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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리스트 민들레의 집 옛집과 사적 취향의 조우
검고 긴 찻상 하나 단출하게 놓인 방에 앉으면 네모난 하늘이 눈에 꽉 찬다. 내게 필요한 생활용품을 촘촘히 넣으니 침실, 부엌, 마당도 충분하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는 스물다섯 평 한옥에서 기억 저편의 옛집과 완전히 새로운 한옥 스타일을 함께 만났다.

펠릭스 곤살레스 토레스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서촌 작업실에서부터 10년을 나란히 걸어둔 시계가 있는 리빙룸. 오랜 시간에 걸친 물건의 선택과 배치가 조화롭다.
공간 스타일링 분야에서 오래 활동해온 민들레 실장과 함께 숨 쉬는 매일 쓰는 식기와 컵, 그리고 손때 묻은 기물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어디선가 마주한 장면인 것 같아 자꾸 기억을 되짚어보는 순간이 있다.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분위기로 가득한 장소에 흐르는 시간. 오랜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대문을 열고 중정에 들어섰을 때 그런 공간과 시간이 내게 다가왔다. 아늑하지만 왠지 낯설게 느껴지는 ㅁ자 구조의 한옥은 국내 리빙 스타일리스트를 대표하는 세븐도어즈의 공동대표 민들레 실장의 집이다. 작업실 겸 거주 공간으로 사용하던 이곳은 공동대표인 민송이 대표의 주거 독립과 새 사무실 이전으로 한 사람을 위한 공간으로 재배치되었다. 먼저 중정 너머 다이닝 공간을 중심으로 양옆에 침실과 부엌이 자리하고 침실 옆으로는 이 집에서 가장 넓은 리빙룸이 위치한다. 미닫이문을 사이에 두고 방 세 칸, 화장실 두 개, 마당으로 사용하는 중정을 포함해 스물다섯 평 남짓한 아담한 한옥이다.

민들레 실장과 나는 정확히 16년 만에 다시 만났다. 당시 ‘리빙’과 ‘푸드’ 두 분야의 동시 연출이 가능한 스타일리스트 듀오로 유명한 세븐도어즈는 회사명보다 ‘민 자매’로 더 많이 불렸다. 화보 촬영을 위해 준비한 트렌디한 물건으로 늘 넘쳐나던 그들의 대치동 첫 작업실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다. 당시 우리 눈을 사로잡은 가구와 물건은 유행이 지나고 각자의 취향이 바뀌며 대부분 잊혔다. 지금도 여전히 그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사물이 궁금해 천천히 공간을 살피다가 중정 너머 보이는 차를 마시는 용도의 작은 방 앞에 시선이 멈췄다.


침실과 인접한 다이닝 공간은 공간에 생활을 맞춘 아이디어가 빛을 발한다. 기성 가구와 가전 대신 맞춤 아일랜드와 오픈 수납장, 원형 식탁을 중심으로 공간을 연출했다.
침대와 벽면 수납장으로 단출하게 연출한 침실. 의자를 사이드 테이블로, 파티션을 헤드보드로 사용했다.
고가구를 중심으로 현대적 소재와 컬러의 가구들이 조화를 이루는 리빙룸. 바이올렛 컬러 펌킨 소파는 리네로제 제품.
“원래는 침실이었어요. 실내에서 쓰기에 너무 거친 돌 바닥인 데다가 중정을 향해 완전히 열리는 구조라 침실로 쓰기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제가 너무 좋아하는 공간이라 그렇게 했어요. 이 집을 저 혼자만의 주거를 위해 가구를 재배치하면서 더 안쪽으로 침실을 옮기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 공간의 매력을 좀 더 오롯이 느낄 수 있도록 했지요.”

