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명희 대표가 손을 보탠 공간은 늘 ‘실제적’ 생활의 감각과 리듬으로 아름답다. 기분 좋게 흐르는 생기와 구체적 온기가 그녀의 롱런 비결이다.
손명희 대표가 집을 옮기기로 했다며 안부 전화한 날을 기억한다. 아파트에서 살던 그녀는 집과의 인연이 다했다고 생각했는지 1년여 전, 성북동 타운하우스로 이사를 감행했다. 설계부터 시공까지 마디마디 제대로 지어 오래된 기품이 느껴지는 이층집이다. 내 동선이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집을 단장하고 세팅하는 것이 워낙에 중요한 사람이라 집 단장을 마무리하는 시점도 빠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늦어졌다. 그간 그녀는 답답하고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한 점 한 점 정성껏 골라 평생 함께할 거라 생각한 가구와 조명, 그리고 그림이 새집과 어우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르 코르뷔지에의 검은색 LC2 3인용 소파는 버터색 토고 소파로 바뀌었다가 다시 제르바소니 고스트 시리즈로 교체했다. 아끼던 샤를로트 페리앙 식탁과 에로 사리넨 타원형 테이블을 내놓고 독일 출신의 가구 디자이너 라이너 다우밀러Rainer Daumiller의 원목 제품을 새로 들였다. 두툼하고 단순한 형태가 매력적인 제품이다. 주물로 만든 금속 계단이나 어두운 색깔의 바닥재가 뿜어내는 터프한 기운을 중화하기 위해 잉고 마우러의 조명도 곳곳에 설치했다.기존 공간에서 가장 많은 변화를 준 주방. 푸드 스타일리스트로도 일한 덕분에 늘 주방의 즐거움을 위해 많은 공을 들인다. 각종 식자재와 주방 도구에도 밝아 고객에게 수세미부터 수전까지 주방에 관한 거의 모든 정보를 제공한다.
“집에 따라 이상적 가구와 조명의 조합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걸 이번에 실감했어요. 예전 집은 해가 잘 들고 빈 벽이 많아 인물화가 잘 어울렸어요. 그 집과 비교하면 이곳은 해가 부족한 데다 공간이 두 개 층으로 나뉘니 빈 벽도 많지 않아 인물화가 빛을 발하지 못하더라고요. 르코르뷔지에 소파도 너무 사무적이고 딱딱한 느낌이 들고요. 묵직한 집 안 분위기를 화사하고 부드럽게 바꾸는 데 시간을 많이 들였어요.”
제르바소니의 화이트 소파, 잉고 마우러의 조명, 황형신 작가의 금속 테이블과 샤를로트 페리앙의 빈티지 체어가 조화를 이룬 거실.위트도 곳곳에서 보인다. 상부등이 있는 천장틀 한쪽에 아들의 장난감 자동차를 살짝 올려놓고, 다용도실에는 언젠가 여건이 되면 꼭 키우리라 다짐 중인 강아지를 대신해 나무로 만든 인형을 가져다 두었다. 밥그릇까지 한 세트로. 다용도실을 보고 “왜 이렇게 넓어요?” 하고 놀랐는데 한쪽 벽면 전체를 유리로 마감한 덕분이다. “이전 집 서재에 비초에 선반을 두었는데, 이 집에 가지고 오니 둘 곳이 마땅치 않은 거예요. 어쩔 수 없이 다용도실 벽면에 설치했는데 너무 슬픈 거죠.(웃음) 반대쪽 장에 유리를 대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빛이 귀한 아래층 벽면도 고민이었다. 빛이 없으니 어떤 그림을 걸어도 빛나지 않았고, 고심하다 3m 넘게 쭉 이어지는 나무 옷걸이를 걸었다. 셀렉트 숍 인포멀웨어에서 셰이커 박스를 만드는 업체에 부탁해 맞춤 생산한 제품으로 북유럽의 어느 가정집에 걸린 것처럼 따스한 질감이다.
왼쪽 주방 옆 수납장. 세로로 긴, 오른쪽 문을 열면 휴지처럼 꺼내놓기는 애매하지만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들이 가지런히 들어 있다. 오른쪽 원목의 따스한 색, 두툼한 질감과 단순한 디자인이 아름다운 식탁. 상부에는 그 계절의 꽃이 늘 약속처럼 올라간다.
바지런한 생활과 리듬으로 아름다운 집
주방에도 일상의 감각이 넘친다. 고목 느낌의 건식 무늬목으로 몸체를 만들고 그 위에 천연 대리석 상판을 올린 크고, 번듯한 조리 테이블이 있는 공간. “주방에서 제일 신경 쓰는 것이 동선이에요. 필요한 곳에 필요한 것이 딱딱 맞춰서 들어가지 않으면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의 질도 떨어질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면서 보여준 곳이 라마르조꼬 에스프레소 머신을 올려놓은 아일랜드 테이블. “커피숍에 가면 분쇄한 원두 가루가 날리지 않게 탬퍼로 꾹꾹 누르잖아요. 그런 다음 원두 가루를 사각 통에 버리고요. 이때 동선이 부드럽게 이어져야 해서 바로 뒤쪽 대리석 상판을 파 사각 통을 매립할 수 있게 했어요. 커피를 내린 후 홱 돌아 찌꺼기를 버릴 수 있게 한 거죠. 커피 머신 바로 밑 수납함에는 쓰레기통을 두고요.” 주방에는 크고 작은 수납장이 곳곳에 가득했는데, 수저와 포크부터 각종 주방 도구까지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착착 정리돼 있었다.왼쪽 현관. 집에 들어서는 순간 화사한 기분이 들도록 벽에 손정민 작가의 꽃 그림을 걸었다. 오른쪽 허명욱 작가의 옻칠 트레이에 담은 과일과 오브제, 책과 향초. 모두 생활에서 자주 쓰고 보는 것이다.
