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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 라이프 두 사람이 함께 쓰는 새로운 챕터
어떤 집은 인생의 향방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키기도 한다. 김태일·박가영 부부의 115㎡ 아파트가 그러하다.

김태일·박가영 부부는 오롯이 둘만 함께할 집을 만들고자 천편일률적인 형태에 포인트를 주고 싶었다. 이에 어나더디 스튜디오는 주방과 현관 사이 벽에 레드 캐비닛을 설치했다. 두꺼운 벽의 특징을 활용해 충분한 깊이의 수납을 활용할 수 있도록 고안했다.
둘만의 보금자리를 갖게 된 부부는 틈만 나면 팝업 스토어 혹은 해외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집에 어울릴 법한 소품을 주문해 배치하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집의 문을 여는 건 책을 펼치는 일과 진배없다. 열어보지 않으면 그 안에 어떤 세계가 담겨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김태일·박가영 부부가 우연찮게 방문한 마포구의 아파트 문을 열었을 때, 두 사람은 새로운 인생의 막(chapter)이 열리는 기분을 느꼈다. “푸른 나무가 잔디밭처럼 펼쳐져 있고, 그 위로 한강과 아스팔트 대교, 양방향으로 조우하는 지하철, 그 너머로 국회의사당이 보이는데, 이게 현실이 맞나 싶었어요.”

 

어나더디 스튜디오는 기존 창의 크기를 대폭 축소해 산란함 대신 아늑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화장실에도 거실과 마찬가지로 포인트 컬러를 사용해 집에 유기성을 더했다.


주식 트레이더로 일하는 김태일 씨와 배우로 활동하는 박가영 씨. 본래 두 사람은 집을 살 계획도, 아이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 그간 모은 자산의 일부를 월세 생활에 쓰고 남은 비용을 투자해 두 사람이 좋아하는 여행을 하며 여생을 보낼 예정이었다. 한곳에 정착하기보다는 견문을 넓히고 둘만의 추억 이야기를 써 내려갈 심산이었던 것. 하지만 우연히 만난 집 하나가 그 계획을 송두리째 바꾸어놓고 말았다.


“아내가 주로 여의도에서 일하다 보니 접근성이 좋은 지역을 찾다 지금의 아파트 4층의 집을 보러 왔어요. 창밖 풍경이 좋긴 했지만 월세가 아닌 매매라 마음을 접었죠. 그런데 중개업자가 12층에 정말 전망 좋은 집이 있으니 보러 가자고 제안하더라고요. 돈 드는 건 아니니 보기나 하자 싶어 따라갔는데, 문을 여니 현실 감각이 둔감해질 정도의 풍경이 펼쳐지더라고요.” 바로 다음 날,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예산부터 계획까지 판을 새로 짜기로 했다. 115㎡, 방 세 개인 구옥 아파트 모습이 쉬이 잊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나더디 스튜디오는 기존 창의 크기를 대폭 축소해 산란함 대신 아늑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화장실에도 거실과 마찬가지로 포인트 컬러를 사용해 집에 유기성을 더했다.

 

“머리를 막 굴려봤죠. 결혼식에 쓸 비용을 전부 집에 투자하고 허리띠 졸라매면 어떻게든 될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두 사람은 후순위도 아니던, 생각조차 하지 않던 정착하는 삶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아이 없이 둘만을 위한 집이니 학군을 고려할 필요는 없었다. 잔가지를 쳐내자 하나의 대전제가 남았다. 11년이란 긴 연애 끝에 함께하게 된 두 사람에게 집이란 여생을 오롯이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장소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에게 이 집은 그동안의 고통을 위무하고자 누군가 보내온 선물 같았다.

 

현관에도 포인트 컬러로 레드를 사용했다. 레드 캐비닛에서 영감을 받아 김태일 씨가 제안한 아이디어다.

