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노영희의 철든 부엌] 가을걷이와 갈무리
나무 이파리가 슬슬 물들고 풀들이 누렇게 변해가면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한로寒露 즈음입니다. 곡식과 채소 말리기 좋은 햇살과 바람이 부는 때로 이슬이 찬 공기를 만나 서리가 내리는 상강霜降이 오기 전에 오곡백과를 거둬들이고 한숨 돌릴 틈도 없이 갈무리를 시작하지요. 햇살과 바람에 말려 하나하나 갈무리해두면 햇볕의 기운을 받아 겨울철 영양 반찬으로 이만 한 것이 없으니까요.

들과 산에 먹을거리가 넉넉한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추수철이 다가오니 1년 농사를 거두어들이는 가을걷이와 겨울을 준비하는 갈무리로 농사짓는 일손이 가장 분주한 때다. 그나마 요즘은 콤바인 기계로 벼를 수확하고 탈곡까지 한 번에 해결하지만, 어릴 적에는 낫을 손에 든 어른들이 들판에 누렇게 익은 벼들을 차례로 베고 털며 벼 타작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가을걷이의 기본이 되는 벼 베기는 10월이 되면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어른들이 논에서 가을걷이를 하면 아이들도 산에서 가을걷이에 나섰다. 밤과 대추가 그것이다. 들일하러 가자 하면 우물쭈물하던 아이도 산에 밤 주우러 가자 하면 앞장서곤 했다. 그 시절에는 밤 줍기도 제법 재미있는 놀이였다. 알밤을 꺼내느라 밤송이를 양발로 짓이기거나 나무 작대기로 벌리다 밤송이에 찔려도 마냥 웃음이 났다. 맨손으로 산에 올라가도 한 알 한 알 주워 담다 보면 주머니 가득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으니 이만한 횡재도 없었다. 밤을 주워오면 어머니는 맹물에 잠깐 담가 위로 뜨는 것은 건져 버리셨다. 신기하게도 이런 것은 벌레 먹은 밤이기 십상이었다. 잘 영근 밤은 속껍질까지 말끔히 까서 씨를 뺀 대추와 함께 햅쌀에 넣어 밥을 지어주셨는데, 고소한 밤 맛과 달곰삼삼한 대추 맛이 어우러져 밑반찬이 변변찮아도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곤 했다. 보기에도 맛난 것이 약밥이 따로 없어 지금도 가을걷이할 즈음이면 영양식으로 즐겨 먹는다.

논에서 시작해 산에서 즐기던 가을걷이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은 밭이다. 봄부터 밭을 만들어 씨를 뿌리고 솎고 김매고 잔손질하면서 벌레와 병을 이겨내고 지루한 장마에도 꿋꿋이 견딘 작물이 결실을 맺는 곳이기 때문이다. 밭에서 하는 추수는 무엇보다 시기를 잘 맞춰야 한다. 10월은 채소를 말리기 좋은 때이기도 하지만, 상강이 가까워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 호박, 고추 등 여름 채소는 금세 시드는 데다 저녁 해가 순식간에 떨어지니 어느 때보다 일손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농사하는 이들이 1년 중 가장 바쁜 때로 꼽는 이유다. 한편 이때를 1년 중 가장 뿌듯한 시기로 꼽기도 하는데, 가을걷이의 계절이면서 겨울을 준비하는 갈무리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도 거두어들이는 대로 갈무리하느라 누구보다도 어머니와 할머니가 가장 분주하셨다. 가지는 단단한 것을 따서 열십자로 길게 쪼개 처마 안쪽 볕이 잘 드는 곳에 빨랫줄을 걸고 주르르 널어 말렸다. 가지가 다 마를 즈음, 빨랫줄은 늙은 호박 차지였는데 껍질을 벗겨 나선형으로 길게 깎아 말렸다. 그 옆에는 단단한 것으로 골라 껍질을 깎은 감을 주렁주렁 매달아 곶감까지 말렸으니, 처마 밑은 가을 갈무리의 건조장인 셈이다. 그 덕분에 이 맘때 마당은 1년 중 가장 풍성하고 화려했는데, 장독대 위 채반에 말리던 애호박과 고구마 줄기, 토란대도 한몫했다.

늙은 호박이 슬슬 익어갈 즈음이면 애호박을 따서 모양대로 동그랗게 썰어 채반에 얹은 것을 장독대에 올려 말렸는데, 애호박은 잘 말리기가 까다로웠다. 씨가 적은 어린 것으로 골라 사나흘 날씨가 맑고 찬 바람이 살살 불 때 앞뒤로 잘 말려야 하얗게 잘 말라 먹음직스러웠다. 나물도 만들고 육개장에도 넣어 먹던 만능 식재료인 고구마 줄기와 토란대는 살짝 데쳐 말렸는데, 먹을 때는 말린 것을 다시 물에 불려 껍질을 벗겨낸다. 누렇게 색이 들기 시작한 깻잎은 따서 소금물에 절여 삭혔다가 된장에도 박고 켜켜로 양념해 항아리에 넣어 꼭꼭 눌러 담가놓으면 겨우내 훌륭한 밑반찬이 됐다. 첫서리가 내리면 고추나무를 뽑기 때문에 그 전에 작은 고추며 고춧잎도 따서 고추는 소금물에 삭히고, 고춧잎은 데쳐 말렸다가 나물로도 먹고 무말랭이장아찌를 만들 때도 넣어 먹곤 했다.

