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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평론가 유경희의 서촌 한옥 영혼까지 자극받아야 진짜 좋은 집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 진행하는 행복작당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다. ‘달라서 한옥이다!’ 일단 마당을 비우고 시작하는 한옥에서는 누구나 크리에이터가 되고, 그렇게 성실하게 가꾼 공간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으로 빛이 난다. 착착건축사무소 김대균 건축가와 건축사사무소 로그의 신민철 소장, 그리고 미술 평론가 유경희 대표가 합심해 완성한 서촌의 한옥은 전통적이면서도 모던해서 그 창의력과 상상력에 유독 큰 지지를 보내고 싶은 곳이다.

오랫동안 모은 찻사발 수십여 점을 벽에 진열한 다실. 이곳에 앉으면 맞은편으로 탁 트인 후원이 펼쳐진다.
둥글둥글 푸근한 형태가 매력적인 물확. 이 집의 백미 중 하나는 민예사랑 장재순 대표와 협업해 만든 정원이다.
“제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집이에요. 2018년 평창동에서 전세살이를 할 때도 5천만 원을 들여서 집을 고쳤어요. 정원을 만드는 데만 6백만 원이 들었지요.(웃음) 집이 그만큼 중요해요. 이런 공간이면 좋겠다, 하는 기준도 명확하고요. 일단 시적詩的이어야 해요. 어둠이 섞인 빛에 로망이 있지요. 약간 어두운데 가만있으면 서서히 형체가 드러나는 곳 있잖아요. 그런 곳에서 책을 읽는 일,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사치이자 럭셔리예요. 의식과 무의식, 영혼과 영성이 함께 깨어나고 진화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온갖 작품과 아트에도 욕심이 많지만, 그런 집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다 포기할 수 있어요. 내가 예술 작품이 되는 거잖아요.

고대 이집트에 <사자의 서>(이집트어로 <빛을 벗어나는 책>)라는 책이 있어요. 인간이 죽어 지하 세계로 내려가 삶을 심판하는 오시리스를 만나면, 그가 그런대요. ‘너는 다른 사람을 얼마나 기쁘게 해줬느냐?’ 단순히 웃고 떠드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고무하고 인스파이어링해서 한 차원 높은 사람으로 만들어줬느냐를 묻는 거예요. 집도 똑같아요. 단순히 편하고 쾌적한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진짜 좋은 집이라면 나를 영적으로 보듬고 한 단계 높은 쪽으로 진화시킬 수 있어야 해요.”


정신분석학부터 미학까지 그의 온갖 관심사를 엿볼 수 있는 서재 겸 집무실. 책 읽고 글 쓰는 공간은 그에게 영혼의 옹달샘만큼이나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지금껏 쓴 책만 열 권이 넘고, 한곳에서 강연을 시작하면 10년에서 20년까지 롱런하는 유경희 대표와 하는 인터뷰는 생기가 넘쳤다. 오랜 지인인 양정원 선생이 그를 일컬어 “야성과 지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는데, 어떤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정신분석학 박사이기도 한 까닭에 이야기는 미술사와 미학, 정신분석과 심리를 넘나들었고 카를 융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자크 라캉과 질 들뢰즈가 수시로 등장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에서처럼 어릴 적 마당을 중심으로 여덟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큰 한옥에 살며 너무 일찍 인생을 알아버렸다는 이야기며, 어둑한 분위기에서 책 읽고 공부하는 시간이 좋아 정릉 집에 살 때도 남쪽으로 난 창은 다 막아버렸다는 에피소드가 꿀처럼 맞물려 들어갔다. 故 이어령 선생을 뵈었을 때도 두 시간여 동안 진행한 인터뷰가 질문지 한 번 들여다볼 필요 없이 매끈하게 흘렀는데 그녀와 하는 인터뷰도 그랬다. 이렇게 매력과 생기가 분출하는 지성知性이라니.


이곳에서는 미학 강연이 수시로 열리고, 파티도 종종 진행한다. 놀라운 생기와 에너지를 지닌 유경희 대표는 강연을 앞두고는 어떤 일정도 잡지 않고 에너지를 응축해놨다가 사람들 앞에서 분출한다.
대강의 정신으로 지은 반침半寢의 집
착착건축사무소의 김대균 건축가도 그의 이런 매력에 꼼짝없이 포위당했을 거라 본다. 알아온 시간만 20여 년. 김대균 건축가는 “사물을 바라보는 감도도 다르고, 배우는 것도 많아 커뮤니케이션이 즐겁지요. 워낙 좋아하는 선생님이에요”라고 했다.

이상의집 레노베이션 같은 공공 건축부터 빌라와 공유 주택, 그리고 농農을 주제로 열린 하우스비전에서 선보인 컬티베이션 하우스까지 다양한 프로젝트를 선보이는 그는 유경희 대표와 지은 서촌 한옥에서도 특유의 기분 좋은 위트와 실험 정신, 그리고 감각을 발산했다.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토벽. 담장에 구현한 박서보의 묘법이라고 할까? 많이 사용하는 네모반듯한 화강암이 아니라서 더 특별한 표정으로 와닿는다.
가장 돋보이는 것은 외벽. 한옥 담장이라고 하면 보통 화강암 재질의 네모반듯한 사고석과 기단석이 먼저 떠오르는데 그가 선택한 것은 토벽土壁. 흙을 다진 후 골강판을 댔다 떼어 만든 것으로, 흙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길게 골이패어 저 멀리서부터 색다른 미감으로 와닿는다. 유경희 대표는 “딱 박서보 화백의 묘법”이라며 웃었다. 현관의 위치도 두고두고 만족도가 높은 대목. 한국 전통 건축의 핵심 중 하나가 집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빙 돌아 에둘러 가며 환유의 풍경을 누리는 건데, 대문을 정문이 아닌 오른쪽 측면에 둬 마당을 지나 집으로 들어가기까지 짧은 산책을 하는 것처럼 달콤한 기분을 맛보게 한다. 그렇게 들어선 마당에는 잘생긴 넓적돌과 우물돌이 단정하게 들어앉아 있다. 위로는 하늘이 뻥 뚫려 있고.


