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변경에 힘을 쏟되 마감재를 담백하게 통일하고, 천장 마감을 생략하는 대신 붙박이장 등을 제작하는 데 비용을 배분한 임명옥 씨의 105㎡ 아파트. 현관 옆 작은 방의 벽체를 없애고 투명한 슬라이딩 도어를 설치해 오픈 스튜디오처럼 개방감이 느껴진다.
30년 된 아파트 고쳐 살기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과 비례해 일상생활의 만족도 역시 중요한 키워드가 됐다. 단순히 잠을 자거나 쉬는 공간이 아닌 놀이, 취미, 문화 공간으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코로나19 시대 ‘집’의 의미. 투자를 목적으로 집을 고른다면 도심의 신축 아파트가 바람직한 선택지이겠지만, 오롯이 나를 위한 집이라면 기준이 달라진다. 삼성동 빌라에서 용인의 전원주택으로, 제주 구옥에서 1년 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주거를 경험한 임명옥 씨는 얼마 전 오래된 아파트를 매입해 레노베이션했다. “오랫동안 꿈꿔온 주택살이가 제 싱글 라이프스타일과 잘 맞지 않다는 걸 알았어요. 타운하우스처럼 조성한 단지다 보니 대부분의 이웃이 아이가 있는 가족이었고, 관심사가 달라 관계 맺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공들여 지은 집이라 아쉬운 마음이 컸죠.”
주택 생활을 정리하면서 머리도 식힐 겸 제주에서 1년을 지낸 그는 현실 주거로 아파트를 선택했다. 예산에 맞는 지역과 단지를 고르되, 새로 지은 대단지 고층 아파트는 후보에서 제외했다. 광교 신도시가 자리한 수원 매탄동의 30년 된 아파트는 제주에서 살던 동네처럼 오래된 단지 특유의 고즈넉함이 있었고, 재래시장과 공원이 가까웠다. 신도시 생활권이어서 백화점, 병원, 마트 등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 또한 장점이었다.
“처음부터 오래된 아파트 레노베이션을 생각했어요. 신축 아파트는 비싼 가격에 비해 제가 원하는 평면이나 디자인을 기대할 수 없을뿐더러 예산 대부분을 집값에 쓰고 싶지 않았죠. 제 성향상 인테리어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것이 만족도가 더 클 거라는 확신이 있었죠.”
주방에서 바라본 거실과 침실. 소파, 침대 등 최소의 가구만으로 간결하게 연출했다.
주방 상부장을 없애고 팔이 닿는 높이에 선반을 설치, 자주 사용하는 그릇과 찻잔만 간단하게 수납한다.
콘크리트 벽면에 새겨진 숫자 또한 이 집의 스토리가 된다.
오래된 아파트를 선택해 평면 변경을 포함한 전체 레노베이션을 원한다면 인테리어업체보다 건축가가 운영하는 설계 사무소나 평면 변경을 많이 해본 레노베이션업체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임명옥 씨는 빌라와 자신이 운영하던 의류 편집매장 인테리어, 용인 단독주택 신축까지 여러 번 합을 맞춘 안팍 김학중 건축가에게 네 번째 프로젝트를 의뢰했다. 김학중 소장은 “건축가에게도 레노베이션은 도전”이라 말한다. 신축은 도면대로만 시공하면 완성되지만, 레노베이션은 도면이 있어도 공사를 하면서 변수가 생기고, 뜯어보기 전에는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공사 기간에 맞춰 신속하면서도 안전하게 풀어내고, 변수를 독창적 플랜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건축가의 내공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 건축주의 성향을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임명옥 씨가 원한 스타일은 ‘제주도’. 꾸미지 않은 듯하지만 집주인의 색깔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제주 돌담처럼 단단하면서도 담백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김학중 소장은 아파트의 속살을 드러내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세월의 흔적만큼 켜켜이 덧입은 벽지를 모두 걷어내자 나타난 매끈하면서도 담담한 콘크리트 벽은 안이면서도 밖이고, 집이면서도 여행지 같은 이 집만의 시그너처를 완성해주었다.
“보통 천장만 노출하거나, 노출해도 하얀색 페인트를 도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콘크리트 마감 상태가 좋아 천장부터 벽까지 모두 노출하고 투명 코팅만 했어요. 벽에 새겨진 숫자는 아파트를 건축할 때 기본 골조를 세우고 일부 벽면은 조립식으로 구성하면서 필요하던 표식인 것 같아요. 숫자도 이 집만의 스토리니까 그대로 살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노출 콘크리트에 자작나무 합판을 더해 따스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파란 하늘을 연상케 하는 포인트 컬러를 더해 이 집만의 아날로그적 무드를 완성했죠.”
현관과 거실을 시각적으로 분리해주는 가벽은 오디오 시스템과 CD를 수납할 수 있다. 현관의 빨간 타일과 파란 벽이 컬러 대비를 이루며 포인트가 된다.
