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베란다를 트고 천장을 드러내 거실 공간을 최대한 확보했다. 재미있는 모양의 테이블은 최진성 씨가 직접 톱으로 자르고 다리를 붙인 것.
(오른쪽) 확장으로 생긴 보기 싫은 턱을 없애기 위해 침실 입구부터 베란다까지 벽을 세웠더니 재미있는 사선형 벽이 생겼다. 벽 뒤쪽으로 자연스럽게 생긴 여분의 공간에는 ‘ㄱ’자 형태의 거실장을 만들었다.
스물다섯 평 신혼살림을 차리다 아파트는 샐러리맨이 입는 지루한 양복을 닮았다. 네모반듯한 획일적인 구조가 특징도 재미도 없지만 편리하고 실용적이어서 누구나 별다른 고민 없이 선택하곤 한다. 새롭고 창조적인 영감이 넘치는 젊은 인테리어 디자이너 최진성 씨에게 이런 아파트는 따분하고 지루하다. 바닥으로부터 슬며시 솟아오른 듯 휘어진 벽 기둥, 원하는 모양을 자유롭게 그려 그대로 뚫어버린 문, 구불구불 물결치는 책장…. 누구라도 그가 디자인한 개성 있는 작품을 보면 이해가 될 테지만 이상과 현실은 늘 다른 법. 그 역시 서울 근교의 스물다섯 평짜리 아파트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최진성 씨는 모던 스타일 벽지와 조명 기구 등을 판매하는 쇼핑몰 ‘페리도트(02-511-1134,www.e-peridot.com)’의 대표. 가구나 소품은 직접 제작해 판매하고,인테리어 시공과 컨설팅도 겸하고 있다. 빡빡머리, 어깨에 새겨진 문신, 예리한 눈매가 제법 터프한 인상을 주지만, 집에서만큼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무엇이든 척척 만들어내는 자상한 맥가이버다. 아내 이선영 씨는 최진성 씨의 든든한 동업자로 페리도트의 패브릭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이들 부부에게는 두 식구가 더 있는데 바로 강아지라 부르기에는 제법 덩치가 큰 덴버와 베티.
1 블랙과 화이트로 심플하게 꾸민 서재.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벽 쪽으로 책상을 겸한 일체형 수납장을 짜 넣었다. 하부 수납장의 절반 이상은 덴버와 베티의 식량으로 채워져 있다. 이선영 씨가 자리를 비우면 최진성 씨를 아빠인 양 따라다니는 강아지 덴버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2 최진성 씨가 아내를 위해 특별 제작한 화장대. 화장품을 밖에 늘어놓는 것이 보기 싫다던 아내의 불평에 역시나 이번에도 만능 맥가이버가 되어 화장대를 만들어주었다. 문은 거울로, 튼튼한 선반은 종류별로 화장품을 정돈할 수 있는 정리함으로 사용할 수 있다.
3 자주 신는 신발을 올려놓는 두 개의 선반 역시 최진성 씨의 솜씨. 외출할 때마다 던져주는 덴버와 베티의 간식도 잊지 않고 놓아둔다.
4 욕실에 설치한 나무 의자 역시 아내를 위해 만든 것. 쭈그리고 앉아 발을 닦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온갖 상점을 뒤져 이 의자를 설치해주었다. 의자 옆으로 샤워기 걸이를 낮게 설치하여 불편이 없도록 한 점이 눈에 띈다.
5 거실 벽면에 설치한 동그란 전구는 집 안 불이 모두 나갔을 때만 불이 켜지는 비상등. 노출 콘크리트 천장 등과 함께 어우러져 멋진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실장님, 덴버 좀 보세요!” 최진성 씨는 이선영 씨를 이렇게 부른다. 이선영 씨와는 20대 초반에 만나 긴 열애 끝에 재작년에 웨딩마치를 올렸다. 마침 같은 건물에 회사가 있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미모의 누나는 애인에서 동업자로, 그리고 지금은 친구 같은 아내가 되어주었다. 회사와 집에서 온종일 붙어 다니니 티격태격할 법도 하건만 작은 말다툼 한 번 해본 적 없는 금실 좋은 부부다. 남들은 일과 생활을 분리하려고 안달이지만 이 부부는 일이 곧 놀이고 놀이가 생활이 되어 즐겁단다. 2년 차 신혼부부와 유난히 활발한 강아지 두 마리가 함께 얽혀 사는 이곳은 디자이너로서의 일상이 그대로 담긴, 크리에이티브한 감각의 장소다.
