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시골 외할머니 댁에 가면 언제나 아궁이에 커다란 가마솥이 걸려 있었다. 솔가지나 짚, 콩깍지, 나무 등을 땔감으로 해서 가마솥에다 밥을 지었는데, 사실 밥의 제 맛을 알 리 만무했던 나이였음에도 서울 집에서 먹던 밥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맛있었다. 밥맛은 쌀과 물, 불 이외에도 솥의 재질이나 두께에 따라서도 확연히 달라진다. <삼국사기>에 보면 1세기 초반인 고구려 대무신왕 때 “솥에 밥을 짓는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쇠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쇠솥이 점차 보급되면서 요즘 밥 짓기와 같은 취반炊飯법이 널리 퍼졌다.
밥맛은 곱돌솥과 무쇠솥이 최고
<규합총서>에서는 솥에 대해 ‘밥 과 죽은 돌솥이 으뜸이요, 오지탕관이 그다음이다’라고 하였고,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는 ‘곱돌솥이 으뜸이요, 오지탕관이 그다음이요, 무쇠솥이 셋째요, 통노구가 하등이다’라고 하였다. 오지탕관은 질그릇에 잿물을 발라 구운 뚝배기 같은 솥이고, 통노구는 작은 놋쇠솥쯤 된다.
옛 문헌에서는 곱돌솥의 밥맛이 으뜸이라고 했지만, 최근 조사 결과에서는 무쇠솥밥이 우세였다. 2004년 국립중앙박물관 과학기술사 연구실은 솥과 밥맛과의 관계를 조사하기 위해 무작위로 4백 명을 선발하고, 이 중 신맛, 단맛, 쓴맛, 짠맛 등 네 가지 맛을 가장 잘 판별하는 10명을 엄선해 밥맛 시험을 했다. 연구팀은 무쇠솥, 돌솥, 냄비, 전기밥솥, 압력밥솥에 쌀 1kg과 물 1500cc를 이용해 똑같은 방법으로 밥을 지었다. 열 사람이 밥맛을 본 결과 밥 색깔과 윤기는 무쇠솥이, 밥 냄새는 무쇠솥과 돌솥밥이, 밥맛은 무쇠솥이, 찰기는 압력밥솥이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아직 농가에서 사용되고 있는 무쇠솥 10개를 뽑아 분석해보았더니 뚜껑 무게가 솥 무게의 3분의 1 정도 되고, 솥바닥이 가장자리보다 두 배 정도 두꺼울 때 밥 색깔, 윤기, 밥 냄새, 밥맛, 찰기에서 가장 좋은 점수를 얻었다. 조사를 담당했던 연구원은 “뚜껑 무게가 솥 무게의 3분의 1일 때 내부 압력이 가장 적당하고 오랫동안 높은 온도가 유지돼 밥이 가장 맛있게 되며, 불에 가까울수록 솥이 두껍고 멀수록 얇은 것이 솥 안의 쌀에 온도가 일정하게 전달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무쇠솥밥에는 솥에서 우러나온 철분 성분이 함유돼 빈혈을 예방해주는 효과가 있는 등 조상들의 지혜가 가득하다.
압력솥이 똑똑해졌다 예부터 밥을 잘 짓기로 천하에 이름이 났었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금도 딸 시집보내는 친정어머니가 가장 신경 써서 고르는 혼수품 중 하나가 ‘밥솥’이다. 매끼니 반찬은 둘째 치고 밥 하나만 제대로 맛있게 지어내면 일단 합격점을 받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네 입맛은 유독 밥맛에 깐깐하고 민감하다. 지난 호 <행복> 독자엽서에서 ‘밥을 지을 때 무슨 솥을 이용하는가’라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결과는 전기 압력밥솥(50.3%), 일반 압력밥솥(29%), 일반 전기밥솥(14.8), 기타(5.9%) 순이었다. 역시나 빠르고 간편해야 하는 세상, 버튼 하나만 누르면 척척 밥을 지어내는 전기 압력밥솥이 압도적인 점유율을 보였다. 하긴 요즘 텔레비전 광고를 보면, 전기 압력밥솥 하나면 안 되는 음식이 없고, 심지어 메뉴 업데이트를 위해 압력밥솥을 인터넷에 연결해 공부까지 시킨다. 쿠쿠홈시스의 신제품 ‘일품석’은 국내 최고급 천연석 곱돌로 내솥을 만들어 돌솥에 밥을 지었을 때처럼 영양소 파괴를 최소화하며 누룽지까지 만들고 구수한 숭늉도 맛볼 수 있다. 또 곡물의 재료에 따라 밥 짓기 기능을 달리해 80가지 맞춤 밥맛을 제공한다. 웅진쿠첸의 크리스털 서라운드 IH 압력밥솥은 황동 내솥의 바닥부터 상단까지 한 번에 일률적으로 가열해 쌀알이 한 알 한 알 편차 없이 골고루 익게 함으로써 가마솥 밥맛을 구현한다. 무엇보다 취사 시간이 국내 최단 시간인 11분(백미 2인분 기준)에 가능하다.
