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최고라 할 수 있을까? 고급스러움이란 또 무엇일까? 인테리어 디자이너 김진희 씨를 만나면서 떠오른 질문이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업가의 집을 인테리어 코디네이션해온 디자이너다. 비용에 구애받지 않고 최고의 집과 가구를 선택할 수 있는 조건에서 코디네이션을 한다면, 어떨까? 디자이너로서 신이 날 것도 같고 까다로울 법한 고객을 대하며 일하기가 조심스러울 것도 같다. “저는 제 일이 참 재미있어요. 고객이 어렵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 없어요. 10년이 넘은 오랜 고객이 많고, 이젠 친구처럼 왕래하며 자녀들끼리도 친하게 알고 지내는 분들도 있지요. 지금 주로 하는 일은 가구를 중심으로 코디네이션해서 공간의 스타일을 완성하는 것인데, 의도했던 대로 멋있게 완성되었을 때 보람이 큽니다.”
김진희 씨는 일본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미국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공부했다. 학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한 지는 16년 정도 되었다. 주거 공간, 상업 공간, 모델하우스 등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다가 보다 세밀하게는 인테리어 코디네이션이 자신에게 제일 잘 맞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 분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집, 모델하우스, 상업 공간 등의 스타일을 연출해주는 일을 주로 하며, 인테리어 디자인은 부득이한 경우에만 맡아 한다. 대중적으로 알 만한 그의 프로젝트라면 타워팰리스·아크로비스타·미켈란 쉐르빌의 모델하우스와 신사동의 이탈리아 레스토랑 일치프리아니 본점의 인테리어와 코디네이션을 들 수 있다. 일해온 세월이나 그의 감각에 비해 세상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것은, 노출될 기회도 적었지만 굳이 노출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불특정 다수보다는 특정한 소수를 위해 일을 하는 그이니 수긍이 간다.
가구도, 집도 기본을 지켜야 명품이다
인테리어 코디네이션에서 가구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 집 안에 놓이는 물건 중 가장 덩치가 크고 디자인 또한 다양해 공간의 스타일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또한 기능적인 면까지 만족시켜야 하기에 더욱 까다롭게 골라야 한다. 그는 자연히 스테디셀러로 사랑받는 가구들은 어떤 매력과 역사를 지니고 있는지, 가구를 어디에 어떻게 놓아야 제 멋이 사는지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 빈티지 가구의 매력에 빠졌다. 빈티지 가구는 대량 생산이 본격화되기 전인 20세기 초·중반에 만들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데, 희소성과 역사성의 가치가 있다. 21세기에 대량 생산되는 가구와 달리, 내부를 뜯어보면 쿠션, 팔걸이, 서랍 등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에 지혜와 정성이 담겨 있다. 어쩔 수 없는 시간의 흔적으로 수리와 보완을 거치기도 하지만, 가구 본래의 디자인 의도와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비에 젖듯 서서히 빈티지 가구에 대한 호감이 깊어졌고 빈티지 가구 갤러리를 열기에 이르렀다.
1 도예작가 이헌정 씨와 전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진희 씨의 회사인 논현동 iLd(02-546-0521)에서는 7월 27일까지 <작가 이헌정과 함께한 빈티지 가구전>이 열린다.
2 그가 좋아하는 가구 디자이너의 이름이 벽면에 적힌 갤러리 입구.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듯 고고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가구라도 제자리에 놓여야 명품이 되는 법. 그는 가구를 속속들이 꿰뚫어 보고 그것이 오래 빛날 수 있는 자리를 찾아준다.
3, 4, 그는 1950년대 빈티지 가구를 가장 좋아한다. 소파 쿠션을 뜯어보면 탄력을 위해 장치한 스프링과 쿠션감을 위해 넣어둔 말총, 밀짚 등이 그렇게 꼼꼼할 수가 없다고. 알면 알수록 가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5 갤러리 공간 너머로 보이는 방이 김진희 씨의 사무실. 천장에 오브제처럼 걸려 있는 나뭇가지는 그의 집 마당 도토리나무에서 잘라 온 것. 대단할 것 없는 나뭇가지 하나 연출하는 데에도 그의 솜씨면 이렇게 멋이 산다.
김진희 씨는 지난 3월 논현동으로 일터를 옮겼는데, 그의 회사 iLd의 새로운 사무실은 가구 전시를 위한 넓은 쇼룸을 함께 갖추고 있다. 투명 에폭시 바닥과 화이트 벽면으로 깔끔하게 마감된 공간에 제각각 범상치 않은 멋을 뿜어내는 가구가 진열되어 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 가구를 새로 장만하려는 사람까지 가구에 관심이 있는 다양한 분들이 와서 편하게 보고 갈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파리와 뉴욕의 가구 갤러리처럼 훌륭한 가구를 전시하고 가구와 인테리어에 관한 의견도 나누며 가구 판매도 할 예정. 현재 도예작가 이헌정 씨의 작품과 함께 전시 중인데, 이처럼 1년에 2~3번 이상은 테마가 있는 전시를 선보이려고 한다. 좋은 빈티지 가구를 찾기 위해 외국을 자주 다니지만, 반면 첨단의 트렌드에는 무심한 편이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 법도 한 파리 메종 오브제나 밀라노 페어 같은 박람회에는 거의 가지 않는다. 현란한 인테리어 박람회에서 트렌드를 찾기보다는 자신의 사무실에 앉아 가구 디자이너의 책을 보며 공부를 한다. 외식이 드물 정도로 새로운 사람을 잘 만나지도 않고, 첨단 유행의 거리에 시장 조사를 하러 다니지도 않는다.
