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도 TV 방영물 중 <오늘의 부인들의 화제, 개량 부엌 만들기>가 있다. 그 내용은 아궁이에 불 지피며 밥을 짓던 재래식 부엌을 개량 부엌으로 만들기 위해 교도원 敎導員이 철수네 집을 방문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교도원은 개량 아궁이, 서서 일할 수 있는 조리대, 항아리에 수도꼭지를 달아 깨끗한 물을 사용하는 방법을 설명해준다.(이 동영상은 ‘e-영상역사관(ehistory.kr)’에서 볼 수 있다.) 그로부터 51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첨단 인텔리전트 키친’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
그럼 아파트는 어떠한가? 1962년 대한주택공사가 지은 한국 최초의 아파트인 마포 아파트가 완공되었다. 준공식에 대통령까지 참석했으며 Y자형의 6층 건물에 연탄 보일러를 사용했다. 이로부터 40년이 지난 2002년 도곡동에는 고급 주거 문화의 상징인 타워팰리스가 들어섰다. 69층의 고층 건물에 수백 개의 CCTV가 들고 나는 이들을 감시하며 온갖 편의 시설을 갖춘 최첨단 아파트이다.
1 1970년대 한샘이 선보인 부엌 가구 ‘로얄’.
2 최양하 한샘 부회장은 1979년 한샘에 입사해 2004년 대표이사 부회장이 되었다.
3 ‘월플렉스’의 수납장 스타일 시스템 거실장 . 한샘은 2006년 월플렉스 시리즈의 첫 모델을 선보였고 2007년 ‘거실을 서재처럼’ 캠페인을 실시, TV가 점령해버린 거실 문화를 바꾸고자 했다.
1970년은 한국의 아파트 역사에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4월 와우 아파트가 붕괴되고, 7월에는 한강 맨션의 입주가 시작됐다. 한강 맨션은 ‘맨션’이라는 고급 아파트의 효시였다. 서울시 아파트 보급률이 1972년에는 4%, 1977년에는 7%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수치를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아파트는 현대적인 생활의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
1970년, 바로 이때 건축을 전공한 두 남자, 조창걸 현 한샘 회장과 김영철 현 퍼시스 명예회장이 한샘을 설립했다. 우리나라 주거 공간에서 가장 뒤처진 부엌을 개선해보고자 세운 부엌 가구 전문 회사였다. “당시에는 부엌 가구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단지 싱크대 메이커가 있을 뿐이었다. 오리표 씽크를 비롯해 원앙표, 백곰표, 거북표, 백조표 등이 모두 부엌 싱크대 메이커였다. 부엌장을 짜 넣는 것은 동네 목공소에 의뢰했다. 이때 한샘이 부엌장을 공략했다. 장을 짜 넣다 보니 공간 설계도 병행해야 했다. 이것이 인테리어 컨설팅의 시작이었다. 두 분 모두 건축을 전공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양하 한샘 부회장은 한샘의 설립 배경에 대해 이처럼 설명한다.
초기의 한샘은 아파트 보급과 더불어 성장했다. 1970년대 여의도 시범 아파트 단지와 반포 아파트의 개발이 큰 영향을 주었다. 최양하 부회장이 한샘에 입사한 것은 1979년으로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입사하고 얼마 후 공장을 가보고는 깜짝 놀랐다. 마치 목공소 같은 분위기였는데 그 안에서 만든 가구를 중동과 미국에도 수출하고 1979년 12월 ‘수출 1백만 달러 돌파’ 기록도 세운 것이다. 조립식 부엌을 만들어 일본 회사를 통해 미국으로 수출했다. 국내 건설사들의 중동 진출 붐으로 한샘 부엌 가구도 더불어 중동 시장에서 인기를 얻었다.” 1983년에 수출 5백만 달러를 달성했다. 중동 수출을 계기로 한샘은 유럽 스타일의 주방을 배웠고 그 결과 출시된 제품이 바로 ‘유로’ 시리즈였다.
1 슬라이딩 붙박이장 ‘리갈 플로라’(2001).
2 침실 가구 ‘댄디 5006 노체’(2006). 키큰장 손잡이에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로 장식한 베스트셀러이다.
부엌만 봐도 시대가 보인다 1980년대 ‘시스템 키친’ 시대를 연 한샘은 빌트인 시스템을 도입해 도마장, 쌀통장, 행주걸이장과 같은 옵션을 넣어 부엌 가구를 고급화했다. 1984년 ‘행복은 어디 있나요, 사랑은 어디 있나요. 오순도순 이야기꽃 피는 곳, 한샘’이란 CF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엌을 가사 노동의 공간에서 가족 생활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는 한샘의 르네상스기였다. 미국에 지사도 냈고, 공장과 본사 모두 정비했다. 그러면서 고가 브랜드의 이미지를 굳혀나갔다. 이 무렵 한국의 주부들은 집 안에 한샘 부엌 가구를 들여놓는 것이 꿈이었다.
