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되어 더 운치 있는 연희동의 빌라를 살림집 겸 입말음식 연구소로 사용한다. 7년 전 전 주인이 개조한 부엌을 크게 손대지 않고 쓰고 있다. 요리 시연을 하기에 화력이 약한 인덕션 정도만 바꿀 계획이다.
*하미현 입말음식 연구가는 제주의 48개 농가가 소속된 ‘올바른농부장’과 함께 제주시소통협력센터에 복합 공간 ‘패스트 푸드’를 준비하고 있다. 제주 입말음식을 경험하는 식음 공간, 식재료 전시와 판매 공간, 워크숍 공간 등으로 구성하며 3월 말 오픈 예정이다.
이 부엌은 주로 무엇을 하는 공간인가요?
저는 입말음식(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는 토박이와 농부의 음식)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를 돌며 고유한 식재료와 토박이 음식을 만나죠. 그래서 이 부엌은 지구 마을에서 찾아낸 식재료, 음식, 도구가 모인 수집 공간이에요. 또 기억의 수장고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페루의 마리엔이 옥수수를 갈던 돌절구, 강원도 감자마을의 할매가 옹심이 만들 때 쓰는 강판 같은 걸 들여다보면 그때 그 사람의 부엌에서 만난 색, 질감, 냄새 같은 게 떠올라요. 그 물건 속에 깃든 시간이 공간 이동하는 거죠. 신기하게도 캔을 자르고 구멍 뚫은 저 강판으로 갈아야 옹심이의 식감이 느껴지는 걸 보면 이 부엌은 맛의 수장고이기도 하네요.
가족에게도 그런가요?
아이 없이 남편과 둘이 사는 우리는 여기저기서 수집해온 식재료나 음식을 이웃과 자주 나눠 먹어요. 1970년대 말에 지은 이 빌라에는 지금 미국계 러시아인, 고려인, 서울 토박이까지 다양한 사람이 살거든요. 러시아 이웃은 러시아 야생차를 들고 오고, 코카서스에서 온 고려인 가족은 고려인 음식을 들고 오죠. 맛 공동체라고 할까요? 어디서 가져온 음식이고, 현지에선 이 맛을 무어라 표현하며, 어떻게 먹으면 제맛이 나는지 이야기가 끊이지 않죠. 팬데믹 때문에 지구 마을의 입말음식을 수집하러 나가지 못하던 제게 이들의 음식은 ‘디아스포라’라는 새로운 장르를 알게 해주었어요. 코카서스 지방의 고려인 마을에서 온 음식은 한국 음식도, 러시아 음식도 아니에요. 사막이라 배추 농사가 안 되니 수박으로 김치를 담그고, 샌드위치에 고추장 같은 고추 페이스트를 바르는 식이죠. 그야말로 디아스포라죠.
지구 마을 방방곡곡에서 구해온 숟가락.
상을 차려주고 받는 기분이 좋아 소반을 들고 다니며 입말음식 워크숍을 하다 보니 꽤 여러 개 모으게 됐다.
이 부엌의 역사를 들려주세요.
1980년대 초 건축할 때부터 지하부터 2층까지 나선형 계단이 있는 서양식 빌라였어요. 그러다 60대 부부가 노모와 함께 살다가 렌트하우스처럼 바꾼 집을 우리가 7년 전 구입했는데, 그때도 뼈대는 서양식 공간이면서 분위기는 한국 부엌 같았죠. ㄱ 자 주방 싱크도, 그 앞으로 댄 우드 아일랜드도 모두 그전 주인이 만든 거예요. 일본에 있는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좋은 것만 채워놓았는데 인연이 되어 우리집이 됐어요. 8년 차를 맞아 성능이 노후된 인덕션이나 후드 같은 가전제품 말고는 크게 바꿀 게 없는 부엌이에요.
이 부엌이 무엇을 지켜나가길 바라나요?
제가 연구하는 입말음식은 누군가의 봉사가 전제되는 궁중 음식, 종가 음식, 반가 음식 등과 달라요. 바쁜 노동 사이 식구들 먹이려고 그때그때 만드는 음식이니 엄청 간단하고 살아 펄떡이는 음식이죠. 제주 입말음식을 예로 들어볼까요? 제주 해녀는 땅 밭으로, 물 밭으로 오가며 일하느라 요리에 쓸 시간이 많지 않아요. 그날 물 밭에서 잡은 뿔소라를 썰고, 땅 밭에서 캔 마늘에 양념 너덧 가지 넣어 바로 비벼 먹어요. 제주 음식에 튀김이 많은 이유도 굽거나 찔 시간이 없으니 멸치 따위를 재빨리 튀겨 먹은 거고요. 요즘 말로 말하면 뜻 그대로 패스트 푸드fast food예요. 이 토박이들은 왜 이 식재료를 아직도 손수 키우고, 음식 만들 때 이런 도구를 여전히 쓰며, 왜 이런 조리 방식을 고집하는가. 그걸 연구하는 일은 왜 사는가를 탐구하는 일과 통하죠. 세상에 입말음식이 계속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에요. 이 부엌이 그걸 지켜갔으면 해요.
바로 옆 부엌에서 만든 음식, 이곳저곳에서 모은 식재료를 사람들과 이 식탁에서 나눈다.
입말음식 연구가 하미현의 보물 단지들.
수고스러운데도 집에서 요리하는 이유가 있나요?
엄마가 주말이면 공단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에게 밥을 해주던 기억이 선해요. 신발 신고 들어가야 하는 비좁은 부엌에서, 딸 셋 키우느라 손에 물 마를 날 없던 엄마가 일면식도 없는 이들에게 밥을 해 먹인 거예요. 스무 살도 되기 전 부산에 와서 고무 공장, 신발 공장 다니던 청년들에게 밥을 해주던 그 마음, 누군가를 먹이고 싶은 마음이잖아요. 가족이든 남이든 내 시간을 써서, 그 사람을 위해서 음식을 만드는 일. 그것만 한 선물이 또 있을까요? 세상에서 제일 귀한 내 시간을 내주는 일. 요리하지 않을 수 없겠죠?
부엌 생활을 근사하게 만들어주는 물건이 있나요?
단지요. 시어머니가 쓰시던 단지, 중국 구이저우성의 소수민족에게서 받아온 단지, 진안 손내옹기에서 구해온 단지… 지구 마을에서 온 단지가 부엌에 가득해요. 젓갈 담아 두는 ‘젓도가지’, 목이 긴 ‘앵병’, 암팡지게 생긴 ‘꼬막단지’ 처럼 이름도 다 달라요. 단지는 항아리보다 작은 최소한의 저장고예요. 요즘 밀폐 용기보다 보관력도 뛰어나요. 냉장고 바깥에 두고 내용물을 그때그때 꺼내 쓰고, 필요하면 냉장고에 뚜껑 덮어 넣어버릴 수도 있죠.
- 음식 연구가 하미현 내 부엌은 입말음식 저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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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말음식(Spoken Recipe)’이란 이름으로 세상의 오래된 맛, 아름다운 문화를 모으는 음식 연구가 하미현. 그의 부엌은 한국 각 지역, 지구 방방곡곡의 식재료와 부엌 도구로 가득하다. 별맛 아닌 별맛이 모여드는 그의 부엌 속 보물 단지 이야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2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