찻상 앞에 앉으면 이 집에서 유일하게 어떤 건물도 시야를 가리지 않는 나만의 하늘을 감상할 수 있다. 비 오는 날은 차 한잔 앞에 두고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기와를 타고 흘러내리는 섬세한 빗소리를 하염없이 듣기만 해도 참 좋다. 그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낮게 배치한 찻상이다. 민들레 실장은 임정주 작가의 개인전에서 시소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이 낮고 긴 테이블을 보고 완전히 매료되었다. 균형을 잘 맞춰야만 쓸 수 있다는 이 찻상 앞에서 요즘 그는 ‘밸런스’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공간 스타일링은 이를테면 문장 끝에 점을 찍는 작업이다. 어떤 의도와 콘셉트로 잘 기획한 공간 안에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고 적절한 물건과 그 위치를 치열하게 찾는 과정을 거쳐야 스타일링은 마침표를 찍는다. 그 순간을 위해 스타일리스트는 작은 디테일을 매만지고 마지막 터치와 숨결을 불어넣는다. 부족한 것도 넘치는 것도 없이, 꼭 있어야 할 곳에 사물이 놓일 때 그는 비로소 만족감을 느낀다. 그런 정교한 밸런스가 공간 연출에서, 그리고 삶에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거울과 세면대, 수건 걸이와 새 오브제로 단출하게 연출한 화장실.
한옥과 고가구의 낯선 표정을 찾아서
체부동을 거쳐 성북동 주택가에 숨어 있던 한옥들이 세븐도어즈의 작업실로 낙점된 것이 우연은 아니다. 민 자매의 아버지의 고향은 충북 영동이다. 영동은 매년 국악 축제가 열리는데, 집안 어른과 친지 중 관련 전공자가 많아 우리 전통음악과 가야금 연주를 익숙하게 듣고 자랐다. 일가친척이 한 지역에 모여 살아 명절이 되면 북적북적했다. 커다란 한옥에 모여 제사를 지낼 때면 오래된 고가구나 살림살이를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누군가에게 한옥과 고가구는 좀 특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 자매에겐 어쩌면 가장 편안한 오랜 추억의 공간과 사물이다. 하지만 이곳에 방문한 손님은 한옥의 편안함이 아니라 낯선 매력을 먼저 발견한다.


그간 모아온 그릇과 기물을 오픈형으로 수납해 제자리를 찾아주었다.
화장실 앞 자개장에는 동양적 느낌의 화병과 종교적 기물을 포함해 오랜 시간 모아온 주인장의 컬렉션을 올려 두었다.
“개인적으로 반전 매력을 즐기는 편이에요. 파티션을 헤드보드로 사용한다든지, 고가구를 현대적 소품과 함께 둔다든지 하는 식이죠. 전혀 다른 배치나 연출을 통해 새로운 분위기를 찾아내 공간의 표정을 만들어준다고 할까요. 리빙룸 중앙에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한 놀의 튤립 테이블은 정말 오래 기다려 받은 제품이에요. 흙과 나무가 주재료인 한옥에 굉장히 현대적인 소재를 두고 싶었거든요.”

스테인리스로 만든 프라마 의자나 차가운 금속 소재 사이드 테이블을 매치한 것도 현대적 요소를 더하기 위한 장치다. 바이올렛 컬러의 2인용 펌킨 소파는 형태와 부피가 놓일 공간에 적절하고, 채도가 너무 높지 않아 공간 속에 조용히 스며들면서도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주어 특히 만족도가 높은 가구다. 그는 펌킨 소파를 디자인한 피에르 폴랭의 독특하면서도 우아한 곡선 느낌의 디자인을 특히 좋아한다.


낮고 긴 찻상과 책꽂이가 놓인 차 마시는 방은 마치 한 편의 시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작지만 충분한 나만의 하늘을 감상할 수 있는 ㅁ자 한옥.
공간에 생활을 맞춰 충분하게
한옥은 과거의 생활 방식에 맞추어 지었기 때문에 현대 기성 가구와 가전을 두기 어렵다. 집에 가구를, 공간에 생활을 맞춰야 한다는 얘기다. 그리하여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가전을 두기로 했다. 가장 작은 사이즈의 빌트인 냉장고 하나를 두고 부엌과 다이닝 공간을 나누는 역할을 하는 아일랜드 하단에 반찬 냉장고와 와인 냉장고, 그 옆에는 휴지통과 재활용 수납공간을 딱 들어맞게 구성했다. 수십 년을 모아온 많은 그릇은 벽면장과 아일랜드장을 맞춤 제작해 한눈에 보이도록 수납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 두면 결국 사용하지 않게 된다. 곁에 두면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이 분명해지고, 궁극적으로는 둘 곳을 생각하고 새로운 물건을 들이는 것이 습관이 된다. 그렇게 물건은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민들레 실장은 스타일링 업무가 끝나면 몸과 마음을 내려놓는 나만의 한옥으로 퇴근한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그는 이 집의 또 다른 주인인 반려견 오복이 덕분에 다른 생명체를 받아들이는 일은 삶의 작은 부분까지 살피고 돌보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한 사람의 어린 시절과 사적 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이 아름다운 한옥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 매일매일 충실한 일상을 살아가는 주인장과 함께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단단한 시간을 쌓아가고 있다. 10년이 흐른 뒤에도 오랜 시간 그가 곁에둔 반질반질 윤이 나는 옛 물건과 함께 새로운 사계절과 취향을 담으며 이곳에 그대로 있을 것만 같다.

글 성정아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3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