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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너 셰프의 맛있는 이야기 박찬일 셰프의 내가 사랑하는 조리법 매리네이드
매리네이드는 한식 조리법 중에 ‘절임’과 비슷합니다. 요즘에는 고기나 생선, 채소 등을 재워두는 액상 양념으로, 육질을 부드럽게 하거나 맛이 배게 하는 데 쓰입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맛보다는 부패를 방지하고 보관 기간을 늘리는 것이 우선이었지요. ‘미식’의 기본은 좋은 재료에서 시작하고, 본연의 맛과 향을 살리는 것을 최고로 치지만 색다른 맛을 즐기고 싶다면 매리네이드로 풍미를 더하세요.

매리네이드의 전성시대는 아마 지금으로서는 끝난 듯합니다. 1970년대 프랑스의 고전 요리에 반발하여 비롯된 누벨 퀴진 Nouvelle Cuisine(‘새로운 요리’라는 뜻으로, 좀 더 신선하고 단순하며 세련된 방식의 요리법과 서빙)이 고급 식탁을 휩쓸기 시작할 무렵부터 조짐은 이미 있었습니다. 재료에 향신료를 더해 매리네이드하면 아무래도 본래의 신선한 기운이 줄어듭니다. 그 대신 복합적이고 미묘한 맛을 내게 되지요. 양념 때문에 본질적인 맛의 변화가 생기기도 합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전통적’인 맛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되었지요. 전통을 고루한 것으로 치부하기도 하며 새로운 요리에 열광하던 시기였으니 전통 조리법인 매리네이드도 ‘미식’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자, 그러면 매리네이드 전성시대의 고기 한 토막과 현대의 그것이 어떻게 요리되는지 살펴보면 그 차이가 극명할 것입니다.

먼저 매리네이드를 옹호하던 시기, 그러니까 2백 년 전쯤 ‘운명의’ 쇠고기 한 토막이 있었습니다. 소가 도축되어 로베르 씨네 부엌까지 운 좋게 한 토막이 들어왔다고 칩시다. 이왕 타지 생활을 하는 아들이 얼마 후 집으로 돌아올 거라고 설정도 하지요. 하지만 로베르 씨네는 물론이고 이 시대에는 당연히 냉장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고기는 이미 세균에 오염되어 있고, 무더위가 한풀 꺾인 늦은 여름이라도 부패가 시작됐겠지요. 로베르 씨 부인은 서둘러 소금으로 고기를 문지르고 병에 들어 있는 산화된 와인을 고기에 붓습니다. 올리브유도 조금 붓지요. 마른 허브 가루가 있는지 살펴본 후 로즈메리와 타라곤, 월계수 잎으로 고기를 덮습니다. 그런 다음 도기로 만든 그릇에 넣어 그나마 시원한 지하 식품저장고에 고기를 보관합니다. 이것으로 로베르 씨네는 적어도 일주일 후에 돌아올 아들에게 쇠고기 요리를 해줄 수 있게 되었지요.

시간이 흘러 현대에 이르렀습니다. 로베르 가문은 여전히 쇠고기 요리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로베르 씨는 그다지 매리네이드를 즐기지 않습니다. 우선 선명하고 가지런하게 박힌 마블링이 최고로 잘 조성된 고급 쇠고기를 언제든지 구할 수 있으니까요.

숙성할 필요도 없이, 사와서 곧바로 썰면 입에서 살살 녹는 육질이 일품입니다. 미리 고기를 사오더라도 걱정 없습니다. 산 지 10년은 족히 된 냉장고지만 냉장실에 넣어두면 보름 이상 문제없이 신선한 상태를 유지할 테니까요. 더구나 로베르 씨는 고기에서 시큼한 식초 맛이 난다거나 고기 본연의 맛과 향 대신 허브 향으로 뒤덮인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위적으로 육질을 부드럽게 만든 것도 별로입니다. 과거와 달리 현대의 쇠고기는 양념 없이 그냥 구워 먹을 때 최고의 맛을 내도록 지난 수십 년 동안 개량했으니까요. 여름에 풀이 넘쳐나도 고기 특유의 누린내를 없애기 위해 곡물로만 비육한 쇠고기인 까닭입니다. 요즘은 로베르 씨처럼 쇠고기를 팬에 구워 소금만 살짝 찍어 먹어야 ‘고기 좀 먹는다’는 소리를 들으니 매리네이드는 한물간 스타 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 해도 여전히 매리네이드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단 매리네이드를 하면, 고기는 부드러워집니다. 누린내도 없앨 수 있고, 무엇보다 오래 보존할 수 있습니다. 매리네이드를 더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은 ‘제3의 맛’을 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더 싼 재료로 고급 맛을 낼 수 있는 비결인 듯합니다. 실제로 여러분은 레스토랑에서 먹는 양갈비가 왜 그리 커다란지 한 번쯤 의심해본 적 없으신가요. 분명히 메뉴판에는 ‘생후 3개월 미만의 어린’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커다란 양갈비에 어울리지 않게 맛도 야들야들합니다. 여기서 매리네이드의 비밀을 풀어보지요. 양갈비의 정육 부분은 지방이 적어서 양이 성장하면 부드럽지 않습니다. 이때 매리네이드를 해서 부드럽게 하고 풍미도 더할 수 있습니다. 소금과 후추, 와인, 올리브유, 허브에 재운 양갈비는 48시간 이상이 지나면 양고기 특유의 누린내가 사라지고, 훨씬 부드러워집니다. 여러분이 ‘생후 3개월의 빅 사이즈 양갈비’라는 비논리적 음식을 먹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건 슈퍼 복제 양이 아니라 그저 요리사가 매리네이드라는 그리스 시대 이후의 오래된 요리법을 충실하게 이용한 결과물일 뿐이지요.

생선과 채소도 매리네이드로 많이 즐겨왔지만 모두 같은 향신료를 쓰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고기에는 와인과 로즈메리 같은 향이 강한 재료와 소금이 들어가고, 생선에는 향이 연한 마조람과 바질, 타라곤, 레몬즙, 소금이 쓰입니다. 채소도 매리네이드해서 맛을 최대로 끌어낼 수 있지요. 보통 올리브 매리네이드의 변형으로 구운 가지와 파프리카, 마늘, 양파, 버섯 따위를 레몬즙이나 발사믹 식초, 향이 좋은 올리브유로 절입니다. 이렇게 하면 전채로도 먹기 좋고, 고기에 곁들임 요리로 낼 수도 있지요. 좋은 재료는 별다른 양념 없이 본연의 맛으로도 훌륭하지만 간혹 매리네이드가 더하는 미묘한 맛도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글을 쓴 박찬일 씨는 홍대 앞에 있는 이탤리언 레스토랑 ‘라 꼼마La Comma’의 셰프입니다. 식재료에 관해서는 깐깐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요리사지요. 대학에서 소설을 전공한 뒤 잡지 기자로 활동하던 중 돌연 이탈리아 피에몬테에 있는 요리 학교 ICIF로 떠난 그는 2002년 귀국해 주관대로 맛있고 정성이 듬뿍 담긴 음식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습니다. 틈틈이 <보통날의 파스타>,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와인 스캔들> 등을 펴내 글쓰는 요리사로도 알려져 있지요. 기본을 중시하는 그답게 메뉴와 조리법에 대해 손에 잡힐 듯한 설명을 들려주었습니다. 박찬일 셰프의 흥미진진하고 맛깔난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세요.
글와 요리 박찬일 사진 김용일 기자 담당 신민주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