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실 쪽에서 현관 쪽 복도를 바라보면 왼쪽에 부엌이, 오른쪽에 거실이 자리한다. 거실 벽에 놓은 임정주 작가의 나무 벤치 플로Flow가 미니멀한 공간에 율동감을 준다. 복도 벽에 건 도자 평면은 이은 작가, 부엌 벽에 건 달항아리 사진은 고영훈 작가 작품.
부부 둘이 살다가 아이를 갖게 되면 자연스럽게 라이프스타일이 달라지고, 이를 담아내기 위해 집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이란성 쌍둥이 남매를 키우는 이용진·박세정 부부는 한 주상 복합 아파트 단지에서 신혼집부터 평수를 넓히며 세 번째 집을 마련했다. 사방으로 난 창으로 우면산과 관악산, 멀리 남산과 한강까지 보이는 고층의 305m2 아파트. 널찍한 거실과 부엌을 중심으로 방 네 개와 욕실 세 개를 갖춘 평이한 구조는 네 식구가 살기에 충분하지만,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춤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초등학생인 아이들이 10대가 될 때까지 오래 살 것을 염두에 두고 가족의 생활과 부부의 취향에 딱 맞는 집을 새로 맞춰야 했다.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아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행복이 가득한 집> 독자였다는 박세정 씨는 신혼집을 꾸밀 때부터 인연을 이어온 길-연의 이길연 대표를 이번에도 ‘디자인 파트너’로 택했다. 박세정 씨와 이길연 대표는 10년 넘게 두 번의 집 인테리어를 함께하며 ‘언니, 동생’ 할 정도로 가까워진 사이. “우리 부부의 취향과 성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믿고 맡길 수 있어요. 게다가 대표님은 정말 혼을 쏟아부어 일하는 스타일이에요. 현장에 따라 본인이 이사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 가족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거든요.”
긴 아일랜드를 놓고 개방한 부엌.
거실에서 부부 침실로 들어가는 벽에 데이비드 퀸David Quinn의 ‘Machnamh’ 시리즈와 황형신 작가의 ‘Layered Steel’ 의자를 함께 놓았다.
현관에서 이어지는 욕실. 집에 들어와 바로 손을 씻을 수 있는 구조.
이길연 대표는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구조변경에 무엇보다 공을 들인다. 이 집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넓은 부부 침실·욕실을 나누어 부부 라운지와 서재를 새로 만들었다. “남편이 외국 출장을 많이 다녀서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거의 주말에만 집에 있었어요. 주중에 호텔에 머무는 시간이 많으니까 집에서는 호텔보다 더 편하고 아늑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지요.” “전망 좋은 자리에 서재를 만들어달라”는 남편의 바람에 따라 멀리 남산과 한강이 보이는 욕실의 욕조 자리에 과감하게 서재를 만들었다. 그리고 침실에서 서재로 이어지는 복도 양옆에 용변 보는 공간과 씻는 공간을 분리해 배치하고, 부부 각자의 드레스룸도 따로 만들었다. 각 공간과 공간 사이에는 벽에 쏙 들어가는 슬라이딩 도어를 설치했다. 보통 문이 많으면 복잡해 보인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방식의 슬라이딩 도어를 활용하면 공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디자이너의 의견이다. “내력벽을 제외하고 원래 이 집에 있던 두꺼운 벽을 모두 철거한 뒤 슬라이딩 도어가 들어갈 정도로만 두께를 최소화해서 가벽을 다시 세웠어요. 이렇게 하면 공간을 더 넓게 활용할 수 있고, 나중에 필요에 따라 구조 변경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이길연 대표가 구조변경 못지않게 신경 쓰는 부분은 수납이다. 수납은 가족의 생활을 좀 더 속속들이 파악해야 만족스러운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집 인테리어를 시작하기 전에 고객이 현재 살고 있는 집을 방문해서 가족 구성원의 옷부터 신발, 책 등의 크기를 모두 잽니다. 롱 코트를 주로 입는지 양복을 입는지에 따라 옷장 구성이 달라지고, 운동화를 많이 신는지 힐을 좋아하는지에 따라 신발장 선반 높이도 다르게 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과제를 내줍니다. 수납 할 물건의 크기와 종류를 고려해 수납장 구성과 선반 높이를 직접 그려보라고 하죠. 거기에 제 의견을 더해 알뜰하게 수납 계획을 세웁니다.”
필요 이상으로 넓은 부부 침실을 가벽으로 나누어 부부 라운지를 만들었다.
딸 방의 욕실 안쪽 공간에 만든 다락.
쌍둥이의 공부&놀이방.
