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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맛있다 메밀꽃 필 무렵
굵은소금을 뿌린 듯 하얗게 메밀꽃이 피었다.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한 장면처럼 산허리에 흐뭇한 달빛이 비추니 숨이 막힐 지경이다. 꽃말조차 아슴아슴하게 ‘연인’이라니. 한데 천생 여자같이 여리여리한 꽃과 달리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강인한 작물이 메밀이다. 어려운 시절에는 가을에 수확해 겨우내 먹는 구황 식품으로, 오늘날에는 건강식과 미용식으로 인기인 메밀 음식에는 땅의 기운이 담겨 있다. 싱싱한 메밀 싹에서 하얀 메밀꽃까지 그 쓰임새 역시 다양해 소설의 무대인 강원도 봉평 지역은 어딜 가나 사계절 내내 메밀 음식 천지다.


1936년 <조광>에 발표된 <모밀꽃 필 무렵>은 이효석문학관 소장품. 본문 내용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발췌하였음.

얼금뱅이요,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 생원은 기어이 동업의 조 선달을 나꾸어 보았다. “그만 거둘까?” “잘 생각했네. 봉평장에서 한 번이나 흐뭇하게 사본 일 있었을까. 내일 대화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영양 가득 메밀쌀로 차린 밥상
<메밀꽃 필 무렵>에서 무명필과 주단 바리를 파는 왼손잡이 장돌뱅이 허 생원이 장판을 정리하고 조 선달과 함께 들른 충주집은 강원도 봉평에 실재하던 주막이다(현재 가산공원의 충주집은 복원된 초가 주막이다). 강원도 지역은 메밀의 주산지인 만큼 가을이면 메밀로 차린 밥상을 서민이 주로 이용하던 주막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을 터. 특히 메밀은 적응력이 뛰어나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데다 버릴 게 하나도 없는 이로운 곡물 아닌가. 통메밀의 껍질을 벗긴 메밀쌀만 해도 쌀이나 밀보다 무기질과 비타민이 풍부하고, 단백질 함량도 높다. 더군다나 단백질의 일종인 리신이 풍부해 노화 예방 효과도 있다. 게다가 다른 곡물과 달리 씨눈을 배유에 품고 있어 도정을 해도 영양이 그대로 남아 있다. 보리나 현미처럼 쌀에 넣어 밥을 지으면 구수한 맛이 더해지니 예나 지금이나 여러모로 고마운 작물이다.

말린 가지 메밀쌀밥과 버섯들깨국, 더덕북어포무침, 실파멸치무침 그리고 덤벙김치로 차린 가을 밥상.

드팀전 장돌이를 시작한 지 20년이나 되어도 허생원은 봉평장을 빼논 적은 드물었다.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에게는 그리운 고향이었다.

봉평장의 별미, 메밀김치전병
장돌뱅이 허 생원이 봉평장을 빼놓지 않듯, 지금도 여전히 봉평장에 가면 꼭 먹어야 할 별미 중 별미가 메밀전병이다. 메밀전병은 지방마다 다양하게 만들어 먹는데, 특히 강원도와 제주도가 대표적이다. 메밀가루를 묽게 반죽해 만드는 법은 비슷하지만 소의 주재료는 다르다. 강원도는 배추김치나 갓김치를 넣는 반면, 제주도는 무채를 넣는다. 부르는 이름도 제각각이다. 강원도에서는 메밀총떡, 제주도에서는 빙떡이라고 하는 것. 봉평에서는 볶은 돼지고기나 오징어를 섞어 소를 만들기도 하며, 김치는 양념을 털어내고 채 썰어 마른 팬에 볶는다. 그대로 먹으면 담백한 맛이 일품이지만 옛 맛 그대로 즐기고 싶다면 간장을 곁들인다.

맛이나 영양적으로는 메밀가루만 이용하는 것이 좋지만 물을 넣으면 질퍽해지는 성질 때문에 요리하기가 영 불편하다면 밀가루를 섞을 것. 메밀가루와 밀가루를 3:7 비율로 섞으면 농도가 적당하다. 시판하는 메밀부침가루를 활용해도 좋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강원도의 힘, 메밀배추전
허 생원과 조 선달, 동이가 함께 대화장으로 걸어가던 길은 걷는 것에 이골이 난 허 생원도 숨이 차 몇 번이고 다리를 쉬지 않으면 안 되는 고갯길이었다. 그렇기에 강원 산간 지역 경작지는 거의 쪼가리 밭이라 ‘높드리’라 부르는데,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뙈기밭을 이르는 순우리말이다. 산허리나 산등성이에 듬성듬성 조각보처럼 펼쳐진 높드리에서 메밀과 함께 자라는 작물이 배추다. 메밀김치전병과 함께 메밀가루를 이용한 대표적 향토 음식 또한 이들의 조합인 메밀배추전이다. 이때 고춧가루가 잔뜩 들어간 시뻘건 배추김치가 아니라, 소금에 절여 삭힌 배추와 부추를 묽은 메밀 반죽 위에 올려 얇게 부치는 것이 특징이다. 언뜻 보면 가장자리가 마치 레이스 결 같아 옛 추억을 아스라이 가슴에 새긴 허 생원의 마음을 꼭 빼닮은 음식이다.