“제가 봐도 참 폐쇄적인데요(웃음). 디자이너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저는 트렌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글로벌 시대인지라 굳이 외국으로 쫓아다니지 않아도 곧 우리나라에서 트렌드를 읽을 수 있기도 하고요. 집이란 유행보다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디자이너는 잠시 일해주고 떠나지만 집주인은 오랜 시간을 집에서 보내게 되잖아요? 디자이너가 트렌드에 매료되면 그것을 은연중 강요하게 될 수 있어요. 그러면 고객은 전문가인 디자이너의 말을 따르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잠시 반했던 스타일로 꾸민 화려한 집이 부담스러워지고 싫증나게 되지요. 집의 기본 바탕은 심플하고 단순해야 해요. 트렌드는 그 위에 쿠션이나 몇 가지 소품을 더해 분위기를 전환하는 정도가 좋아요.”
시간이 지나보면 안다. 가구가 그 공간에 어울리는 좋은 가구인지 아닌지. 있는 듯 없는 듯 튀지 않으면서 문득문득 돌아보면 아름답고, 요란스럽지 않으면서 필요한 역할을 하고, 늘 그 자리에서 든든하게 존재하는 가구.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고, 더 시간이 지나면 그 같은 것을 미리 판단할 수 있는 눈이 생긴다. 마치 어느 날, 우연히 진짜 빈티지 가구와 리프러덕션 빈티지 가구를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1 4층인 김진희 씨의 집 뒤로는 산세와 이어지는 바위가 웅장함을 자랑하며 자리 잡고 있다. 현관에는 그가 외출할 때 자주 신는 하얀 로퍼와 집 안에서 신는 플립플롭이 각각 놓여 있다.
2 구조적으로 특별할 것 없는 심플한 집이지만 범상치 않은 멋을 풍기는 가구가 서로 균형을 이루며 자리 잡고 있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곡선 다리의 테이블은 잔 로이어 디자인으로 그가 무척 아끼는 것이다.
3 닥스훈트종인 ‘윤돌이’는 그가 셋째 아이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강아지.
4 한스 웨그너의 하트 체어가 놓인 이 테이블은 집에서 일할 때 주로 사용한다. 벽에 걸린 그림은 작가 최인선 씨의 작품.
화장하지 않아도 긴장감이 도는 ‘파리지엔’ 같은 여자
한스 웨그너, 아르네 야콥센, 샤를로트 페리앙, 찰스&레이 임스…. 김진희 씨가 좋아하는 19세기 중반의 가구 디자이너들이다. 이들의 이름은 그의 갤러리 입구 벽면에 멋스러운 필기체로 장식되어 있다. 항상 가구를 다루다 보니 본인의 마음에 드는 가구도 종종 만나게 되는데, 그래서 자신의 집에도 가구 구성을 자주 바꾸게 된다. 세검정 근처에 있는 그의 집은 짐작보다 수수하다. 거실 창 앞으로 산세와 이어지는 웅장한 바위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빼면 평범한 구조의 주택. 그의 갤러리처럼 깔끔한 공간에 가구와 모빌, 그림, 소품이 서로 균형을 이루며 잘 정돈되어 있다.
그는 일하고 가끔 여행하는 것 외에 특별한 취미가 없다. 대신 집에 있는 것, 집에서 밥 먹는 것, 가족들과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강아지 ‘윤돌이’를 비롯 딸과 아들, 친정어머니 등 가족의 사진을 항상 다이어리에 넣어 다닐 정도. 그의 친정어머니는 옛날 사람치고는 드물게 170cm의 큰 키에 미인에다 멋쟁이였다. 김진희 씨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성향과 기질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닮아 머리도 일찍 하얗게 세었다. 그는 보통 회색빛 머리를 틀어 올리고 30대 이후로 죽 그랬듯 색조 메이크업을 전혀 하지 않는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그의 스타일에서 느껴지는 매끈한 긴장감. 나이 오십에도 여성적인 우아함과 설렘을 전혀 잃지 않는다. 마치 파리의 여자들이 그렇듯이. 여기에는 뛰어난 패션 감각도 한몫을 하는 듯. 그는 심플한 컬러, 몸에 부담이 되지 않는 편안한 실루엣의 옷을 즐기는데, 비대칭형이라거나 주름 장식이 있다거나 디테일한 부분에 완성도가 있는 것들이다. “파리지엔을 연상해준다면 감사하지요. 제가 여행을 다니면서 가장 좋아했던 도시가 파리였어요. 언제 가도 늘 새로워서 시간만 나면 가고 또 갔지요. 저는 이상하게 늙는 게 전혀 슬프지 않아요. 오히려 여유로워지고 넉넉해져서 좋아요.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정도일 뿐.”
나이 들어 마음이 편해져 몇 년 새 살도 쪘다. 하루에 한 끼만 먹을 정도로 음식에 관심이 없던 그가, 매일 세 끼에 간식까지 꼬박꼬박 챙겨 먹게 된 것도 긍정적인 변화다. 앞으로의 바람은 지금처럼 즐겁게 만족하며 일하고 가족들이 모두 건강하게 지내는 것. 그리고 애정이 깊어진 빈티지 가구를 보다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기회가 되면 빈티지 가구에 대한 책을 내고 싶다. 그가 긴 세월을 지나면서 알게 된 가구의 가치를 담아서 말이다.
- 인테리어 디자이너 김진희 씨 최고를 알아보는 안목은 시간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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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착해 보이는 인상의 여자가 안경 너머로 찬찬히 가구를 들여다보고 있다. 16년 경력의 인테리어 디자이너 김진희 씨가 자신의 갤러리에서 50년대 빈티지 가구에게 말을 거는 중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고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빈티지 가구. 그 가구와 공간을 매치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일과 인생을 조화시키는 것에서 그는 모두 순조로운 성공을 이루고 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