알바 알토가 디자인한 체어 69로 구성한 주방 테이블. 르코르뷔지에의 LC7 의자도 있는데, 마음에 들면 바로 결단을 내리는 것이 그녀의 소비 스타일이다.
정원은 내부에서도 이어진다. 거실 뒤편이자 다실의 오른쪽으로 난 또 하나의 후원. 마사토로 바닥을 다졌는데 등고 선처럼 약간의 높낮이가 있고, 앞뒤로 한 움큼의 옥잠화와 사시사철 아름다운 남천南天이 있다. 내부 공간과 정원 사이에는 한지창이 있고, 그 주변으로는 쪽마루 같은 공간을 만들어 언제든 그곳에 걸터앉아 책 보고 음악 들으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

설계의 묘가 도드라지는 부분은 반침(벽체를 밖으로 돌출시켜 만든 공간)이다. “많게는 20명 가까이 모여 강연도 하고 파티도 하는 공간이지만, 사적 공간이기도 하니 쉬면서 충전도 할 수 있도록 공간에 정취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해법으로 한옥의 전통 요소 중 하나인 반침을 적용했습니다. 작업실, 주방, 뒷마당 창까지 거의 모든 공간에 밖으로 반침을 냈지요. 이렇게 하면 구조 기둥 밖에 공간이 하나 더 생겨 입체적 레이어가 만들어지고, 집도 한층 넓게 쓸 수 있어요. 공간과 구조가 유연해지면서 내부와 외부의 중간 지대에 걸터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요. 이 집을 반침의 집이라 부르는 이유예요.” 김대균 건축가의 말이다.



서재에서 보이는 마당과 거실 뒤쪽으로 펼쳐진 후원. 유경희 대표의 말대로 정원은 눈 쉬고 마음 쉬는 일상의 심산유곡이다.
건축가에게 공간에 대한 철학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집에 정신이 깃들어 있느냐 아니냐와 같은 의미다. 당연하게도 건축가에게 철학이 없으면 그저 번듯한 외연을 구축 하는 데 그치고 만다. 건축주 입장에서는 건축가의 그 철학이 곧 그 집에 사는 즐거움이 된다. 이 집에 담고 싶던 김대균 건축가의 철학은 ‘내외부로 자연스럽게 뻗어나가는 대강의 집’.

“반침의 집에서 신경 쓴 것은 내부와 외부의 연결이었어요. 옛것과 새것의 연결이기도 했고요. 반듯하고 대단한 게 아니라 어수룩하지만 편안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대강과 대충은 달라요. ‘자세하지 않은, 기본적인 부분만을 따낸 줄거리’가 대강의 뜻이에요. 뜨개질을 할 때 큰 틀만 짜면 나머지는 패턴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과 비슷하지요. 대충은 말 그대로 성의가 없는 거고요. 한옥은 대강의 집이고, 사람을 쉬게 한다는 큰 원칙과 덕목을 갖추고, 나머지 세세한 부분은 그 입지와 상황에 맞게 자연스럽게 줄거리를 잡아나가는 것이 중요해요. 반침을 통해 건축주의 일과 휴식, 공적 시간과 사적 시간이 확장되고 연결되길 바랐습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만나는 정원. 땅과 하늘에 큰 공간을 선뜻 내주는 것이 한옥의 오랜 매력이자 철학이다.
미국에서도 열심히 사 모은 유리알. 크고 작은 영롱한 빛깔이 작은 영성의 조각 같다.
좋은 건축주가 좋은 건축가를 만난다고 했던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게 무엇이고 또 그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 이가 유경희 대표지만, 집 짓는 일은 건축가에게 일임 하다시피 하고 이 기간 동안 <반 고흐-오베르쉬르우아즈 들판에서 만난 지상의 유배자>란 책을 탈고했으니 이 내공은 또 뭐지 싶다. 그런 믿음과 지지에 부응하고자 건축가는 또 최선의 최선을 찾아내고. 옆집이나 앞집의 민원도 일일이 공유하지 않았는데, 김대균 건축가는 “그런 건 당연 한 것”이라며 웃었다.

유경희 대표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나를 초월하게 하는 빛이 중요하다. 그 빛은 책과 집에 있더라. ‘내면의 빛을 찾아서’가 나의 인생 철학이다”라는 말을 많이 했다. 빛을 한껏 끌어들이는 고딕 양식보다 적당한 어두움이 있어 내면에 눈을 뜨게 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기능적이고 장식적인 것에서 탈피한 이런 본질적 말과 생각은 그 자체로 건축가에게 가이드라인이자 미션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풍성하고 건설적 교신이 일어나는 것이 집 짓기의 진정한 즐거움은 아닐지. 서촌 골목길에서 이 집을 볼때마다 그 안의 시간과 풍경이 궁금할 것 같다.



김대균 건축가는 단독주택부터 상공간, 공공 건축부터 전시까지 크고 작은 것, 딱딱하고 부드러운 것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공간을 바탕으로 다양한 콘텐츠와 협업해 보편타당한 인문학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사무실 소개 글에서 보듯 건축과 공간의 덕목에 뿌리를 두고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글 정성갑(갤러리 클립 대표) | 사진 이우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2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