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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 모이는 집
체어스온더힐 한정현 대표의 가족이 새롭게 옮긴 158m2의 아파트. 그의 일과 가족의 취미, 친밀한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까지, 가족이 좋아하는 것으로만 채운 취향 집합소다.

주방부터 다이닝, 거실까지 하나의 공간으로 탁 트여 있는 한정현 대표의 집. 곳곳에 그가 만든 가구, 동료 작가의 가구와 아트 작품이 놓여 있다.

김기드온 작가가 만든 라운지체어에 앉은 한정현 대표. 오른쪽 테이블은 그가 최근 호호재에서 연 전시 <블랙 메이>를 위해 제작한 JH240509. 벽에 걸린 그림은 박재곤 작가의 작품. 뒤쪽 벽면은 커다란 박판 타일을 본래 크기 그대로 사용해 마감했다.
아트퍼니처 작가이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가구디자인을 가르치고, 가회동에서 갤러리 체어스온더힐과 크래프트온더힐, 호호재를 운영하는 한정현 대표. 부부와 이제 중학생이 된 딸, 반려견 코코까지 네 가족은 2년 전 지금의 집으로 이사했다. 광화문을 떠나 새롭게 얻은 가족의 보금자리는 동네의 고즈넉한 운치는 덜하지만 대신 푸르른 자연이 가까웠다. 아파트 단지를 나서면 바로 나타나는 한강 둔치는 코코의 산책길이 되고, 저층이라 창 너머로는 훌쩍 자란 가로수가 하루 종일 아른거린다.

“이 지역으로 이사를 결심했을 때, 고층 아파트가 밀집한 곳보다는 지하 주차장이 없더라도 나지막한 아파트가 모여 있는 동네이면 했어요. 다행히 이곳은 오래된 아파트라 단지에 여유가 있었어요. 전에 살던 집은 주상 복합 건물이어서 편리하긴 했지만 늘 더웠는데, 창이 시원하게 열려 통풍이 잘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곧 재건축을 해야 하지만 짧은 기간 살더라도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중요한 가족에게 레노베이션은 피할 수 없는 절차였다. “호텔에 가도 결국 집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게 저희 가족이에요. 그만큼 집이 중요하기 때문에 골조만 남기고 거의 다 고쳤어요. 심지어 구조벽도 일부 철거해 구조 심의를 따로 받았죠.”
집은 네 가족이 사는 공간이지만, 이곳의 모습에는 가족과 인연을 맺고 가까이 지내는 수많은 사람의 흔적이 녹아 있다. 우선 레노베이션을 맡은 김택수 소장은 그의 오랜 친구이자 인테리어 주치의다. 예전에 살던 집에 이어 두 번째로 작업을 맡았기에 그의 취향부터 소장하는 가구와 작품까지 파악하고 있었고,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에 딱 맞는 집을 선사했다.


타일과 마루, 무늬목까지 다양한 마감재가 어우러진 거실. TV가 있을 자리에는 오디오와 박선기 작가의 숯 설치 작품을 놓았다. 오디오에 걸터앉은 귀여운 존재는 정지숙 작가의 ‘리빙 매스’. 오른쪽 사이드 테이블은 최근 로에베 재단 공예상의 파이널리스트로 선정되기도 한 이종원 작가의 작품.

무늬목으로 마감한 주방. 아일랜드 주방은 요리가 취미인 남편이 가족을 바라보며 음식을 만들고 싶다고 요청해 설치했다. 왼쪽 주홍빛 작품은 정지숙 작가의 ‘숨 쉬는 동물’.
“한정현 대표 부부는 지인을 초대해서 함께 와인 마시고 교류하는 것이 곧 행복인 분들이에요. 손님이 모이는 다이닝 공간과 주방, 거실이 매우 중요했죠. 한편으로는 부부가 지인과 시간을 보낼 때 아이가 방해받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사적 공간도 충분히 준비해야 했고요.” 두 가지 상반되는 용도를 만족하기 위해 김택수 소장은 안방과 아이 방 등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을 아예 별개 영역으로 구분했다. 거실과 주방은 벽을 없애 한 공간으로 연결하고, 주방은 딸려 있던 쪽방까지 터서 크게 넓혔다. 거실과 주방을 사적 공간과 구분하는 장치는 회전하는 피벗 도어다. 사실상 이번 리모델링의 핵심 아이디어. 1백80도로 모두 회전이 가능하고, 손잡이와 문 프레임 없이 거실 벽면과 같은 타일로 마감해 닫으면 벽처럼 느껴진다. 덕분에 손님들은 부담 없이 모임에 집중하고 아이는 안쪽의 분리된 공간에서 방해받지 않을 수 있다.


김재용 작가의 도넛이 걸려 있는 욕실. 좁은 공간에 맞춰 거실의 박판 타일을 잘게 잘라 마감했다.