평범한 아파트 남다르게 사는 법 “아파트는 구조가 크게 다르지 않답니다. 평형대별로 거실, 안방, 서재, 베란다의 배치가 거의 같아요. 인테리어 공사는 비교적 쉽지만 구조적인 부분에서의 재미는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천장고를 높이는 방법이었죠. 우선 거실의 베란다를 확장하고, 각 방을 제외한 공간은 콘크리트 골조가 드러나도록 천장을 모두 뜯어냈어요. 덕분에 거실이 한층 넓어졌어요.”
거실은 마치 패션 매장처럼 감각적이다. 천장을 드러내면서 요즘 유행하는 노출 콘크리트 질감이 자연스럽게 생긴 셈이다. 에어컨도 천장 등도 벽 밖으로 그대로 노출되어 있지만, 오히려 더 개성 있는 인테리어 요소가 되었다. 천장은 투명한 칠로만 마무리 했고, 벽에는 모던 스타일의 디지털 프린트 벽지를 시공했다. 거실에 놓인 것은 편안한 느낌의 투박한 소파와 테이블, 벽걸이형 텔레비전이 전부. 베란다 확장을 통해 생긴 긴 통창에는 흔한 커튼 하나 달려 있지 않다. 마치 흑백사진을 보는 듯 차갑고 모던한 느낌의 거실 정중앙에 놓인 구불구불한 형태의 테이블이 유일하게 장식적인 역할을 한다. 마치 미완성 된 듯한 노출 콘크리트의 질감은 부엌, 그리고 욕실까지 이어지는데, 욕실의 경우에는 천장이 아닌 두 면의 벽에 적용, 기존의 타일을 모두 뜯어내고 재미있는 모양의 드로잉을 그려 넣었다.
(왼쪽) 집 안 분위기와 어울리도록 싱크대는 질감과 컬러를 직접 선택하여 제작했다. 식탁은 따로 없고, 거실 테이블이나 서재의 바퀴 달린 작업대를 사용해 식사한다.
(오른쪽) 욕실 역시 위트 있는 드로잉을 가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거실, 주방, 욕실이 콘크리트 질감을 그대로 살린 절제된 모던 스타일을 연출했다면, 침실과 서재는 컬러 매치와 실용성에 집중한 공간이다. 먼저 부부 침실은 파스텔 컬러 벽지로 아늑한 느낌을 강조하고, 최진성 씨가 직접 그림을 그려 넣은 서랍장을 설치했다. 언뜻 보면 평범한 서랍장처럼 보이지만 문을 열면 거울이 달려 있고, 화장품을 보관할 수 있는 아내를 위해 제작한 화장대다. 이들 부부가 가장 흡족해하는 공간은 다름 아닌 서재. 한쪽 벽면에는 천장부터 바닥까지 선반을 짜 넣어 실용성을 더하고, 그래픽적인 패턴을 이용해 모던한 느낌을 강조하니 작지만 그럴듯한 인테리어 디자인 사무실이 탄생했다. 바퀴 달린 다용도 테이블은 작업대로, 식탁으로 바꿔가며 사용하고 있다. 온갖 디자인 서적과 설계도가 늘어져 있는 이곳은 한 달이 하루같이 바쁜 디자이너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이 그대로 담긴 매력적인 공간이 되었다.
최진성·이선영 씨 부부가 사는 아파트는 멋지게 찢어진 빈티지 청바지처럼 보인다. 남다른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지만 그 바탕에는 실용성과 유머러스한 매력이 담겨 있다. 항상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영감과 에너지가 차고 넘치는 곳이다. 집 안 곳곳의 선반과 테이블, 조명등 하나까지도 기성품은 없다. 모두 가족의 필요에 맞게 직접 제작한 것들이다. 공간에 얽힌 재미있는 사연만 풀어놔도 지루해질 틈이 없어 보인다. 물론 매일 처리해야 할 일거리들을 저질러놓는 두 악동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