갈무리는 마냥 말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채반에 얹은 것은 일일이 뒤집어주고 빨랫줄에 넌 것도 수시로 살펴야 해서 한눈을 팔 수도 없다. 이렇게 갈무리한 것으로 나물은 물론, 떡도 쪄 먹었고, 요즘에는 떡볶이와 생선조림에도 넣는다. 평범한 식재료도 갈무리한 채소를 곁들이면 왠지 입에서 살살 녹는다. 말린 나물에는 햇볕의 기운으로 비타민 D가 더해진다니 겨울 제철 채소는 말린 나물이라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닌 듯하다. 올 가을엔 가을걷이한 것들을 열심히 갈무리해 마당을 알록달록하게 채울 생각이다. 갈무리는 선인들이 몸소 익힌 생활 속 지혜이니 손이 많이 가더라도 시도해볼 만하지 않을까.

영양밥
재료(4인분)
쌀 2컵, 은행 12알, 밤·대추 8개씩, 표고버섯 4장
양념장 진간장 3큰술, 채 썬 쪽파 4뿌리분, 다진 홍고추 1개분, 참기름 1큰술, 통깨 1/2큰술
만들기 1 쌀은 씻은 후 체에 밭쳐 30분 정도 불린다.
2 은행은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삶은 후 껍질을 벗긴다.
3 밤은 속껍질까지 벗겨낸 후 씻어서 반 자르고, 대추는 씻은 후 돌려 깎아 씨는 빼내고 과육만 6등분한다.
4 표고버섯은 씻어서 기둥을 잘라낸 뒤 4등분한다.
5 밥솥에 불린 쌀을 넣고 밤을 얹은 뒤 물을 붓고 중간 불에 올린다. 우르르 끓으면 은행, 대추, 표고버섯을 고루 섞어 넣고 끓이다가 불을 줄여서 뜸을 들인다.
6 분량의 재료를 모두 섞어 양념장을 만든 뒤 영양밥에 곁들인다.


갈치말린채소조림
재료
갈치(큰 것) 1마리, 무 200g, 말린 가지 4개, 말린 애호박 40g, 대파 1대, 청양고추 1개, 고운 소금 1작은술, 물 적당량
갈치 밑간 청주 1/2큰술, 저민 생강 2톨분, 참기름·고운 소금 1/4작은술씩, 후춧가루 약간
조림장 진간장 5큰술, 다진 마늘·다진 파·고춧가루·설탕·맛술 2큰술씩, 청주·참기름 1큰술씩, 다진 생강 2작은술, 후춧가루 1/3작은술
다시마 국물(3컵분) 다시마 가로세로 10cm, 물 3컵
만들기 1 갈치는 칼로 비늘을 긁어내고 머리를 자른 뒤 내장을 빼내고 적당한 크기로 토막 낸다. 갈치 표면의 은색 물질은 비늘이 아닌 구아닌이라는 유기 염료인데, 복통과 두드러기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잘 걷어내고 먹어야 한다.
2 손질한 갈치는 물에 한 번 씻어 종이 타월로 물기를 없앤 뒤 재료를 모두 넣고 밑간해 10분 정도 둔다.
3 물 3컵에 다시마를 담가놓아 다시마 국물을 우린다.
4 무는 1cm 두께의 반달 모양으로 썬다. 냄비에 무를 넣고 잠길 만큼 물을 붓고 소금을 넣어 삶는다. 이때 무는 꼬치로 찔러 약간 덜 익은 정도가 적당하다. 그래야 나중에 갈치를 조릴 때 부서지지 않는다.
5 대파와 청양고추는 어슷 썬다. 이때 고추는 물에 헹궈 반을 갈라 씨를 털어낸다.
6 볼에 분량의 재료를 모두 섞어 조림장을 만든다.
7 냄비 바닥에 ④의 무와 말린 가지, 말린 애호박을 고루 깔고 갈치를 얹은 뒤 ⑥의 조림장을 끼얹은 다음 ⑤의 대파와 청양고추를 올린다. 조림장 볼에 ③의 다시마 국물을 부어 부셔 넣고 갈치가 익을 때까지 조린다.

호박편
재료
(지름 20cm 틀 1개분) 멥쌀가루 31/2컵, 찹쌀가루 1/2컵, 늙은 호박 80g, 꿀 1/4컵, 고운 소금 약간
떡고물 늙은 호박 100g, 쌀가루 1큰술, 설탕 1/2큰술, 소금 약간
만들기 1 늙은 호박 80g은 씨와 껍질을 제거한 후 얇게 썰어 찜통에 찐 다음 체에 내려 곱게 으깬다. 호박에 수분이 많을 때는 마른 팬에 볶아 물기를 날린다.
2 떡고물용의 늙은 호박 100g은 얇게 썰어 설탕과 소금을 뿌려 재운다. 물기가 생기면 종이 타월로 살짝 걷어내고 쌀가루를 넣어 고루 버무린다.
3 멥쌀가루와 찹쌀가루를 섞은 후 ①의 으깬 호박과 꿀을 넣고 양손으로 비벼 고루 섞은 다음 체에 내려 가루를 곱게 만든다.
4 찜통에 젖은 면포를 깔고 ③의 쌀가루 2컵을 평평하게 편다. 그 위에 ②의 호박 고물을 가지런히 얹고 나머지 분량의 쌀가루를 부어 평평하게 편 뒤 김이 오른 찜통에서 30분 정도 찐다.
5 ④를 꼬치로 찔러 반죽이 묻어나지 않으면 다 익은 것. 찜통이 뜨거울 때 접시 윗면이 아래로 가도록 덮은 뒤 뒤집어서 호박편을 꺼낸 다음 면포를 떼어낸다.


요리 노영희(스튜디오 푸디)

행 신민주 기자 사진 김용일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