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영
서촌으로 이사 온 지 1년이 조금 지났다. 사계절을 모두 겪는 사이 동네 구석구석과 작은 골목길이 제법 익숙해졌고 단골 꽃집과 카페, 정답게 인사를 나누는 이웃도 생겼다. 사실 서촌에서 거주하는 게 처음은 아니다. 18년 전 대학원 다닐 적에 잠시 자취 생활을 하던 곳이 누상동의 작은 방이었다. 그때의 서촌은 지금보다 더 소박하고 정겨웠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옥인아파트가 수성동 계곡 위에 서 있었고, 작은 동네 슈퍼와 세탁소, 아담한 미용실이 이웃해 지내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카페가 된 자리에 있던 작은 토스트 가게와 수선집을 드나들던 기억이 선명하다. 어느 여름날 밤, 주방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개구리를 보고는 기겁했던 작은 자취 집. 놀라운 건 18년이 흘러 예전에 살던 그 누상동의 빌라로 돌아왔다는 거다. 어쩌면 그때 이미 다시 서촌에서 살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서울에 살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해주는 건 다름 아닌 산이다. 서촌에 살기로 마음먹은 뒤로 부동산에 갈 때마다 물은 건 “산이 보이는 집이 있을까요?”였다. 시간을 들여 어렵게 찾은 집은 그 바람의 결실이었다. 우측으로는 북악산이 펼쳐지고, 좌측에는 인왕산 자락이 부드럽게 뻗어 내려온다. 빌딩 숲 사이로 불쑥불쑥 존재를 드러내는 산. 강 너머 다른 동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도 다시 건너와 산이 보이면 비로소 안도감이 든다. 일상이라는 리듬 안에서도 집에서 산을 바라보는 일은 좀처럼 무뎌지지 않는 행위다. 계절별로 혹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산의 풍경과 빛깔은 늘 나의 감각보다 저만치 앞서 있다. 선선한 바람이 분다 싶으면 산은 어느새 단풍을 내어주고, 폭우 뒤의 청량함은 계곡의 거센 소리로 드러난다. 언제나 정확하고 무던하면서도 너그러운 산 앞에서 늘 들쑥날쑥하는 내 마음을 본다.
내가 사랑하는 서촌의 풍경은 평일 이른 아침의 고요한 시간이다. 주말의 인파와 소란이 모두 걷히고 여백으로 시작되는 하루를 만끽하기 위해 이른 산책을 나가곤 한다. 어떤 집의 담벼락을 한참 동안 바라보는 외국인 커플, 할머니가 홀로 앉아 있는 어느 길목의 계단 끝, 이제 막 문을 연 손님 없는 카페, 날마다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무 아래 채소 트럭은 서촌의 진짜 풍경이다. 데이트나 맛있는 걸 먹으러 찾아오는 사람들은 발견할 수 없는 종류의 애틋하고 정겨운 모습. 멋지고 트렌디한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요즘의 서촌이지만, 나는 이 동네의 순박하고 서정적인 것을 한껏 사랑한다. 채소 트럭에서 호박 하나와 느타리버섯 한 봉지를 사서 40개의 계단을 느긋하게 오르며 오늘은 어떻게 지낼지 생각하는 순간을 말이다.
아파트에 살던 때보다 더 많이 걷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는 수고를 해야 하는 지금의 삶이 나는 훨씬 만족스럽다. 몸을 바지런히 움직이는 대가로 녹음 진 산과 아침을 깨우는 새소리, 이곳에 살던 옛 화가의 고즈넉한 집을 매일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매일매일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서울에서 내가 사는 이 동네만큼은 너무 큰 변화와 유행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동쪽에서 잠시 뻗어 들어오는 이른 아침의 햇살을 기대하며 오늘 밤도 다시금 내일을 기다린다.
박선영 칼럼니스트는 아트, 디자인, 건축, 여행 등 매혹적인 것에 대해 오랫동안 글을 써왔다. 단행본 <독일 미감> <유럽 호텔 여행>을 집필했고, 서촌에 거주하며 이따금씩 집에서 흥미로운 전시나 프라이빗한 모임을 열기도 한다. 빈티지 가구와 조명, 저마다 다른 시대와 장소의 맥락을 지닌 공예품을 모으고 있다.
안동선 프리랜스 에디터
시간의 겹
서촌에 터를 잡은 이유 인왕산 입구 수성동 계곡 어귀에 자리한 빌라 꼭대기 층에 살아요. 제가 이 동네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인왕산인 것 같아요. 빨래를 널러 옥상에 올라갈 때면 1억 8천 년 전 중생대 화강암으로 이뤄졌다는 인왕산의 위용에 감탄하고, 주말 아침 등산 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릴 때면 활기가 차오르죠.
