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 서까래 아래 스웨덴 벽지로 아늑하게 마감한 침실 공간. 누웠을 때 마당이 보이도록 창을 바닥 면으로 길게 냈다.
한옥에 스웨덴의 별장 문화를 담은 박나니 씨. 부엌의 원형 테이블 뒤, 나무 수납장 사이로 세면대가 보인다. 왼쪽에는 뒤뜰을 볼 수 있는 창과 그 아래에 긴 벤치가 있다.
헤브레 이야기는 2018년 발간한 (Tuttle Publishing)라는 책 소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헤브레의 주인이자 이 책의 저자인 박나니 씨는 어릴 때 미국 하와이로 이민 가서 생활하다가 25년 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민 가기 전 어린 시절을 한옥에서 보낸 그는 수십 년이 지나 완전히 새로워진 현대적 한옥과 재회하면서 한옥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미술 선생님으로 일하면서 책을 만들어본 경험은 없었지만 외국에 한옥을 알리는 책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미국 출판사에 기획안을 꾸준히 보내 마침내 첫 책 를 출간했다. 이 책이 나오고 다음 해에는 한글판 <한옥>(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을 펴냈고, 올해에 세 번째 한옥 책을 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두 번째 한옥 책에는 비교적 큰 주거용 한옥을 실었다면, 세 번째 책에는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는 상업용 한옥을 소개하려고 한다.
ㄱ자형 한옥 헤브레. 침실에서 바라보면 앞에 욕실이, 왼쪽에 부엌이 있다. 투박한 질감의 참나무(oak)로 마감한 둥근 벽이 공간을 부드럽게 이어준다.
지난겨울 눈이 소복하게 쌓인 작은 마당. 사진 이종근.
“세 번째 책에 소개할 한옥을 찾아보다가 서촌 골목 안에 자리한 작고 예쁜 한옥 스테이를 알게 되었어요. 거기 주인과 연락이 닿아 한옥을 찾아갔더니 제 책을 갖고 있더라고요. 얼마나 많이 들춰봤는지 책이 너덜너덜해졌어요. 그분 말이 이 책을 보고 영감을 얻어 한옥을 지었다고, 그런데 제가 연락해서 너무 놀랐다고 하시더라고요.” 이 놀라운 인연을 시작으로 박나니 씨는 서촌에 자리한 다른 매력적인 한옥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났고, 이 동네와 작은 한옥을 사랑하게 되었다. “한옥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특별해요. 지향하는 라이프스타일과 가치관이 비슷해서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고, 그 덕분에 대화하기도 정말 편해요. 이번 책을 준비하면서 만난 서촌의 한옥 주인들과 ‘서벤져스’라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분들과 자주 교류하고 동네의 작고 맛있는 식당도 알게 되면서 이 동네가 더 좋아졌습니다.”
박나니 씨는 자연스럽게 서촌에서 한옥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몇 달 만에 이 집을 만났다. 젊은 부부가 부모에게 물려받아 살고 있던 오래된 한옥은 옛날에 지은 그대로 고치지 않은 상태였다. 마당은 시멘트로 덮여 있었고 좁은 땅에서 거주 공간을 조금이라도 넓히려고 벽은 최대한 바깥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심지어 원래 부엌이던 방에 있는 붙박이장을 뜯어냈더니 바로 옆집 벽이 나왔다. 그래도 전부 허물지 않고 대들보와 서까래, 기둥 등의 뼈대를 매만져 그대로 살리고 나머지는 대대적으로 레노베이션했다.
스웨덴에서 가져온 무스moose 옷걸이. 나무를 손으로 깎아 만든 것이다.
욕실과 화장실 사이에 마련한 세면대. 이곳 벽도 침실과 같은 벽지로 마감했다.
심플한 정사각 타일로 마감한 욕실. 목욕하면서 뒤뜰을 볼 수 있도록 작은 창을 냈다.
