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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뭐 먹지?] 서울 생활 16년 차 프랑스인, 벤자민 주아노 씨 시골 밥상을 먹으면 한국 음식이 보인다
감자, 가지, 애호박, 오이, 풋고추, 상추, 쑥갓…. 금방 텃밭에서 거둔 신선한 재료로 차린 밥상이 건강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시골 할머니가 몇십 년 경력의 손맛으로 차린 소박한 밥상이 맛없을 리도 만무합니다.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건강에 좋고 화려한 맛을 지닌 음식은 할머니가 제철 재료로 촌스럽게 차린 시골 밥상이 아닐까요?
“어서 오세요. 잠시만 기다리시겠어요? 내일 비가 많이 온다고 해서 여길 좀 정리해야 합니다.” 도로에서 풀숲을 헤치고 한참을 들어가야 나오는 조그만 시골집. 뒤편에 있는 3평 남짓한 텃밭에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채소를 수확 중인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촌부다. 이틀 전 그가 운영하는 이태원의 프렌치 레스토랑 ‘르 생텍스 LeSaint-Ex’에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이제 다 됐어요. 먼 길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잠시 후 밀짚모자를 벗고 바지에 묻은 흙먼지를 훌훌 털며 또박또박 한국말로 인사하는 이 남자는 주한 프랑스인, 벤자민 주아노 Benjamin Joinau 씨다.
그에게 처음 관심이 간 건 아리랑 TV에서 방영된 <벤자민과 함께하는 맛있는 여행(Tasty Trail with Benjamin)>이란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난 뒤다. 한국 음식과 재래시장, 맛집 등을 탐방하는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그는 한국의 음식 문화와 맛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더불어 스스로를 ‘시골 밥상 예찬론자’라고 소개했다. “시골 밥상의 매력은 한국 음식 문화의 중심이 모두 담겨 있다는 점입니다. 한 상 차림, 김치와 나물, 장류부터 지역별 특성까지 모두 이야기할 수 있죠. 시골 밥상만 봐도 한국 음식에 대해 90% 이상 이해할 수 있어요. 저는 외국인 친구에게 한국 음식을 소개할 때면 비빔밥, 불고기 등의 단품 메뉴가 아닌 시골 밥상을 함께 먹습니다.”

1994년 서울에 있는 프랑스 학교의 교사 자격으로 내한한 그는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한국의 시골로 여행을 떠났다. 본래 여행을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아 친구들과 함께, 때로는 혼자서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다니는 일이 즐겁기만 했다. “아시다시피 16년 전만 해도 서울을 벗어나면 어디서나 시골 밥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주 접하게 되었고, 경험할수록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벽안의 외국인에게 처음부터 시골 밥상의 음식이 썩 맛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 음식을 좋아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한국의 많은 사람이 즐겨 먹는 음식이라면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함께 공감하고 싶었다. ‘이국적인’ 맛을 이해하는 것 또한 한국에서 얻을 수 있는 풍부한 경험 중 하나라 여긴 것이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나니 한
국에 대해 더 알고 싶어져, 프랑스로 돌아가는 계획을 미루게 되었다고. 그 후 홍익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
르치다 이태원에 프렌치 레스토랑을 오픈했다. 지금은 레스토랑 운영, 한국 문화 연구가, 한국 문화 소개 책자를 발행하는 출판사 운영 등으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렇게 한국에서 보낸 지 16년. 지금은 폭 삭은 홍어와 돼지고기, 묵은 김치를 함께 먹는 삼합이나 아주 맵게 양념한 무교동의 낙지볶음도 편안하게 즐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일부러 찾아 먹는 정도까진 아니지만.
“제가 시간을 두고 보는 걸 좋아해요. 인간도, 사회도, 음식도요. 한국 음식에 대한 제 개인의 역사가 16년 쌓인 지금, 한국 음식을 전혀 모를 때 먹던 맛과 익숙해진 지금 먹는 음식에 대한 느낌은 확연히 달라요. 지금은 이벤트 같은 자극적인 맛이 아닌 깊은 맛, 손맛, 맑은 맛이 좋아요. 한마디로 재료 자체의 맛에 관심이 가요. 매우 오만한 말이지만 미식가라는 사람들이 궁극에는 이 단계에 이른다고 하더군요. 제 고향 프랑스에서도 누벨 퀴진 운동이 점점 더 확산되고 있어요. 이것이 세계적인 추세인 듯합니다. 한국의 시골 밥상은 그런 점에서 매우 큰 장점을 지니고 있지요. 한국말로 ‘담백함’ ‘소박함’이라고 표현하던가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우리의 시골 밥상과 프랑스의 누벨 퀴진에서 닮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누벨 퀴진 nouvelle cuisine은 생크림이나 버터를 많이 넣어 농후한 소스를 만들고, 화려하게 꾸미며, 육류를 즐기는 요리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말 그대로 ‘새로운 방식의 요리’다. 가장 큰 특징은 식품의 자연스러운 풍미, 질감, 색감 등을 강조하며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많이 이용하고 조리 시간이 짧으며, 조금씩 담아낸다는 점이다.
“며칠 전에 전라남도 보성의 시골집에서 밥을 먹었어요. 밥상의 구성이 화려하지도 않고 독특한 재료도 없었는데 음식이 참 맛있었어요. 예를 들면 시금치나물인데 그게 정말 제대로 된 시금치나물 맛이었어요. 삶은 정도도 적당하고 마늘과 참기름이 과하지도 않고 간이 딱 맞더군요. 나머지 반찬도 마찬가지였어요. 더 뺄 것도, 더할 것도 없었습니다.” 소박함과 단순함이 제일 어렵다고 말하는 그는 시골 밥상 위에 놓인 음식이 맛있으려면 그 밥상을 차리는 이의 손맛이 중요하다는 점도 이해하고 있었다. “시골 밥상에 오르는 음식은 아주 어려운 레시피로 만들어야 하는 요리가 아니죠. 하지만 오랜 경험이 있어야만 낼 수 있는 맛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말을 지낼 시골집을 마련하고 텃밭에서 그가 먹을 채소를 직접 기르는 프랑스 남자. 틈틈이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는 그가 손맛의 중요함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아마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한국 음식의 깊은 맛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한국 사람보다 더 토속적인 입맛을 지니게 된 그가 시골 밥상에 오르는 반찬 중 첫손에 꼽은 메뉴는 장아찌였다. “장아찌는 매우 철학적인 의미가 담긴 음식입니다. 한국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인 장류를 활용하는 점, 항아리에 담아 숙성하는 과정 등이 의미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 지역에서 나는 제철 재료를 정성으로 직접 담근 간장, 고추장, 된장 등으로 양념해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는 장아찌는 진정한 슬로 푸드입니다. 또 지역별로 재배하는 채소의 종류와 집안의 장맛에 따라 아주 다양한 맛이 난다는 점도 매력적입니다.”

(오른쪽) 마늘과 양파 외에 모든 채소는 직접 키워 먹는다는 그가 경기도 양평에 있는 시골집에서 수확한 채소와 과일. 이 정도 양이면 일주일을 풍족하게 먹을 수 있다.

이화선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