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리어가 완성되면, 2층 공간은 프랜시스 갤러리 소속 작가들의 작품으로 채운 ‘살롱 프랜시스Salon Francis’ 겸 작가들의 레지던시로 사용할 계획이다. 집처럼 아늑한 분위기에서 작품을 관람할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의 공간을 준비하고 있다.
로사 박이 LA에서 집을 구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에게는 타협할 수 없는 세 가지 조건이 있었다. 스패니시 콜로니얼풍의 건축물일 것, 집을 지을 당시의 초기 요소가 집 안 곳곳에 남아 있을 것, 갤러리와 가까운 웨스트할리우드 근방일 것.
“남편은 미드센추리 모던 스타일의 집을 원했지만, 저는 조금 더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분위기의 공간을 찾고 있었어요. 작은 분수가 있는 정원과 뒷마당 사이에 놓인 2층짜리 건물이 마음에 꼭 들었습니다. 하얀 벽면의 투박한 질감과 이국적 색감의 타일도 매력적이었고, 나무 기둥이 노출된 천장은 한옥의 서까래를 연상시켰죠. 이런 전형적인 스패니시 콜로니얼 스타일의 집을 오랫동안 꿈꿔왔어요.”
원목 바닥의 집 안 곳곳에 러그를 깔아 따뜻함과 포근함을 더했다. 다닐레 시게루드Danielle Siggerud가 디자인한 다이닝 테이블 아래는 원형 러그를 매치했다.
이 세상의 소란스러움을 모두 차단할 것. 차분한 딥 그린 컬러의 페인트로 칠한 부엌은 들어서자마자 안정감을 준다.
로사에게도 LA는 특별한 곳이었다. 포토그래퍼인 남편 리치 스테이플턴Rich Stapleton과 <시리얼CEREAL> 매거진을 운영하며 전 세계를 여행했지만, 캘리포니아는 유독 이 부부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5년 전부터 점차 LA에서 보내는 시간을 늘리기 시작했고 2021년,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아들 터너와 함께 영국을 떠나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마쳤다. 하지만 코로나19는 LA를 드라마틱하게 바꿔놓았다. 팬데믹을 지나며 더욱 악화된 노숙자 문제와 불안한 치안, 열악한 행정 처리는 이제 매일매일 마주쳐야 하는 현실이 되었다.
사실 로사 박과 그녀의 남편 리치 스테이플턴은 이미 지난 10년간 영국 배스Bath를 기반으로 탄탄한 커리어를 쌓았다. 2012년 론칭한 독립 매거진 <시리얼>은 여행과 예술·디자인을 다루는 독보적인 매체로 성장했고, <시리얼>만의 미니멀하고 절제된 감각을 바탕으로 여러 브랜드들의 비주얼 컨설팅과 크리에이티브 디렉팅을 도맡았다. 오래된 조지언 양식 건물에 위치한 아파트에 가족의 보금자리를 꾸렸고, 몇 년간 함께 <시리얼>을 꾸려온 든든한 팀원들도 있었다.
“하지만 7년 정도 시간이 지나자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습니다.” 로사는 매거진의 편집자로 오랜 시간 일하는 동안 수많은 뮤지엄과 블루칩 갤러리를 방문해 다양한 아티스트와 그들의 작품을 취재했다. “예술 시장은 큰 틀에서 보면 상당히 보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업계예요. 일반 전시장에서는 편하게 가격을 물어볼 수조차 없는 경우가 많죠. 저와 제 친구들이 즐길 수 있는, 제가 구매할 수 있는 아티스트의 작품을 거는 공간을 떠올렸습니다.” 로사는 본인의 이름 대신 친근하고 중성적으로 느껴지는 아버지의 세례명으로 갤러리 이름을 짓고, 런던에서 첫 팝업 전시를 열었다. 그게 바로 ‘프랜시스 갤러리Francis Gallery’의 시작이었다.
비앤비 이탈리아B&B Italia의 카말레온다 소파는 재론칭을 위한 캠페인에서 로사 박 부부가 직접 아트 디렉션과 촬영을 담당했기에 개인적으로 깊은 연결감을 지니고 있는 피스다.
2018년, 배스에서 첫 프랜시스 갤러리를 오픈한 지 4년 만에 LA 전시장도 문을 열었다. “갤러리를 통해 한국 아티스트를 소개하게 된 건 개인적으로도 새로운 챕터였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난 로사는 캐나다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뒤 미국 보스턴에서 대학을 마쳤다. 뉴욕에서 몇 년간의 직장 생활에 회의를 느껴 영국 유학을 결정했고, 당시 대학원에서 만난 지금의 남편과 배스에서 13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늘 저 혼자 동양인이었어요. 친구들처럼 되고 싶은 마음에 저의 한국적인 면을 거부하던 시절도 있었죠. 하지만 나이가 들고, 제가 하는 일을 통해 수많은 나라를 여행하고 경험하면서 정작 나 스스로의 문화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돌아보게 됐어요. 한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거실에 걸린 구본창 작가의 작품을 바라보며 로사에게 ‘한국적인 것’이란 어떤 감각이냐고 묻자, 그녀는 ‘향수 어린 감정’이라고 답했다. 특히 프랜시스 갤러리의 소속 작가이기도 한 아티스트 존 자바와John Zabawa의 작품을 마주할 때 그런 감정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존은 제 아들처럼 어머니가 한국분이세요. 간혹 그의 그림에서 ‘감’처럼 한국적인 과일을 발견하거나, 컬러 팔레트에서 미묘하게 한국적인 정서를 느낄 때가 있죠. 저는 한국적인 사람이지만 한국이 아닌 곳에서 대부분의 인생을 보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아티스트들이 그 중간의 경계에서 작업하는 것을 볼 때, 완전히 한국적인 사람보다 조금 더 쉽게 연결되는 지점을 발견합니다.” 결국 로사에게 한국은 특정한 색감과 어렴풋한 기억,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감정과 그 안에 깃든 자연스럽고 겸손한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50년 넘게 활동해온 영국의 세라믹 작가 폴 필립Paul Philp과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 중인 한국 작가 유나 허의 베이스가 나란히 놓여 있다.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에서 저의 정신 건강을 컨트롤하려면 제가 바라보고, 영향받는 모든 것이 정제된 상태여야만 해요.” 깊은 녹색과 톤 다운된 흰색, 베이지 등 뉴트럴 컬러가 주를 이루는 그녀의 집은 확실히 대문 너머의 복잡한 세상이 금세 희미하게 느껴질 만큼 차분하고 고요한 울림을 지니고 있다. 조화롭게 놓인 가구와 오브제, 벽에 걸린 작품에는 하나하나 개인적인 사연과 추억이 담겨 있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 오랜 친구의 선물, 그녀가 인터뷰한 아티스트의 작품, 남편과 플리마켓에서 우연히 발견한 보물이 그녀의 시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사진 Elizabeth Carababas, Rich Stapleton(로사 박 인물 사진)
- Rosa Park 프랜시스 갤러리 디렉터 로사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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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문화를 다루는 독립 매거진 <시리얼>의 설립자이자 영국 배스와 LA에 기반을 둔 프랜시스 갤러리를 운영 중인 로사 박은 아직 그녀의 취향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 새롭게 마주치는 환경과 끊임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자신을 둘러싼 공간을 차곡차곡 채워나간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4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