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연
“해외를 왜 가? 서촌이 이리 재밌는데!” 해외여행 간다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이다. 요즘 서촌이 세계 그 어느 도시, 마을보다 흥겹다. 적어도 내겐 말이다. 최근, 이대 앞에서 이름을 날렸다는 사카바 ‘여래여거’가 서촌으로 이사 왔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3분 거리. 애매하게 저녁때를 놓친 날, 여래여거를 찾는다. 몇 발짝만 걸으면 맛있는 초밥을 먹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초밥에 가볍게 생맥주 한잔하고 다음 손님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려던 계획은, 동네 친화적 분위기에 점점 옅어지고 사그라든다. 주방을 ㄷ자로 둘러싼 바 구조는 사장님은 물론, 낯선 손님과도 쉬이 친구가 되게끔 한다. 그곳에서 서촌에서 ‘혼술’을 즐긴다는 여자 친구 둘을 사귀었다. 혼술을 하다니 용기가 대단하다 싶고, 여자 혼자 술을 마셔도 괜찮은 동네에 산다니 자랑스러웠다.
2차는 아무래도 ‘참 바’가 최고다. ‘아시아 베스트 바 50’에서 13위에 오른 참 바는 서촌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한 일등 공신이다. 한때 서촌의 맥락을 모른 채, 소위 ‘뜬다’는 이유로 가게들이 우후죽순 생겼다. 청담동에서 볼 법한 가게, 홍대에서 볼 법한 가게, 이태원에서 볼 법한 가게가 어깨를 맞대며 기이한 풍경을 자아냈다. 역시나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가게들은 비슷한 시기에 들고 났다. 이대로 동네의 격이 떨어지나 싶은 순간, 참 바가 들어왔다. 2018년이었다. 임병진 바텐더의 인기에 서촌이 주는 환상, 한옥을 개조한 이색적 구조가 더해져 가오픈 때부터 붐비더니, 이제는 웨이팅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이 됐다.
주로 1차 자리가 무르익은 시점에 행운을 점치는 마음으로 참 바에 웨이팅을 건다. 운이 좋으면, 오늘이 지나기 전에 자리가 날 것이다. 설렘을 안고 ‘지로 바’로 향한다. 지로 바는 금천교시장 골목에서 부모님과 ‘서촌친구네’라는 횟집을 운영하던 사장님이 독립해 차린 하이볼 바다. 아늑한 분위기에 밥 메뉴가 있고, 가격이 합리적이다. 서촌을 부러 찾아온 사람이라면 기회가 아까우니 저장해놓은 곳들을 여기저기 들르겠지만, 주민 입장에선 대단한 계획 없이 그저 한잔하는 김에 끼니까지 해결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지로 바는 이상적인 동네 술집이다. 음식도 꽤나 맛있으며, 가격도 하이볼이든 안주든 1만 원 안팎으로 부담 없다. 이런 이점 덕에 지로 바에 앉아 있으면 동네 술꾼은 다 만난다.
참 바에 자리가 났다. 라스트 오더 한 시간 전. 취기를 누르며 부리나케 걸어간다. 묵직한 참나무 대문을 힘껏 밀자, 저마다 바삐 일하던 바텐더들이 일순간 나를 향해 반갑게 인사한다. 피곤한 기색 하나 없다. 바 자리에 앉자마자 칵테일을 주문한다. 허락된 시간이 두 시간이므로 지체할 새가 없다. 그리고 오늘은 몇 시간 만에 웨이팅이 풀렸는지, 대단한 모험담을 늘어놓듯 과장되게 떠든다. 칵테일을 정성껏 만든 바텐더가 야속해할 만큼 빠른 속도로 들이켠다. 그리고 다음 잔을 주문한다. 장장 몇 시간을 기다렸는데 한 잔만 할 순 없지. 기분이 내킬 때는 한 시간 안에 세 잔을 주문하기도 한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바텐더들은 몇 시간 전과 같은 텐션으로 인사를 건넨다. 그 활기찬 에너지에 비틀대면서도 힘차게 집으로 걸어간다.
어떨 때는 1차로 찾은 술집 사장님과 함께 가게 문을 닫고 2차로 다른 술집을 들렀다가, 그 술집 사장님과 술집에 남은 손님들까지 몽땅 이끌고 3차를 가기도 한다. 퀘스트를 깨는 기분이랄까. 어떨 때는 자리 없는 걸 뻔히 알면서 참 바 앞에서 괜히 삐댄다. 그럼 바텐더들이 나와 한참 동안 수다 상대가 되어준다. 이곳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도, 소비하는 사람도 모두 이웃사촌 같다. 분명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오늘이건만, 축제처럼 매일이 특별하게 느껴지고, 스치는 사람들 모두 특별한 인연 같다. 나는 가끔 위로는 인왕산에, 아래로는 경복궁에 안긴 구조 덕에 그 속에 머무는 사람들이 특별한 소속감을 갖는 걸까, 상상한다. 아무렴, 이곳에 사는 사람으로서 서촌을 찾는 사장님들의 기대감과 손님들의 설렘을 매일 감각할 수 있어 좋다. 좋은 기운은 어떻게든 전해지니까.