미니멀한 공간의 긴장감을 흩뜨리는 예술 작품
이 집에는 여느 아파트에서는 볼 수 없는 비범한 공간이 있다. 딸 서정이 방 안쪽에 숨어 있는 아이들의 ‘다락’ 아지트. 쌍둥이에게 특별한 공간, 그 공간에서의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은 부부의 마음과 디자이너의 아이디어가 만나서 탄생한 공간이다. 다락방의 박공지붕처럼 사선으로 만든 천장과 두 아이만으로 그득해지는 친밀한 공간감, 아이들 각자가 좋아하는 물건을 보관할 수 있도록 자물쇠를 달아준 수납함을 갖춘 다락은 이 집에서 가장 작지만 제일 빛난다. 게다가 아티스트 갑빠오가 동화 같은 그림을 그려 넣고 도자 오브제를 배치해서 이야기까지 불어넣었다. “욕실에 물고기를 그려달라는 부탁만 하고 나머지는 작가님에게 모두 맡겼어요. 다락에 풍선 조명을 설치해두었는데, 그걸 잡은 아이를 벽에 그려 넣고, 이 공간 전체를 작품으로 완성해주었어요. 욕실인데도 아이들이 가장 많이 노는 공간이에요.”
박세정 씨와 쌍둥이 태규, 서정.
전망이 가장 좋고 조용한 부부 욕실이 서재로 변신했다. 책상 뒤에 박서보 화가의 작품이 보인다.
‘공간을 완성하는 것은 예술 작품’이라는 이길연 대표의 지론에 부부도 동감한다. 온통 하얀 거실에 따뜻한 감정을 불어넣는 에단 쿡Ethan Cook의 평면 작품, 콘크리트 벽을 시크하게 드러낸 욕실에 유쾌함을 더하는 김홍석 작가의 조형 작품, 현관에서 거실로 연결되는 긴 복도를 따라 이어지는 이은 작가의 고요한 도자 평면 등 부부가 컬렉션한 작품들이 제자리에서 공간의 분위기를 미묘하게 주도한다. 이길연 대표는 오래전부터 파인 아트뿐 아니라 공예품을 적극적으로 주거 공간에 들여 일상에서 쓰도록 권하고 있다. 거실의 심플한 흰색 소파 맞은편에 자리한 임정주 작가의 나무 벤치가 그렇게 이 집에 자리했다. 자연스럽게 휜 묵직한 나무 형태를 그대로 살려 최소한으로 다듬은 나무 벤치는 아트 오브제이면서 아이들에게는 미끄럼을 타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는 ‘노는 자리’이다. “이헌정 작가의 도자 식탁도 대표님이 적극적으로 추천해서 구입했어요. 원래는 디테일 없이 딱 떨어지는 미니멀한 스타일을 좋아하는데, 작가님 작업실에 가서 직접 보고 나니 다른 식탁은 눈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부엌에 놓은 허명욱 작가의 옻칠 수납장은 조은숙 아트앤라이프스타일 갤러리에서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 꼭 놓고 싶었어요.” 직선과 모노톤을 편애하는 부부의 집에 이런 공예품은 빈틈을 낸다. 반듯한 공간이 주는 긴장감을 기분 좋게 흩뜨린다.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에 잘 맞는 바탕 공간을 만들고 나서 좋아하는 가구와 작품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처럼 채우기까지 3년 반 정도 걸렸다. 부부는 비어 있는 자리를 성급하게 채우기보다는 원하는 가구를 들일 때까지 기다렸다. 좋아하는 작품을 한 점씩 구해 제자리를 찾아주는 시간을 즐겼다. 이 과정에도 이길연 대표는 맘 놓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디자인 파트너로 동참했다. 멋진 전망, 편리한 구조, 취향 저격 인테리어와 함께 이 집을 완성한 것은 이런 과정의 시간이 아닐까. 긴 호흡으로 관계를 이어가며 취향과 안목을 나누고 신뢰를 다진 시간 덕분에 이 가족의 ‘맞춤집’이 완성되었다.
부엌에서 바라본 거실과 식사 공간. 흰 소파 앞에 놓은 정구호 작가의 반닫이 테이블과 이혜미 작가의 은채 도자 소반, 이헌정 작가의 긴 도자 식탁 등 공예품을 일상에 들였다. 소파 뒤 작품은 에단 쿡의 ‘Untitled’.
인테리어 디자이너 이길연은 섬유공예를 전공하고 수입 패션 브랜드의 머천다이저로 일했다. 20여년 전부터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다양한 상업 공간과 집 인테리어를 완성했다. 특히 주거 공간을 꾸밀 때에는 트렌드를 따르지 않고 거주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딱 맞도록 구조변경과 수납에 공을 들인다. ‘공간을 완성하는 것은 예술 작품’이라는 지론에 따라 파인아트는 물론 공예품을 일상에 들여 사용하도록 적극 권한다.
- 아파트먼트 라이프 긴 호흡으로 완성한 ‘맞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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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이 가장 좋고 조용한 욕실을 서재로 꾸미고, 아이 방 안쪽의 자투리 공간에 비밀스러운 ‘다락’을 만들었다. 신혼집부터 10년 넘게 두 번의 집 인테리어를 함께한 부부와 디자이너는 이번에도 평이한 구조의 아파트를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춤하게 재구성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2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