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더워야 제맛이다. 하지만 몸이 허하면 무더위에 지치고 건강을 상하기가 쉬워 선조들은 삼복더위에 영양식을 먹으며 여름날 준비를 했다. 7월 중순에 시작되는 초복부터 중복, 말복까지 꼬박 한 달을, 말 그대로 복더위 속에서 살아야 하니 복날만이라도 기름진 고단백 음식을 먹으면서 체력 관리를 하려는 것이다. 이른바 보양식으로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은 삼계탕이다. 어린 닭의 배 속에 찹쌀과 마늘, 대추, 인삼을 넣고 물을 부어 오래 끓여 만드는데, 원래는 병아리보다 조금 큰 연계 軟鷄(영계라고도 함)를 백숙으로 푹 곤 것을 ‘영계백숙’이라 하였다. 여기에 인삼을 넣어 계삼탕이라고 하다가 지금은 삼계탕으로 굳어졌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집에 어른이 계셨던 터라 늘 마른 삼이 준비되어 있어 지금 같은 수삼이 아니라 마른 삼을 넣고 푹 끓인 영계백숙을 즐겼다. 햇마늘이 나기 시작할 때이니 마늘도 듬뿍 넣고 말이다. 요즘은 만드는 데 워낙 시간이 많이 걸리다 보니 재료를 푸짐하게 넣어 통조림이나 레토르트 형태로 포장, 판매하는 곳도 많다. 그만큼 보양 음식의 최고로 손꼽히며 대중화되었지만 사실 <경도잡지> <열양세시기> <동국세시기> 등 조선 후기의 세시 풍속을 기록한 책을 살펴보면 삼계탕이나 계삼탕이라는 음식은 없다. 조선시대 닭은 달걀을 얻기 위해 집에서 키우는 귀중한 가금류였다. 서민들은 닭 우는 소리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고 온종일 이곳저곳에서 노닐던 닭이 해 질 무렵 닭장으로 들어가야 저녁을 먹고 일과를 정리했다. 닭을 잘 키워 알만 잘 거둬도 먹고사는데 큰 걱정이 없었다. 그래서 사위가 와야 달걀을 낳는 씨암탉을 잡는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닭을 주재료로 쓴 닭국은 방신영이 1917년에 쓴 <조선요리제법>에서야 비로소 등장하고, 이용기가 1924년에 펴낸 조리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닭국과 영 계백숙의 두 가지 닭고기 조리법이 적혀 있다. 이즈음 양계가 권장 되어 닭고기 소비가 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 시기의 백숙도 지금과는 달리 별 양념 없이 물에 익혀낸, 말 그대로 ‘백숙 白熟’이다. 1950년대 중반 이후에야 삼 가루를 넣어 만든 닭국인 계삼탕이 등장했는데, 계삼탕이 삼계탕으로 바뀐 것도 닭고기보다 인삼을 강조한 대중음식점의 전략 때문이다. 이렇듯 삼계탕이 우리의 전통 음식이 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문헌에 나오는 닭고기 음식은 대부분 중탕한 닭찜이 많았는데, 예전에는 살림이 넉넉지 않아 닭 한 마리로 온 가족이 배불리 먹기 위해 솥에 물을 가득 넣고 삶으면 국물을 모두 먹을 수 있어 백숙을 자주 한 듯하다. 여기에 국물이 남으면 칼국수를 넣어 닭칼국수를 해 먹거나 찹쌀을 넣어 죽을 쑤어 먹기도 했다. 닭고기로 만드는 보양 음식이 삼계탕만 있는 것은 아니다. 궁중에서 먹던 뜨거운 닭국인 초교탕도 보양식으로 제격이다. 국물이 고소하고 닭고기 살을 잘게 찢어 아이나 노인에게는 삼계탕보다 먹기가 낫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펄펄 끓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우리네 식성이야 유별나기가 이를 데 없지만, 그렇다고 뜨거운 음식만 즐긴 것은 아니다.
닭고기를 삶아 차갑게 먹는 임자수탕과 초계탕도 복날 음식으로 즐겼다. 두 음식의 생김과 만드는 방식이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임자수탕은 영계를 푹 삶아 살은 잘게 찢고 국물은 기름기를 걷어내 차게 한 다음 흰깨와 잣을 볶은 뒤 여기에 닭 육수를 붓고 가는 반면, 초계탕은 닭 뼈로 국물을 낸 다음 차게 식혀 깨를 넣고 곱게 간다. 둘러 담는 재료도 임자수탕에는 쇠고기 완자가 올라가지만, 초계탕에는 전복과 표고버섯이 담긴다. 고소한 국물과 재료 하나하나에 들인 정성이 가득해 복날 보양식으로는 부족함이 없다. 이번 초복에 삼계탕이나 초교탕을 즐겼다면, 중복에는 임자수탕이나 초계탕을 즐겨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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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노영희(스튜디오 푸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