이주연 프리랜서 미식 기자는 <모닝캄> <아시아나> <KTX매거진>에서 일했다. 서촌 옥인연립을 고쳐 사는 그는 최근 동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은 에세이 <봄은 핑계고: 놀고 먹고 일할 결심>을 펴냈다. 영화 기자인 남편과 함께 영화와 미식을 접목한 소셜 다이닝 ‘시네밋터블’을 기획 및 운영한다.
고현 무용;소 대표
‘동네’라는 안온한 정서가 깊게 밴 곳
서촌에 터를 잡은 이유 여행 매거진 에디터로 오랜 기간 일을 해왔는데, 팬데믹 시기 업계 사정으로 프리랜서가 되었고, 디자인 일을 시작한 아내와 함께 쓸 작업실을 구한 게 ‘무용;소’의 발단이었습니다. 신혼집이 삼청동의 한옥이어서 인근 동네인 서촌을 자주 오갔어요. 관광객에 초점을 맞춘 북촌과 달리 주민과 외부인이 자연스럽게 뒤섞이는 서촌의 친밀한 분위기가 좋아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동네의 매력 산책하기 좋은 골목도 많고, 나지막한 건물 너머로 인왕산 등 자연이 언제나 시야 안에 들어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죠.
나만의 서촌 즐기는 법 서촌의 여러 골목을 산책하길 좋아하는데, 옥인연립 뒤에서 오무사 방향으로 이어지는 언덕길을 추천하고 싶어요. 이국적인 박공지붕 구옥 너머로 보이는 서촌의 정경은 언제 봐도 한결같아 좋아해요. 골목 끝 자그마한 삼각 건물에 자리한 ‘노멀사이클코페’도 무척 좋아하는 카페예요. 9년 넘게 한자리를 지켜온 운영자가 드립 커피를 정성스럽게 내려주는데, 각 원두마다 깨알처럼 테이스팅 노트를 적어놓은 메뉴판을 보는 재미도 남달라요.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 얼마 전 효자동의 이탤리언 레스토랑 ‘두오모’가 오픈 16주년을 기념해 플리 마켓을 열었어요. 평소 두오모를 즐겨 찾고 인연을 맺은 분들이 자연스럽게 셀러와 게스트로 한자리에 모여 축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이처럼 서촌에 뿌리내린 더 많은 공간이 오래도록 같은 자리를 지켜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고현 대표는 여행 매거진 기자를 거쳐 현재는 위스키나 LP판 등 오래된 것의 가치를 음미할 수 있는 무용;소를 운영한다. 없을 무, 쓸 용, 바 소, 직역하면 ‘쓸모없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이곳에서 실용적 관점에서 벗어난 가치를 탐미하고자 한다.
김태윤 아워플래닛 셰프
자연과 이웃이 함께하는 동네
서촌에 터를 잡은 이유 어린 시절 가족과 옥인동으로 이주했고(당시 부친인 김원 건축가가 직접 자택을 지었다) 지금은 누상동에 살고 있어요. 서촌에서 거의 가장 높은 곳이라 오르내리기 쉽지 않지만 집 뒤에 인왕산이 있고 거실에서는 구시가지가 한눈에 보이는데, 이 시원한 풍경에 반해 지금의 집을 선택했습니다.
동네의 매력 서촌은 이제 서울 시내에서는 보기 드문 ‘마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아직 빵집, 철물점, 목공소, 전파상 같은 전문점이 남아 있어 그분들과 작은 인연도 만들어갈 수 있고, 이웃과의 교류도 활발한 편이라 거리에서 마주치면 밝게 인사를 건네는 일이 잦습니다. 한마디로 ‘사람 냄새나는 동네’입니다.
나만의 서촌 즐기는 법 아워플래닛 랩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수성동 계곡이 있습니다. 도심 안에 이런 곳이 있나 싶은 멋진 계곡이라 저도 매일 반려견과 함께 그곳을 산책하며 명상하고, 서촌을 방문하는 분에게 항상 추천하죠. 그곳에 있으면 잠시나마 복잡한 서울을 잊게 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 현재 수성동 계곡이 있는 자리에는 옥인아파트가 오랫동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친구도 여럿 살아서 어릴 적에 자주 놀러 가곤 했는데, 2011년에 아파트를 철거하면서 그 아래 있던 계곡이 복원했어요. 조선 시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그 유명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에도 등장하는데, 빽빽하게 들어서 있던 아파트와 자동차, 사람들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처음처럼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과정이 무척이나 흥미로웠습니다.
김태윤 셰프는 레스토랑 7PM, 주반, 이타카를 차례로 운영하며 음식과 그 역사에 관심을 보여왔다. 지금은 아워플래닛을 통해 클래스 ‘지속 가능한 식탁 만들기’, 오뚜기와 함께하는 ‘오뚜기 카레플래닛’ 등 지속 가능한 식탁을 알리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안 중이다.
- 아름다운 나의 동네 '서촌' 어느 술꾼의 서촌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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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일부터 6일까지 3일간 행복작당 서촌 ‘서로서로서로’를 통해 서울의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서촌의 매력을 흠뻑 느꼈겠지만, 보다 깊숙한 속살이 궁금하다면 주목! 이곳에 터를 잡은 이들이 생생하게 전하는 서촌의 진면모.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4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