계단참의 풍경도 공들여 완성했다. 오랜 고민 끝에 낙점한 작품은 이윤정 작가의 도자 오브제와 고경애 작가의 그림.
“아트 컬렉션도 30대 초반부터 시작했어요. 권대섭 작가의 달항아리를 20년 전에 구입했습니다. 왠지 모르겠는데 뭉근하게 달항아리에 끌렸고, 이왕이면 최고로 갖고 싶었습니다. ‘정지욱표 인테리어의 특징’ 같은 건 없어요. 저는 작가가 아니잖아요. 작가는 본인의 생각과 신념으로 작품을 만들고 고객에게 팔면 되지만, 저는 고객을 생각해야 하고 그 결과물을 사용하는 2차 소비자도 떠올리면서 재료 사용과 동선, 분위기 등을 만들어야 해요. 사옥을 꾸미는 프로젝트도 맡은 적이 있는데, 그런 건 너무 무서운 얘기잖아요. 책임감도 엄청나고. 제 의견을 주장하거나 관철하기보다는 최선을 다해 부름에 보답하고 헌신하자고 다짐합니다. 저는 고객분들이 전화를 하면 무조건 달려갑니다. 고객에게 편안한 사람이고 싶어요. 그래야 마음속 얘기를 다 할 수 있거든요. 회사 홈페이지에 프로젝트를 올리지 않는 건 혹시라도 그분들에게 해가 될까 봐서입니다. 사안에 따라 알리고 싶지 않은 프로젝트일 수도 있잖아요. 제 스스로 부끄러운 것도 있어요. 그분들의 예산과 아이디어로 공간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많은데, 제가 다 한 것처럼 자랑을 못 하겠더라고요.” 조명과 수납장, 아르떼미데와 잉고 마우러의 조명으로만 심플하게 단장한 침실.인테리어 디자이너를 하기 전 그녀의 직업은 푸드 스타일리스트였다. 요리와 주방이 좋아 대학 졸업 후 캐나다 밴쿠버로 날아갔고 그곳에서 한 뼘 더 넓은 세상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 돌아와 레스토랑 주방에서 설거지부터 시작했어요. 식당은 규율과 서열이 엄격한 곳이에요. 막내는 설거지를 하고 조금 경력이 쌓이면 감자 깎기 같은 식자재 밑손질을 하지요. 또 경력이 쌓이면 샐러드 같은 콜드cold 음식을 만들고, 마지막에 파스타나 스테이크를 담당해요. 하루는 딸을 보러 부모님이 오셨는데, 사장님이 배려를 해 주신다고 제게 서빙을 맡겼어요. 그런데 제 꼴이 말이 아니었던 거죠.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고 앞치마는 더럽고…. 그 모습을 보고 엄마가 일주일간 우셨대요. 하지만 저는 정말 재미있게 일했거든요. 브레이크타임 때도 레시피를 정리하고 머릿속으로 복습하기 바빴지요. 20대 때에는 이런저런 고생과 경험을 많이 하라고 하는데, 맞는 말이에요.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
어릴 때부터 집의 시간과 집의 기억을 좋아하던 손명희 대표는 원래의 공간이 지닌 향취를 쉽게 지우지 않는다. 구조물과 골격을 유심히 살핀 후 그곳에 맞는 동선과 분위기, 구조와 디테일을 만들어나간다. 그녀가 여전히 많은 고객에게 러브콜을 받는 이유다.
푸드 스타일링을 하다 리빙 스타일리스트로 직업을 전환한 데는 엄마의 영향이 컸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집을 사랑하는 엄마의 삶과 태도. “나란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쌓이면서 알게 됐어요. 지금의 나는 내가 잘해서 자동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다 부모님에게 받은 것으로 완성된 것이라는 걸요. 엄마는 밖에서 일을 하고 들어와서도 집에서 늘 바빴어요. 쓸고, 닦고, 가꾸고, 요리하고. 퀼트도 즐겨 하셨고 베이킹도 좋아라 하셨어요. 새로운 문화에도 관심이 많아 미제나 일제 물건에 밝으셨고 지인의 멋진 공간이나 집에 다녀오시면 꼭 저를 다시 데려가 주셨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집을 참 좋아하신 것 같아요. 철마다 패브릭이며 가구와 조명의 위치를 바꾸고 접해보지 못한 것, 새로운 것에도 열려 있었어요. 살림은 엄마 몫이었지만, 아빠는 그런 엄마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셨어요. 뭘 산다고 해도 반대를 하지 않으셨지요.(웃음) 결정하는 마음을 키워준 것도 부모님이에요. 초등학교 5학년때 였을 거예요. 빈티지 가구점에 저를 데려갔는데, 물건을 골라보라고 하시더니 제가 고른 걸 실제로 사셨어요. 딸은 엄마가 좋아하는 공간을 함께 좋아하는 존재 같아요.”
손명희 대표가 열심히 가꾼 집을 빠져나오면서 집을 좋아하는 마음이 그 자체로 얼마나 복된 것인지 잠시 생각했다. 우리 아이들도 집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크면 좋겠다고 또 잠시 생각했다. 라이크라이크홈.. 되뇔수록 마음 한쪽이 기분 좋게 부풀어 오르는 이름이자 구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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