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보약 필요 없는 아침밥 한 그릇 아키바레를 기억하며
밥은 공기에 푸는 법이 없이 늘 주발에 주발 뚜껑을 덮어 들여왔고, 국과 나물, 생선이나 두부 같은 반찬이 곁들여졌으며, 밥을 다 먹으면 으레 뭉근하게 끓인 눌은밥이 들어왔다.

어릴 적, 가끔 아침밥을 안 먹고 학교에 왔다는 아이들을 볼 때에 그 자유스러움이 꽤나 부러웠던 기억이 있다. 나는 아침밥을 거르고 다닐 자유가 없었다. 우리 집은 한옥에 대가족이 함께 사는, 요즘 일일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그런 집이었고, 게다가 아버지는 정확한 시간에 움직이는 분이셨다. 아침이면 (엄마가 아닌) 아버지가 정확한 시간에 아이들을 깨웠고, 부스스한 얼굴로 세수를 하고 교복까지 입고 나면 바로 그 시각에 밥상이 들어왔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일찍 학교에 가야 하는 중고생 아이들의 밥상이다. 밥은 공기에 푸는 법이 없이 늘 주발에 주발 뚜껑을 덮어 들여왔고, 국과 나물, 생선이나 두부 같은 반찬이 곁들여졌으며, 밥을 다 먹으면 으레 뭉근하게 끓인 눌은밥이 들어왔다. 이는 너무도 정확하게 매일 아침 이루어지는 일이라, 밥 맛 없다고 밥을 안 먹고 문 밖을 나서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식민지 경험에다 전쟁까지 겪으며 밥에 포한이 진 세대여서 그랬을까. 아니면 밥 말고는 군주전부리 거리가 별로 없어서 그랬을까. 우리 부모 세대의 밥 집착은 참으로 집요했다. 사람은 밥 힘으로 사는 것이라고 굳게 굳게 믿은 세대였다. 빵으로 한 끼를 때우는 것은 몰상식한 짓이었고, 어쩌다 별식으로 국수를 해먹더라도 끝은 꼭 밥으로 마무리를 해야 했다.

그러니 그 쌀이란 게 얼마나 중요했을까. 내 기억에 엄마는 언제나 아키바레 쌀을 고집했던 것 같다. 그때는 정부미와 일반미라는 게 나뉘어 있었다. 정부에서 양곡 관리를 하면서 저렴한 쌀값을 유지하던 때이다. (말이 좋아 ‘저렴한 쌀값’이지 사실 이 정책을 수십 년 유지하는 바람에 농촌은 완전히 몰락했다.) 쌀의 자급자족이 안 되던 때라, 수확이 많은 품종을 개량하는 것이 큰 숙제였고, 그 결과 ‘통일벼’라는 것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이 쌀은 푸석푸석하고 맛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정부가 수매하여 정부미로 파는 쌀이 되어버렸다. 그에 비해 일본 품종인 아키바레는 찰기 있고 기름기가 자르르 흘러 맛있었지만 일반미로 값이 비쌌다. 아버지의 말단 공무원 월급으로 여덟 식구 살기가 힘든 집이었지만 쌀은 꼭 아키바레였다. 밥 힘으로 하루 버티는 건데, 밥을 아무렇게나 먹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쌀에 집착하는 국민을 상대로 정부는 무지막지한 정책을 많이도 구사했다. 혼분식이 몸에 좋다고 신문과 방송을 통해 귀가 따갑도록 홍보를 해댔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정말 그런지는 참으로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잡곡밥은 몸에 좋겠지만, 하얀 수입 밀가루로 만든 빵이 쌀밥에 비해 뭐 그리 몸에 좋겠는가 말이다. 그런데도 쌀의 자급자족을 목표로 ‘중단 없는 전진’을 하던 정부는, 아예 학생들의 도시락 검사를 일상화했다. 잡곡 30%나 분식이 아니면 교사가 학생을 나무라야 하고, 수요일과 토요일 점심은 밀가루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지정하기까지 했다. 정부가 국민의 밥상을 검사하는 이 희한한 정책으로 우리는 매일 선생님 앞에서 도시락 뚜껑을 열어야 했다. 김치와 어묵볶음밖에는 싸가지고 오지 못하는 아이들은 늘 주눅이 들었고, 1교시부터 교실에는 반찬 냄새가 진동했다.

소녀 시절 나는 새벽마다 밥과 국에 생선을 굽고 나물을 무치는 엄마와 구질구질하게스리 아침마다 밥 가지고 난리 치는 선생님을 보면서, 빵과 우유, 혹은 주스 한 잔으로 아침을 간편하게 때우고 샌드위치를 싸가지고 다니는 세련된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웬걸! 나도 아침마다 새로 밥을 해서 먹고 눌은밥까지 해서 먹는다. 아침에 주스나 커피를 먹으면 속이 쓰리고 우유도 편치 않다. 빵을 먹어보기도 했는데 10시 30분이 지나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아무래도 빵은 양을 충분하게 먹을 수 없는 모양이다.

