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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옥 작가 최희주의 작업실
길가의 돌과 나뭇잎, 산과 강물이 그리는 선… 자연물에서 영감을 얻어 지은 작품으로 위로와 응원을 건네는 작가 최희주. 서촌에 자리한 작업실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다정하게, 쏟아지는 햇볕만큼이나 따스하게 우리를 맞이했다.

최희주 작가. 최근에는 그의 액막이 모시 명태 작품이 큰 인기를 얻으며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부엌과 다이닝 공간. 안쪽에도 좁은 창을 내어 빛이 고루 드리운다.
수많은 인파로 늘 북적이는 서촌. 대로에서 한 켜 안쪽으로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한 주택가가 나타난다. 한 골목 들어갔을 뿐인데 분위기는 완연히 다르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길을 지나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에 최희주 작가의 작업실이 있다.

최희주는 모시와 삼베, 무명 같은 전통 섬유를 바느질해 일상의 기물과 오브제를 만드는 작가다. 약하디약한 패브릭은 그의 손을 거쳐 때로는 액운도, 불운도 척척 막아주는 명태의 모습이 되었다가, 무겁고 단단한 돌로 변신해 휘청이는 마음에 가만히 추가 되어주는가 하면,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되어 빛나기도 한다. (아, 이 명태로 말할 것 같으면 최근 어느 아이돌 가수의 유튜브에 등장해 화제가 되었던 바로 그 ‘액막이 모시명태’가 맞다.)


원래 집의 오량식 구조를 살린 지붕 모습. 1923년에 지었다는 한옥에는 지붕과 담장 곳곳에 공들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모시나 삼베 같은 전통 소재의 고르지 않은 표면, 불규칙한 선이 살아 있는 모습이 좋았어요. 자연 원료를 그대로 섬유로 만든 것이라 이 풀은 어디에서 어떤 바람과 햇빛을 받으며 자라났을지 거쳐온 과정을 상상하게 되고요. 그 본연의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교를 부리고 싶은 마음을 참고, 많은 표현을 덜고 또 덜어낸 끝에 선 하나를 남겨 작품을 짓는다. 산책하다 주운 도토리 껍질, 나뭇잎과 열매, 구름과 달빛까지. 그에게는 자연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영감을 주는 뮤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자연으로부터 얻은 더 큰 마음이 깃들어 있다.

“저는 자연에서 가장 큰 위안을 받아요. 제 작업에 자연을 담는 이유는, 작품을 사용할 사람에게도 조금이나마 제가 느낀 위안을 주고 싶어서예요. 그래서인지 갤러리보다는 집에 두고,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기쁩니다.”


결을 다듬고 재단까지 마친 천을 바느질 할 때 가장 즐겁다는 최희주 작가.
가구에는 평소 애정하는 금속공예가 이윤정이 작업한 손잡이를 달았다.
사람들에게 든든함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담긴 작품은 이를테면 이런 것. 삼베로 모양을 만들고 메밀껍질을 넣어 만든 일곱 개의 검은 돌, ‘공든 탑’은 아침에 일어나 하나씩 쌓는 오브제다. 하루하루 공들여 살자는 마음으로 돌탑을 쌓듯 올리고, 일곱 개를 다 쌓으면 일주일을 잘 보냈다는 소소한 보람이 또 한 번 쌓인다.

어머니가 60년 동안 사용한 목화솜 이불 홑청으로 만들었다는 '매일이 보름달'은 또 어떤가. 풀을 먹이고 다듬질하던 어머니의 시간과 어린 시절 작가의 추억을 함께 품은 이불로 햇빛처럼 눈부시지 않으면서 포근하게 감싸주는 달빛을 지었다. 틈을 선으로 표현한 작품 ‘돌담’에는 틈이 있어 더 올곧게 서 있을 수 있는 돌담처럼 우리도 틈을 지니고 살자는 뜻이 담겼다. 갤러리 늬은에서 열린 이번 전시 <돌 달 바람>에서 선보인 작품인데, 한창 사회생활을 하는 젊은이들이 한바탕 눈물을 쏟고 가는 오열 존이었다고.