1990년대는 ‘인텔리전트 키친’의 시대였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주방에도 자동화 바람이 불었다. 당시 신문 광고 카피가 ‘시속 180km 부엌’이었다. 내용인즉 그만큼 빠른 속도로 부엌일을 할 수 있게 했다는 것. 가스오븐, 냉장고, 식기세척기, 살균 식기건조기 등 부엌 가구에 내장된 26가지 기능에 가사를 맡기고 주부의 시간을 되찾자는 것이었다. 1997년 한샘은 인테리어에까지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1990년대 초・중반 신도시가 건설되고 개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돌파하면서 사람들이 아파트 인테리어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우리는 1994년부터 인테리어 사업을 준비했다. 부엌장을 만들며 부엌을 디자인했듯이 거실장, 소파, 커튼의 개별 제품이 아니라 거실을 판매하는 개념으로 접근한다는 전략이었다”라고 최양하 부회장은 말한다. 방배동에 원스톱 쇼핑을 위한 대규모 쇼룸도 만들었다. 그 결과 일반 가구 시장에 진출한 지 4년 만에 동종 업계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그사이 1998년에 IMF 외환 위기가 왔다. 한샘은 가격 부담을 줄이고 사용자들의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문제점 해결에 우선순위를 두고 ‘메이크업 키친’ 시리즈를 개발했다. 대표적인 제품이 ‘밀란 화이트’이다. 이로써 1.8배의 매출액 성장을 이루며 부엌 가구 시장의 저변을 확대할 수 있었다. 위기가 기회였던 셈이다.
3 키친바흐 ‘뮤즈’(2008).
4 키친바흐 ‘600 오리엔탈’(2008).
이후 한샘은 새로운 주거 문화 제안에 초점을 맞춰 ‘DBEW(Design Beyond East and West)’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2004년 DBEW 디자인 센터를 세우고 알레산드로 멘디니와 같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심사위원으로 초빙해 국제 디자인 공모전도 열었다. “동양도 서양도 아닌 우리만의 독자적인 스타일로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길 바라며 시작했다”라고 말하는 최양하 부회장은 여기에 한샘의 장기적인 디자인 비전이 담겨 있다고 한다. 한샘은 이제 건자재 시장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IMF 외환 위기가 기회였듯이 이번 불황이 다시 한 번 도약의 발판이 되기를 기대하며 최양하 부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닥재, 벽지, 시스템 창호에 욕실까지, 쉽게 말하면 모델하우스를 꾸미는 데 필요한 모든 자재를 만든다. 한샘에서는 아파트 브랜드들에 인테리어 솔루션을 제안해 ‘한샘 인사이드’와 같은 방법으로 브랜드를 특화시킬 계획이다.”
2009년 한샘은 인텔리전트 키친보다 더 인텔리전트한 키친을 만들기 위해 우리의 주거 문화를 철저히 분석하고 있다. 초기에 서양의 부엌 문화를 받아들여 우리 방식대로 재해석해 다시 세계 시장에 수출했던 것처럼 21세기에는 한국의 주거 문화에서 비롯된 디자인으로 세계 시장 공략을 준비하는 것이다.
*참고 자료
5 키친바흐 ‘600 프레임 오크’(2009). 한국의 좌식 문화를 결합시켜 주방과 식당이 하나로 연결되게 했다.
1 1 20년 넘게 부엌 가구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는 ‘888 내추럴 오크’.
2 신혼부부를 위한 신개념의 침실 가구 ‘인텔 화이트’.
40년의 절반을 함께한 사람들이 들려주는 한샘 역사 한샘의 성장에는, 이제는 한가족같은 사이가 된 직원들의 노력이 있었다. 1991년 입사해 부엌 마케팅실에서 일하고 있는 최은미 씨, 1995년에 입사해 부엌 개발실에서 일하고 있는 디자이너 김윤희 씨, 1999년에 입사해 10년째 인테리어 영업부에서 일하고 있는 김용하 씨가 그 주인공. 한샘이 우리 주거 문화의 변천사를 기록하고 있다면 이들은 한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김윤희 씨는 입사 때부터 들었던 ‘Design Oriented Best Company’라는 모토가 자부심을 갖게 해주었다고 한다. “한샘은 단지 가구를 판매하는 회사가 아니다. 주거 환경을 디자인한다.” 이것이 김윤희 씨가 생각하는 한샘의 매력이다.