형태는 달라도 본질은 통한다
박나니 씨는 애초에 이 한옥을 스테이폴리오Stayfolio와 연계한 프라이빗 스테이로 계획하고 레노베이션을 지랩Z-lab에 맡겼다. 건축 사무소 지랩에서 만든 스테이폴리오는 머무름 자체를 여행으로 만드는 감각적 숙소를 큐레이팅해 소개하는 플랫폼이다. 이미 한옥을 포함해 여러 형태의 스테이를 디자인해온 지랩은 박나니 씨가 생각한 확고한 콘셉트를 60m2 남짓한 작은 한옥에 맞춤하게 풀어냈다. “시어머니가 스웨덴 분이에요. 여름마다 스웨덴 북부 마을에 있는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곤 하는데 그 집을 참 좋아해요. 스웨덴 사람들은 보통 작은 별장을 한 채씩 갖고 있어요.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저택이 아니고, 소박한 통나무집이죠. 그곳에 가서 두세 달간 그냥 쉬다가 오는 거예요. 그 통나무집의 느낌을 한옥에 담고 싶었어요. 서울 시내에 자리하지만 조용한 시골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머물며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지요.” 스웨덴에서는 ‘헤브레’라는 목조 창고를 개조해 별장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이유로 헤브레는 ‘창고’ ‘별장’‘시골집’ 등의 의미를 지닌다. 원래 용도를 다하고 새로운 공간으로 태어나는 헤브레처럼 이 한옥 역시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헤브레는 거실을 겸한 부엌과 침실, 욕실 등 꼭 필요한 공간으로만 단출하게 구성했다. 대들보와 서까래, 굵직한 기둥이 드러난 실내는 한옥이면서 산장 같은 느낌도 자아낸다. 벽면이 곧 창인 한옥에서는 장식적인 창살이 분위기를 주도하는데, 이 한옥에는 의도적으로 모던한 창호를 사용했고 투박한 질감의 오크로 벽면을 둘러 차분한 산장 같은 분위기를 낸 것이다. 그러면서 창을 집 안과 밖을 이어주는 요소로 적절히 활용했다. “목련나무를 심은 마당을 볼 수 있도록 부엌에는 마당 쪽으로 창을 크게 냈어요. 맞은편 벽에도 창을 만들었는데 그 창을 통해 작은 뒤뜰을 볼 수 있어요. 실내 면적이 좀 줄더라도 안과 밖이 유동적으로 연결되는 한옥의 장점을 살리고 싶어서 원래 없던 공간을 마련했고요. 앞뒤로 뚫린 창을 통해 바깥 풍경이 안으로 들어오고, 실내 공간은 그만큼 확장되는 거죠.”
참나무 마감에 스웨덴을 상징하는 파란색과 노란색을 더한 부엌. 전체적으로 오래된 대들보와 서까래가 드러난 한옥이면서 산장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돌 기단에 붉은 벽돌 벽을 쌓고, 그 위에 기와지붕을 얹은 한옥 스테이 헤브레.
침대만으로 꽉 차는 침실에는 누웠을 때 마당을 볼 수 있도록 벽 아래에 길고 좁은 창 하나만 만들었다. 나머지 벽은 나무와 새, 물고기, 꽃 등이 어우러져 초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벽지로 마감했다. ‘천국(Paradiset)’이라는 이름의 이 벽지는 1924년 설립한 스웨덴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스벤스크트 텐Svenskt Tenn의 제품이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요제프 프랑크Josef Frank가 1940년대에 디자인한 패턴으로, 지금도 숙련된 기술자가 옛날 방식으로 제작한다. “한옥에 스웨덴 문화와 예술을 담고 싶어서 이 벽지를 선택했어요. 패턴은 화려하지만 톤 다운된 컬러라 한옥의 분위기와도 잘 어울리죠. 그리고 스웨덴에서는 특히 여름에 백야가 지속되기 때문에 침실에 검은 커튼을 달아요. 그처럼 잠을 편히 잘 수 있도록 어둑한 분위기를 연출했어요.”
스웨덴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가치 중 ‘라곰Lagom’이 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각자의 삶에서 가장 적절한 상태인 ‘중용’을 의미하는 이 말은 지속 가능성, 균형 등의 가치와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한옥과도 통한다. 스웨덴 문화를 깊이 사랑하고 이해하는 박나니 씨는 한옥에 이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담아냈다. “한옥은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어 매력적이에요. 한국 사람은 물론 외국인이 헤브레에 머물면서 색다른 한옥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문의 스테이폴리오(stayfoli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