무엇보다도 눌은밥에 숭늉이 없으면 허전하다. 그러니 나는 압력밥솥도 쓰지 않고 앙증맞은 작은 무쇠솥을 사다가 거기에 밥을 한다. 밤에 씻어 불려놓은 쌀을 센 불에 얹어 가열하다가, 끓으면 중간 불로 줄이고, 마지막에는 약한 불로 뜸을 들인다. 어차피 그 시간에는 반찬을 놓고 생선을 굽느라 부엌에서 왔다갔다 하니 그리 힘들 것도 없다. 물론 나도 때로는 국수나 빵, 혹은 떡볶이 같은 다른 곡기로 한 끼를 때우기도 한다. 술자리에서는 밥을 안 먹고 고기나 야채들로 배를 채워도 그리 허전하지 않다. 밥 못 먹어 포한이 진 세대가 아니라서 그런 모양이다. 없으면 더 그리운 법이다. 누군가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에 갔더니, 평소에는 잘 먹지도 않던 밥과 김치를 어찌나 밝히는지 그것을 구해대느라고 혼났다는 것이다. 마치 밥과 김치 먹으러 미국 온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건 교포들을 만나봐도 그렇다. 1960~70년대에 미국이나 유럽에 가서 정착한 교포들은 참 밥을 많이 먹는다. 작은 공기에 담아주면 밥 더 달라고 한다. 그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놀라는 것은, 한국 사람들이 밥을 정말 조금 먹는다는 것이란다. 그네들은, 우리가 1960년대 그랬듯이, 반찬보다 밥을 많이 먹는 식습관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밥은 끼니이자 그리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30년이 지나 지금의 아이들이 중년이 되면 좀 달라질까? 글쎄, 잘 모르겠다. 아무리 햄버거와 스파게티를 좋아하는 요즘 아이들이라지만, 그 못지않게 청소년들이 잘 가는 음식점에는 비빔밥과 매운 떡볶이 메뉴가 빠지질 않는 것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의외로 입맛은 완고하다.



이영미의 미각을 사로잡은 밥맛이 ‘기막힌’ 음식점
인사동 부산식당 요즘 세상에 돌솥밥집도 아닌데 금방 한 밥을 내주는 데가 있을까 싶지만, 이곳은 그 원칙을 고수하는 희한한 집이다. 인사동에는 비싸고 품격 있는 집들이 많긴 하지만 그 동네에 상주하긴 하면서도 돈은 없는 불쌍한 예술인들은 막상 갈 곳이 몇 군데 없다. 부산식당은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값싸고 맛있는 집이다. 메뉴는 된장찌개, 삼치구이, 두부부침 등 몇 종류인데, 어느 것이든 주문 받는 즉시 밥을 안쳐 새로 지어준다. 그러다 보니 밥이 나오려면 시간이 꽤 걸리는데, 빨리 안 주느냐고 보채면 무서운 주인 아저씨가 막 화를 내신다. 한참 기다려 나오는 밥은 정말 새로 지은 부드러운 밥인데, 검은 콩도 몇 알 올려져 있다. 사람들은 이 집 밥을 먹으며, ‘이게 얼마 만에 먹는 갓 지은 밥이냐’며 입을 모은다. 그래서 이 집은 늘 북적북적 사람이 끓는다. 인사동 쌈지길 건너편 골목. 02-733-5761

삼청동 부영 도가니탕 금방 지은 밥은 아니지만, 밥이 인상적이었던 집은 삼청동의 ‘부영 도가니탕’이다. 역시 맛있는 집답게 허름하고 작은데 한자리에서 오래오래 음식 장사를 한 관록이 느껴진다. 메뉴는 도가니탕과 수육 단 두 가지뿐. 하긴 탕 고아 파는 집에서 다른 메뉴가 무엇이 필요하랴. 반찬도 깍두기와 마늘이나 양파, 고추장이 전부이다. 그런데 주인 할머니가 밥을 내어주는데, 가게 한귀퉁이에 있는 온돌의 아랫목 담요 밑에서 뚜껑 덮인 작은 주발을 꺼내주는 게 아닌가. 금방 한 밥은 아닌데, 보온밥통에서 켜켜이 쌓여 오래 눌려 있던 밥이 아니라, 엄마가 아랫목에서 꺼내주던 그 밥맛이다. 그러고 보니 탕도 예스러운 맛이다. 주인 할머니는, 이제 그만두고 싶어도 단골들 때문에 그만둘 수가 없단다. 경복궁에서 삼청터널로 가다가 감사원 방향으로 우회전 후 50여 미터. 02-730-9440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6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