자그마한 창과 작은 수납장, 이불장이 차례로 자리한 벽면. 가운데 수납장에는 오래된 일본 가구에서 떼어낸 모루 유리를 사용했다.
이렇게 마음을 담아 사람들을 울리고 또 웃게 하던 작업은 모두 작년 초 새로이 둥지를 튼 이곳 서촌 작업실에서 이뤄졌다. “아이들이 독립한 후에 남은 삶을 어디서 살아갈지 많이 고민했어요. 즐겨 드나들고 너무나 좋아하던 서촌과 북촌에 작업실을 알아보게 됐고, 간소하게 살고 싶은 마음에 작은 공간을 찾았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한옥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원하는 조건이던 주차 공간이 없더라도 지하철역이 가까운 곳, 평지인 곳을 찾다 보니 대부분 한옥이었던 것. 그러다 발견한 곳이 지금의 작업실이 됐다. “골목 안쪽에 자리한 집이라 답답할 것 같아 큰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대문을 열고 보니 웬걸, 비밀의 화원처럼 햇볕이 엄청 환히 드는 거예요. 답답하다는 말이 아늑하다는 표현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죠.” 1923년에 지어 1백 세를 바라보던 한옥은 낡고 오래되기는 했지만, 여러모로 공들여 지은 집이었다.


전시 <돌 달 바람>에서 선보인 돌 작업. 삼베에 메밀껍질을 채워 일곱 개의 검은 돌을, 솜을 채워 다섯 개의 하얀 돌을 지었다.
최희주 작가는 모시와 삼베, 무명 같은 전통 섬유를 재료로 고유한 질감과 색감이 듬뿍 드러나는 작품을 짓는다.
“보통 이렇게 작은 집은 지붕이 보 세 개가 지지하는 삼량식인데, 이 집은 오량식이에요. 공사를 하면서 사라졌지만, 색색깔의 기와와 전돌로 정성스레 무늬를 새긴 꽃담이 있었고, 가로로 길게 난 조그마한 창도 아름다웠어요.”

하지만 그만큼 오래 사용한 집이었기에 수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작업 생활에 맞춰 공간도 새로 짰다. 워낙 면적이 작다 보니 집을 고치는 일은 덜 원하는 것을 내어주고 더 원하는 것을 얻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가장 먼저 들인 것은 별채다. 작은 집이었지만 작업 공간을 따로 두기 위해 대문을 줄이고 별채를 지었다.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곳은 그가 가장 좋아하고, 또 많은 시간을 보내는 부엌과 다이닝 공간에 내어주었다.


부엌 한쪽 천장에는 어머니가 60년 동안 사용한 목화솜 이불 홑청으로 지은 ‘매일이 보름달’과 ‘푸른바다 모시명태’가 은은히 매달려 있다.
나쁜 일은 쫓아내고 좋은 일만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액막이 모시명태’를 만들었다.
나머지 생활공간은 1cm도 남기지 않고 테트리스하듯 차곡차곡 채웠다. 우선 필수 요소인 소형 세탁기와 건조기, 찻장, 그리고 반신욕을 위한 욕조 놓을 자리를 확보했다. “홍차 도구와 찻잔을 두는 찻장은 폭이 30cm도 안 돼요. 일본에서 지낼 때부터 너무 아끼던 가구라 먼저 놓을 자리를 정했어요. 모자란 공간은 수납장의 크기를 줄이고 물탱크가 없는 직수형 도기 제품, 돌출형 세면대를 열심히 찾아 확보했습니다.”

목재로 지은 한옥이라 수평과 수직이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구부터 창문까지 일일이 실측하고 공간에 맞춰 제작했다. 그렇게 설계와 시공에 쏟은 기간만 1년 6개월. “한옥이다 보니 외관 디자인도 쉽지 않았어요. 돌이나 나무 같은 재료만 써야 했고 옆집과 마감재 색상을 통일해야 하는 등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어요.”


작업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소재와 도구들.
마당에서 보이는 작업실. 마당에는 머루나무 덩굴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그렇게 어렵게 지었지만, 그만큼 이곳에서 얻은 결실도 가득했다. 1년 넘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수많은 소중한 것을 만들어냈다. “예전에 살던 아파트에서는 한강이나 산이 멀리 그림처럼 보였는데, 여기는 인왕산도, 북악산도 바로 제 옆에 있는 느낌이에요. 주변 풍경이 달라지니 작업도 바뀌더라고요. 여기 와서 바위산을 많이 보다 보니 돌을 작업하게 된 것 같기도 하고요.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가 저라는 사람에게도, 작업에도 아주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어떤 공간은 작아서 오히려 더 아름답다. 최희주 작가의 한옥도 그런 곳이다. 일상에 기쁨을 주는 자그마한 작품과 이를 짓는 사람, 그리고 이들 모두를 아늑하게 품은 장소. 앞으로는 이곳에서 또 어떤 아름다움이 탄생하게 될까.

글 정경화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3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