메밀배추전은 배추가 아삭하게 씹혀야 제맛이다. 잎이 벌어져 푸른 잎사귀만 있는 토종 고랭지 배추를 넣으면 더욱 맛있다. 고랭지 배추는 20℃ 이하의 선선한 날씨에 밤낮의 기온 차가 큰 산간 지역에서 자라 아삭아삭하고 고소하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밫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든든한 겨울 보양식, 메밀묵밥
메밀꽃이 흐드러지면 하루에도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새벽녘에는 햇빛의 황금색과 달빛의 푸른색이 메밀꽃에 얹혀 천상의 그림이 되고, 바람에 가녀린 꽃대가 흔들리면 하얀 파도가 넘실대듯 아찔하다. 비가 내린 날에는 산안개가 낮게 깔려 수묵화처럼 고요하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문학의 향기가 난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외에도 송수권 시인은 시 ‘메밀꽃밭’에서 “내 마음 지쳐 시들 때/ 호젓이 찾아가는 메밀꽃밭/ 슴슴한 눈물도 씻어 내리고/ 달빛 요염한 정령들이 더운 피의 심장도/ 말갛게 심어준다”고 노래했다. 작가뿐 아니라 영양학자들도 메밀에 열광하는데, 콜라겐을 만들어 혈관을 튼튼하게 해주는 루틴 성분 때문이다. 하루 필요량이 30mg인 이 성분이 메밀 100g당 100mg 함유되었다. 우리 선조들이 깊은 밤에 시장기를 때우며 즐기던 메밀묵을 겨울 대표 음식으로 꼽은 것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 대표적 메밀 음식인 묵은 통메밀을 이용하는데, 요즘은 메밀 전문 사이트에서 메밀묵 가루를 판매하므로 집에서 직접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메밀가루와 물을 1:4 비율로 섞어 두 시간 동안 상온에 두었다가 중간 불에 올려 끓인다. 한 방향으로 계속 저으면서 끓이다가 되직해지면 불을 줄이고 같은 방향으로 계속 젓는다. 물방울이 생기면 10분 동안 더 젓다가 뚜껑을 덮어 5분 동안 뜸을 들여 굳힌다.

별식으로 손색없는 메밀묵밥. 잘게 채 썬 메밀묵과 멸치 국물, 송송 썬 배추김치, 간장 양념 등 재료나 만들기도 간단하다. 오이나 김, 메밀 싹 등 고명은 취향껏 올린다.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지.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나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레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 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 팔자에 있었나 부지.”

진짜 국수, 메밀국수
허 생원이 젊은 시절 성 서방네 처녀와 하룻밤을 보낸 물레방앗간은 본래 봉평장터 옆에 있었다. 지금은 흥정천 건너편 산자락에 복원되어 있다. 봉평을 찾는 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유명한 코스지만 일부러 걸음할 필요까지는 없을 듯. 하지만 메밀국수만큼은 꼭 맛봐야 한다. 멸치 국물 내어 신 김치를 송송 썰어 넣고 삶은 메밀국수를 말아 먹으면 별미다. 봉평에서는 배, 사과, 양파 등으로 만든 국물을 사용하는데 달콤하고 깔끔한 맛이 일품이다.

조선시대 궁중 연회에서는 메밀국수와 수육이 자주 올랐다. 성질이 차가운 메밀은 고기와 함께 먹어야 한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지 않던가. 가을은 닭고기나 오리고기 등이 가장 실한 때로, 메밀국수와 함께 먹으면 잘 어울린다.

“주막까지 부지런히들 가세나. 뜰에 불을 피우고 훗훗이 쉬어. 나귀에겐 더운물을 끓여주고 내일 대화장 보고는 제천이다.” “생원도 제천으로……?” “오래간만에 가보고 싶어. 동행하려나, 동이?” 나귀가 걷기 시작했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진화하는 메밀전과 메밀묵
메밀꽃밭 길을 지나 개울을 건너다 허 생원은 동이가 왼손잡이임을 알고는 제 핏줄임을 느낀다. 그렇게 소설은 끝나지만 여운이 애잔하게 남는다. 그 이후는 읽는 이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로 남길 것이다. 강원도 봉평 지역의 대표 음식 메밀전과 메밀묵도 그러하다. 메밀의 쓰임새가 다양한 만큼 음식을 만드는 이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즐기면 그만이다. 메밀가루를 묽게 반죽하는 대신 주재료에 버무리는 식으로 반죽한 뒤 들기름에 부치면 구수한 맛은 더해지고 식감은 더욱 좋아진다. 메밀묵은 조선간장과 들기름에 발사믹 식초를 넣은 별미 소스에 찍어 먹기만 해도 맛있다.

메밀싹부추전과 간장 소스 메밀묵은 만들기 간단하고, 메밀의 영양 또한 고스란히 즐길 수 있는 메뉴. 메밀묵에 쇠고기부추볶음을 올려먹으면 더욱 맛있다.


요리 박종숙 스타일링 서영희 촬영 협조 이효석문학선양회(033-335-2323), 이효석문학관(033330-2700) 

진행 신민주 기자 | 사진 김정한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