 

행복으로 채워갈 그들만의 페이지
어나더디 스튜디오의 김경민, 정세영 대표는 두 사람에게 선물 같은 집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연인에서 부부가 된 둘을 위한 페이지를 만들고자 고심했다. “이전 집의 모습은 베이지 톤 계열의 벽체와 바닥으로 구성되었어요. 수많은 화초와 선인장, 다육식물로 가득했고 눈으로도 세월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가구와 소품이 집 안 곳곳에 놓여 있었죠. 그 가운데에도 거실 발코니 밖 풍경만큼은 또렷하게 보였어요. 한강 공원의 커다란 수목이 자태를 뽐냈고, 좌우로 넓게 뻗은 한강 및 강 건너 빌딩 숲과 넓게 펼쳐진 하늘. 이를 잘 살리면 좋겠더라고요.”


두 디자이너는 계절의 풍경을 담은 창호를 자연의 연장으로 여겼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을 어떻게 하면 안으로 잘 들여올지 고민했다. 일반 이중창 대신 시스템 창호를 설치해 거실에 압도적인 파노라마 뷰를 만들었다. 침실 창문 크기는 되레 줄였다. 거실에 힘을 준 만큼 침실은 보다 제 목적에 맞는 포근한 공간으로 조성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침실 창으로 넓은 발코니가 보이는 게 무감각하게 느껴졌어요. 침실이라는 공간의 목적에 맞춘 아늑함을 선사하고자 창의 크기를 축소했어요.”


한편 비슷한 주거 모습에서 특별한 하나의 포인트를 원하던 부부의 뜻에 따라 김경민, 정세영 대표는 레드 캐비닛을 현관에 설치했다. “두 사람의 취향을 담아내기 위해 고안한 오브젝트 가구예요. 구조적으로 필요한 벽의 두께까지 활용하면 충분히 깊은 수납공간을 만들 수 있으리라 판단했죠.” 또한 주방에도 캐비닛과 동일한 포인트 컬러를 사용해 음식과 차를 즐기는 시간을 보다 특별하게 담을 수 있도록 고안했다.

 

11년 전, 김태일 씨가 아내 박가영 씨에게 선물한 하만카돈harman/kardon 스피커. 현재는 작동하지 않지만 두 사람에게 의미 있는 물건이라 버리지 않고 소장했다고. 이를 시작으로 두 사람은 자신들만의 추억을 쌓는 아카이브룸을 꾸며갈 예정이다.


집을 얻으며 두 사람은 새로운 취미 또한 갖게 됐다. 부부만의 아카이브룸을 만드는 것. 본래 아이를 키우는 집이었다면 아이 방으로 사용했을 공간을 부부는 서로가 쌓아온 추억과 앞으로 쌓아갈 추억으로 채우기로 했다. 가장 먼저 놓은 건 11년 전 태일 씨가 가영 씨에게 처음 선물한 스피커다. “고장 나서 버릴까 했는데, 그럴 수 없어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는데요, 버리지 않길 너무나 잘했지 싶어요. 앞으로도 이 방에 우리 이야기를 하나둘 채워 넣어 나중에 손님이 놀러 왔을 때 말 대신 방으로 우리 삶을 보여주고 싶어요.”

 

이 집의 하이라이트는 거실 밖 풍경이다. 두 사람은 아직까지도 바깥을 보면 현실 감각을 잊는다고 말한다. 아내 가영 씨는 이 집에 온 뒤로 남편에게 ‘커다란 고양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틈만 나면 창밖을 하염없이 쳐다보기 때문이라고.

 

아직도 김태일 씨는 현관문을 열 때마다 여기가 우리 집이 맞나 생각한다. “저에게 이런 상황이 주어졌다는 게 여전히 꿈만 같은데요, 이제부터는 아내와 저, 두 사람만이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이 집에 한 줄 한 줄 써 내려가고 싶어요. 연인에서 부부가 되며 만난 이 집이 우리에겐 뉴 챕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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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승훈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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