일반 솥에 비해 간편하고 빠른 압력솥 역시 주부들의 필수 아이템. 열전도율이 높은 스테인리스로 두껍게 만든데다 뚜껑과 본체가 완벽하게 밀착돼 내부 압력을 높임으로써 잘 익지 않는 음식을 단시간에 익혀준다. 압력솥 브랜드로는 오래도록 주부들로부터 검증받아온 휘슬러 압력솥이 강세다. 밥을 지으려는 곡물의 종류에 따라 압력을 3단계로 조절할 수 있는데, 압력계기를 돌려서 화살표 부위를 뚜껑의 Ⅰ, Ⅱ, Ⅲ 표시 중 원하는 위치에 맞추면 압력계기가 설정한 단계만큼 올라간다. Ⅰ단(108℃)은 죽이나 채소, Ⅱ단(115℃)은 백미밥, Ⅲ단(118℃)은 현미밥과 잡곡밥을 지을 때 알맞다.
밥 짓는 게 즐거운 미니 밥솥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 밥맛이 최고라고 한 곱돌솥은 열을 받으면 미네랄 성분과 원적외선을 방출해 영양소 파괴를 최소화하고 음식을 골고루 속까지 익혀준다. 곱돌솥에 씻은 쌀을 넣고 대추, 잣, 밤, 은행 등을 올리면 맛있는 영양돌솥밥이 완성된다. 은은한 금빛 광택이 도는 고급스러운 유기솥은 옛 솥의 모양을 그대로 살려 불에 직접 올려 조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가마솥처럼 차진 밥을 할 수 있는 전통 놋솥으로, 유기의 특성상 보온보냉 효과가 좋아 음식의 제 맛을 살려주며 살균 기능도 뛰어나다.
보석으로도 밥솥을 만든다. 원적외선과 음이온을 방출하는 건강 보석인 수정은 열을 가하면 원적외선 방출량이 90% 이상 급증한다. 수정에서 나오는 원적외선은 산성 체질을 약알칼리성 체질로 개선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수정 밥솥은 밥이 익어가는 과정을 눈으로 볼 수 있어 새로울 뿐 아니라 솥에 밥알이 달라붙지 않아 사용 후에 설거지가 손쉽다. 또 숨쉬는 그릇, 옹기솥에 밥을 하면 일반 솥보다 훨씬 더 고슬고슬하고 고소하다. 흙과 전통 잿물이 만들어낸 미세한 숨구멍은 옹기의 특징. 처음에는 이 숨구멍으로 물이 약간 샐 수 있으니, 반드시 쌀뜨물로 한 번 끓인 후에 사용해야 쌀뜨물이 옹기 표면에 막을 형성해 새지 않는다. 또 내열 도자기솥에 밥을 지으면 질감이 부드러워 소화가 잘되고 뱃속이 편하다. 시중에는 맛과 건강을 고려한 밥솥들이 다양하게 나와 있다. 2~3인용 소형 솥들은 모양이 너무 앙증맞아 먹지 않을 밥이라도 괜시리 지어보고 싶을 정도다. 밥 맛있게 지어주는 작은 솥 하나가 아침식사 준비를 더욱 즐겁게 할지도 모를 일이다.
1 방짜유기 부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77호인 이봉주 씨가 만든 작은 유기솥. 아래 놓인 것은 4인용, 위에 놓인 것은 2인용. 납청유기공방 제품.
2 도자기 작가 이윤신이 빚은 세련된 내열 도자기솥. 이도 제품.
3 외형은 스테인리스로, 솥 바닥은 주물로 만들어진 후끄리끄 주물 솥. 나무 손잡이와 냄비 받침이 앙증맞다. 아즐가교역 제품.
4 원적외선을 발산하고 열전도율이 높은 장수 곱돌로 만든 2인 돌솥. 영신스톤 제품.
5 일일이 손으로 천연유약을 발라 1200℃에서 구워낸 옹기솥. 빛깔이 곱고 쇳소리가 날 만큼 단단하다. 징광옹기 제품.
6 수정 원석으로 만든 밥솥. 솥에 밥알이 달라붙지 않아 세척이 쉽고, 수정에서 방출되는 원적외선과 음이온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솥의 내부가 들여다보여 밥 짓는 과정을 볼 수 있어 새롭다. 수정촌 제품.
7 전통 무쇠솥의 밥맛을 그대로 살려주는 미니 무쇠솥. 누룽지 만들어 숭늉 끓여 먹는 데는 최고다. 삼화금속 제품
8 붉은 컬러가 예쁜 소형 슐테우퍼 주물 냄비. 쿠첸프로피 제품.
9, 10 열전도율이 높고 열분배가 균일해 밥알이 고르게 익는 주물 냄비. 표면이 부드러워 세척이 쉽고 유리처럼 위생적이고 건강에 좋다. 컬러 에나멜 코팅은 오래 사용해도 변형이 없다. 르쿠르제 제품.
11 현미, 잡곡, 백미 등 곡물의 종류에 따라 압력계기를 3단으로 선택조절해 간편하고 빠르게 밥을 지을 수 있는 스테인리스 스틸 압력밥솥. 휘슬러 제품.
밥맛 은 솥맛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