1979년 한샘은 “아득한 옛날 사람이 살던 집은 하나의 부엌이었습니다”라는 문구로 신문 광고를 했다. 오래전부터 부엌이 가정의 중심이고 가족이 함께 모여 대화하는 장소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는 1990년대 초반 아일랜드형 부엌 가구의 도입과 함께 실현되기 시작했다.
3 한샘 역사의 절반 가까이 함께 일해온 김윤희, 최은미, 김용하 씨(왼쪽부터).
인테리어 영업을 담당하고 있는 김용하 씨는 “1990년대 가정용 가구 업계의 10대 브랜드 대부분이 IMF 외환 위기로 부도 후 법정관리에 들어가거나 파산했다. 따라서 소비자의 잠재적 요구를 해결해줄 수 있는 상품이나 서비스가 없었다. 이때 한샘은 좋은 디자인과 품질의 가구를 합리적인 가격에 내놓았다. 또한 한샘의 강점인 패키지 상품에 원스톱 쇼핑이 가능한 대형 매장까지 만들어 시장을 선점했다”라고 말한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객들은 더 다양한 디자인, 더 뛰어난 품질을 요구하면서 인테리어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예전에는 결혼할 때나 이사할 때 한 번 가구를 구입하면 수납에 문제가 없고 큰 불편이 없는 한 여간해서는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가구도 패션처럼 까다롭게 고르고 남들에게 과시하는 맛도 있어야 한다.” 2007년 한샘은 가을 신상품으로 침실 가구 ‘아르데코’를 출시하며 예상치 못한 재미를 보았다. 한샘은 항상 모던한 이미지를 추구했는데 갑자기 세미 클래식 라인의 가구가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 2005년을 전후해 클래식과 앤티크 스타일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면서 이런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아르데코가 출시되기 이전까지 한샘의 침실 가구 중 히트 상품의 대부분이 신혼부부를 위한 중저가 모델이었는데 아르데코의 성공으로 판도가 조금 바뀌었다.
2009년 한샘은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 분주하다. 핵심은 동양의 정서로 세계 시장을 공략하는 것.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다시 한번 달라진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4 자녀 방 가구 티엔티엔 ‘캐럴’. 책상 형태와 서랍 도어 등의 색상을 선택할 수 있다.
5 자녀 방 가구 ‘유비크’. 일자형 배치의 콤팩트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내가 꼽은 한샘 제품 베스트 3
김윤희 씨 888 내추럴 오크 초창기에 개발한 고가의 부엌 가구로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베스트셀러이다. 7000 밀란 화이트 1998년 IMF 외환 위기 때도 한샘이 부엌 가구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킬 수 있게 해준 효자 상품이다. 키친바흐 600 오리엔탈 2000년대 초반 국내외 브랜드들이 저가 부엌 가구에 집중하면서 부엌의 철학이 흐려지자 ‘키친바흐’로 부엌의 철학을 되살리고자 했다. 김용하 씨 신혼 침실 가구 ‘인텔화이트’ 월넛과 화이트의 콤비로 인텔리전트 침실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침대 헤드 주변에 조명등과 라디오를 빌트인한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또한 신소재 개발을 통해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할 수 있었다. 붙박이장 5005 화이트 장롱 문화를 붙박이장 문화로 바꾼 일등공신이다. 같은 면적에 수납 효율을 극대화했으며 내부는 고객 취향에 따라 맞춤 설계가 가능했다. 홈 오피스 가구 ‘플러스’ 신혼부부들이 꿈꾸는 홈 오피스 개념을 도입했다. 한 번에 모든 공간을 꾸며야 하는 신혼부부들이 침실부터 서재까지 통일된 느낌으로 연출할 수 있게 해주었다.
- [서울리빙디자인페어2009] 한샘, 부뚜막이 인텔리전트 키친이 되기까지 40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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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주거 환경 개선’을 목표로 출발한 한샘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 토털 인테리어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사이 우리의 생활 양식은 백팔십도 바뀌었다. 최양하 한샘 부회장에게 한샘의 역사를 통해 한국 현대 주거의 변천사를 들어본다.
(재단법인 한국디자인문화재단), <한국의 디자인- 시각문화의 내밀한 연대기>(디플), <한국의 디자인- 산업, 문화, 역사>(시지락), <아파트 공화국>(후마니타스), <아파트의 문화사>(살림)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