안방의 넓은 창 너머로 하루 종일 나무를 바라볼 수 있다. 스툴은 박진선 작가의 ‘웨이브 스툴 옐로wave stool yellow’.
또 하나 많이 고친 공간은 현관. 한정현 대표가 특히 마음에 들어 하는 부분이다. “원래는 굉장히 협소하고 들어오면 바로 거실이 보이는 구조였어요. 거실을 일부 내어주어 면적을 넓히고 진입 방향을 바꿨어요. 이렇게 고칠 수 있을지 몰랐는데,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집을 함께 완성하는 존재는 그간 인연을 맺어온 여러 작가의 작품이다. 작품을 소장한 집은 많지만 이곳에는 학교에서 가르친 제자, 그의 갤러리에서 전시한 작가 등 하나하나에 인연과 이야기가 녹아 있어 보는 기쁨이 훨씬 크다. “이사 온 후로도 많은 작품을 들였는데, 작품이 자리할수록 떠오르는 사람과 좋은 순간이 늘어나요. 박선기 선생님의 숯 설치 작품은 제가 결혼할 때 선물로 주신 건데, 이사할 때마다 오디오와 함께 어디에 둘지 가장 먼저 고민하면서 그 자체로 귀한 추억이 됐죠.”

딸이 직접 고른 김재용 작가의 도넛은 손님들이 오가다 볼 수 있는 욕실 벽에 걸었고, 클래식 감상이 취미인 남편의 반려 기기와도 같은 오디오에는 정지숙 작가의 작품 ‘리빙 매스Living Mass’가 걸터앉아 있다. 크래프트온더힐에서 열렸던 개인전에서 잭슨홍 작가가 전시 설치를 위해 만든 화살표는 ‘위를 향해!’라는 부모의 깊은 뜻을 담아 아이가 공부하는 책상 앞에 설치했다. 김택수 소장은 작품이 다채롭게 놓일 수 있도록 캔버스가 될 벽면을 곳곳에 만들어줬다. “바라보는 방향이 바뀔 때마다 작품이 시선에 닿습니다. 문을 열면 마주하는 벽면에 그림이 보이고, 방향을 꺾으면 맞은편에 가구가 자리하는 식으로요. 곳곳에서 작품을 조우하는 기쁨을 주고 싶었어요.”


가족의 세미 거실이기도 한 공부방. 천장은 콘크리트 구조체를 그대로 노출하고 유리 슬라이딩 도어를 설치해 카페 같은 분위기를 냈다.

방 속의 방 느낌으로 디자인한 아이 방. 살짝 단을 높이고 천장까지 목재로 마감해 아늑한 캐빈을 만들었다.
공간은 작품과 한정현 대표가 디자인한 가구가 돋보이도록 한 발짝 물러나 배경처럼 존재한다. 아파트에서 흔히 등장하는 PVC 바닥재나 벽지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주방과 거실 벽면은 무늬목과 타일을, 안방에는 목재 루버를 두르고 사이사이 여백이 되는 벽면에는 페인트를 칠했다. “처음 이 집을 봤을 때 바깥으로 나무가 가득한 풍경이 마치 단독주택 마당 같았어요. 주택에 즐겨 쓰는 소재로 단독주택 같던 그 인상을 더 살려봤습니다. 특히 타일은 유지 관리가 쉽고 시간이 지나도 낡은 느낌이 들지 않아 좋습니다.” 같은 타일이지만 공간마다 변주를 준 것도 건축가의 세심한 디테일. 거실은 커다란 박판 타일 하나를 통으로 써서 라인이 적게 드러나도록 한 반면, 주방과 욕실 벽면에는 벽돌처럼 얇게 잘라 붙였다.

“저에게 집은 편안하게 쉬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도 모두 가능한 장소예요. 주말에 다이닝 테이블에 앉아 아침 먹으면서 저녁은 뭘 먹을까 이야기하는 순간에도 무척 즐겁고, 각자의 방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또 그것대로 좋고요.” 내향형 인간도, 외향형 인간도 즐거울 조건을 고루 갖춘 집에서 가족은 ‘따로 또 함께’ 서로의 행복을 지어간다. 재건축보다 나무가 주는 기쁨이 훨씬 큰 오래된 아파트에서.



김택수 소장은 미국 SCI-Arc에서 건축을, 호주 멜버른 RMIT 대학에서 건축과 실내 건축을 전공하고 2002년 버텍스디자인을 개소했다. 호주와 미국에서 경험한 디자인을 우리의 주거 환경에 맞게 재해석해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공간을 선보인다. 주요 작품으로는 인천영어마을, 성균관대학교 학술정보관, 넵스호텔 쇼품파주, 더퍼스트터치 사옥, 운중동 더디바인주택, 메가커피 사옥 등이 있다. ver-tex.net

글 정경화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4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