동네의 매력 예술가의 삶을 좇으며 글을 쓰는 게 업이다 보니 모퉁이를 돌 때마다 그들의 삶으로 타임 워프할 수 있는 서촌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어요. 벼슬자리를 하러 지방에 갈 때를 제외하고는 쭉 서촌에 살던 정선이 그린 인왕산과 청풍계, 절친이던 ‘모던 보이’ 이상과 ‘조선의 툴루즈 로트레크’ 구본웅이 걷던 거리, 지금은 사라졌지만 월북 화가 이쾌대와 그의 형이자 패션 디자이너인 이여성이 패션쇼 무대로 삼은 저택, 잘 보존돼 종종 방문하는 이상범 가옥과 박노수 가옥….
나만의 서촌 즐기는 법 특정 장소보다는 서촌에 이르는 루트를 제안하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역에 내려서 마을버스를 갈아타는 루트를 좋아해요. 광화문 KT 사옥 근처에서 종로 09번을 타고 종점인 수성동 계곡까지 온 다음 서촌 산책을 시작해도 좋죠. 마을버스가 세종대로에서 직진할 때는 광화문 뒤로 북한산의 화려한 능선이 아스라이 펼쳐지는 장관을 감상할 수 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 이벤트랄 게 있을까요. 인생의 즐거움은 밤과 낮, 이십사절기와 사계절의 규칙적인 순환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그 변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동네가 서촌이죠. 삶의 반짝임을 순간순간 만끽할 수 있어요.
안동선 프리랜스 에디터는 <코스모폴리탄> <바자> 등에서 피처 에디터로 일했다. 1인 콘텐츠 제작사 ‘식신술’을 운영하며 유니클로, 이솝 등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따라 인쇄물 기반 콘텐츠를 만든다. 에세이 <내 곁에 미술>을 펴냈으며, 아트부산의 콘텐츠 파트너로 일한다.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
사대문 안의 시골
서촌에 터를 잡은 이유 아파트 투자에 실패하고 마음 둘 곳을 찾다가 오게 된 곳이 서촌입니다. 당시 부부 사이에도 경고등이 켜졌는데, 서촌으로 이사를 오고 둘째가 생길 만큼 동네와 합이 잘 맞았죠. 난생처음 한옥에서 지내봤는데 비로소 사는 것 같았고, 그 정취가 좋아 지금도 한옥에 살고 있습니다.
동네의 매력 아파트 숲이 보이지 않아서일까요? 경복궁역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올 때나, 주말에 동네 산책을 하다 보면 눈과 마음이 편안하더라고요. 수성동 계곡과 인왕산이 지척이라 산에 마음 편히 오를 수 있다는 점도 좋아하는 요소입니다.
나만의 서촌 즐기는 법 카페나 소품 가게야 어디에나 있는 것이니, 인적이 드문 골목 골목으로 들어가보길 권할게요. 그 안에 진짜 서촌이 있습니다. 고추나 상추를 심은 빨간 ‘다라이’나 바지런한 손길로 예쁘게 단장한 집들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뭔가 모를 위로도 받게 돼요. 내키면 부동산에 들어가 매물이나 전세로 나온 물건을 봐도 좋지요. 배화부동산과 물푸레부동산에 물건이 많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 서촌에 지인과 후배가 많이 살아요. 보안여관 최성우 대표님, 안동선과 김기창 부부, 이주연과 민용준 부부도 이곳에 둥지를 틀고 있죠. 저에게는 이들과 한 번씩 만나 맛난 음식을 나누고 산행도 하는 것이 즐거움이자 이벤트입니다. 처음 이사 올 때 한 방송에서 서촌 주민이 “서촌에는 도둑이 없어요”라고 말한 것이 생각나네요. 높고, 거창하고, 반짝이는 것 대신 낮고, 순하고, 오래된 것이 많아 마음이 조바심으로 쿵쾅대지 않고 기분 좋게 차분해지는 동네입니다.
정성갑 대표는 갤러리 클립의 운영자이자 건축·공예 칼럼니스트이다. <럭셔리>와 디자인프레스에서 에디터와 편집장으로 일했으며, 단행본 <건축가가 지은 집> <집을 쫓는 모험>을 집필하고 로얄앤컴퍼니와 ‘건축가의 집’ 토크를 진행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아름다운 나의 동네 '서촌' 서촌을 누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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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일부터 6일까지 3일간 행복작당 서촌 ‘서로서로서로’를 통해 서울의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서촌의 매력을 흠뻑 느꼈겠지만, 보다 깊숙한 속살이 궁금하다면 주목! 이곳에 터를 잡은 이들이 생생하게 전하는 서촌의 진면모.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4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