 가지 찬이 담겼다. 상을 다 차리고 나면 상궁들이 왕과 왕비를 모셔 오고 “마마, 젓수시지요” 라며 수라가 준비되었음을 알린다. “오늘은 홍반이 먹고 싶네. 홍반을 주시게”라는 왕비의 말에 기미상궁은 대원반 옆의 소원반에 놓인 홍반과 곰국을 대원반으로 옮긴다. 왕과 왕비의 수라상에는 백반과 미역국, 붉은 팥물로 지은 홍반과 곰국 두 가지 밥과 국을 올려 왕과 왕비는 기분에 따라 두 가지 중 골라 먹었다. 수라상에는 전국의 산ㆍ바다ㆍ들ㆍ강에서 계절마다 나는 진상품과 근처 밭에서 나는 채소로 만든 음식이 올랐는데, 찬이 열두 가지나 오른다는 건 나라가 평온하고 풍요롭다는 걸 의미했다.

3 주악, 인절미, 송편, 화전 등 열네 가지 궁중의 떡을 재현했다. 
4 구절판과 송이전골, 호박꽃탕, 김부각 등 열 네가지 궁중의 채소 음식을 석복헌에 전시했다. 
5 배우 서태화와 안연홍이 고종과 왕 비 역할을 맡은 수라진어 재현은 음식과 관련한 판소리 공연으로 마무리되었다.

“조선은 효孝를 중요시해 나라의 어른인 왕에게 전국의 최고 특산물로 맛있는 음식을 올리기 위한 것도 있지만, 수라상을 통해 백성의 삶을 가늠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흉년이나 홍수, 전쟁 등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땐 반찬 가짓수를 줄여 백성과 아픔을 함께하려고 했지요.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는 고기도 먹지 않았고, 화려한 음식도 내지 않았습니다. 물론 식성이나 통치 철학에 따라 평소에도 반찬 수를 줄이는 왕도 있었고요.” 한복려 원장은 수라진어 재현을 통해 조선의 효 문화는 물론, 임금이 수라상을 통해 나라의 형편을 살피던 것까지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고종은 배를 많이 넣은 배동치미를 좋아해 야참으로 동치미 냉면을 자주 즐겼다고 해요. 의궤에는 상차림 모습만 담겨 있을 뿐이니, 이는 실제 고종을 모신 내인의 말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지요.”

역사책만으로는 전해지지 못하는 궁중 음식과 궁중의 많은 이야기가 조선이 막을 내릴 무렵에라도 실제 주방 상궁을 통해 전해진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다. 명맥이 끊기지 않고 현재까지 전해지고, 후세에까지 기억하고 이어지려면 궁중 음식은 끊임없이 대중과 만나야 한다. 2014 조선시대 궁중 음식전은 ‘궁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 아니라 이 같은 이야기를 보여주고 들려주는 과거와 현재의 접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를 알린 뜻깊은 행사였다.



글 박유주 기자 | 사진 제공 궁중음식연구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