싱크대와 마주하는 작은 방 벽면에 수납장을 짜 넣어 소형 주방 가전이나 그릇, 식품 등을 수납하고 냉장고를 배치해 보조 주방을 만들었다. 주방에 나 있던 다용도실 문을 막고, 보조 주방에서 다용도실로 들어가는 동선을 새로 만들었다.
옷장, 찬장이 된 방
요즘 신축하는 아파트는 거실·방·주방의 크기가 비슷한 반면, 이 집은 상대적으로 안방과 거실이 넓고 주방은 좁았다. 가장 많이 구조변경을 한 곳은 주방, 만족하는 공간 역시 주방이다. 먼저 창문을 중심으로 ‘ㄱ’ 자형으로 구성한 주방 싱크대를 오른쪽 벽면으로 이동해 길이로 긴 일자형 조리대를 구성했다. 조리대 상판은 스테인리스 스틸로 마감해 실용성을 더하고, 상부장을 생략한 벽면에 선반을 달아 자주 쓰는 그릇을 올리거나 좋아하는 오브제를 장식한다. 주방 옆 작은 방은 한쪽 벽에 수납장을 짜 넣어 소형가전과 그릇, 식품 등을 수납하는 보조 주방 역할을 한다. “설계할 때 중점을 둔 것은 문과 창문의 재배치예요. 주방 창문을 강조하기 위해 창문 옆에 있던 다용도실 문을 막아 없애고, 자작나무 합판으로 창틀 프레임을 덧대었죠. 안방 창은 공간의 안정감을 위해 크기를 줄였고요. 방문 틀뿐 아니라 창문의 시스템 창호 바깥쪽으로 프레임을 짜 넣어 창틀의 내구성을 보완하면서 주택의 감성을 더했죠.”
자작나무 합판을 일정한 간격으로 커팅해 침대 헤드보드 벽면을 마감했다. 거실, 침실 모두 조명 역시 꼭 필요한 간접 조명등만 설치해 어둑어둑한 밤 무드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안방에서 연결되는 화장실과 거실 화장실의 벽체를 일부 철거해 호텔처럼 샤워 부스와 세면대가 분리된 널찍한 화장실로 구성했다.
1인 가구의 가장 큰 특징은 문이 없어도 된다는 것. 안방은 아예 문을 생략하고, 드레스룸은 슬라이딩 유리 중문을 달아 마치 방 전체가 거대한 옷장처럼 보인다. 보조 주방은 벽면과 같은 자작나무 소재의 슬라이딩 도어를 짜 넣어 평소에는 문이 없는 듯 열어두고 쓴다. 주방 수납장과 드레스룸 옷장 등 가구에도 문이 없다. “제주에서 다양한 스테이를 이용하며 오픈 수납장을 사용해봤는데 편하더라고요. 몇 년간 집을 자주 옮기면서 이동식 가구는 최대한 두지 말자는 계획을 세웠어요. 생각해보면 옷도 자주 입는 몇 가지만 있으면 되고, 이불도 여벌 하나만 있으면 돼요. 꼭 필요한 만큼의 수납장을 짜 넣고, 침대나 소파 같은 최소한의 가구만 들였죠.”
안방에서 연결되는 작은 화장실과 주방 옆에 자리한 화장실의 벽을 터서 화장실을 널찍하게 구성한 것 역시 1인 가구이기에 가능한 디자인이다. 베란다는 아파트라는 주거에서 바깥 공기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으로, 확장하지 않고 반려견을 위한 공간으로 꾸몄다. 비비와 리나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거실과 베란다 사이의 시스템 창호를 생략한 것이 특징. 겨울을 지내보고 난방 효과가 크게 떨어지지 않으면 그대로 오픈해서 사용할 계획이다. “30평대 아파트 구조에서 현관과 주 공간인 거실이 시각적으로 분리되지 않고 트여 있는 점이 늘 아쉬웠어요. 박스 형태의 중문을 설치하는 대신 신발장이 있는 벽을 없애고 유리 중문을 달아 개방감(확장감)을 주고, 거실 쪽에 날개 벽을 세워 현관과 거실을 시각적으로 분리했어요.” 사람마다 생김새가 서로 다르듯 삶의 양식도 제각각이다. 방 세 개와 거실, 주방, 화장실 두 개의 전통적 공간 구성에서 벗어나 1인 가구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공간을 재편집한 임명옥 씨의 105㎡ 아파트. 세상에 하나뿐인 싱글 하우스에는 매일 여행하듯 휴일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다.
건축가 김학중은 설계 사무소와 시공사에서 실무를 쌓은 뒤 2013년 독립해 건축설계사무소 안팍을 오픈했다. 설계와 시공을 함께 하기에 신축은 물론 구옥 레노베이션까지 가능하며, 작품이 아닌 ‘생활을 담는 그릇’으로서 주거 프로젝트로 주목받고 있다. 주요 프로젝트로는 243 스튜디오&하우스, LP 아파트먼트, 아스트로너지쏠라코리아 사옥, 트랄랄라 등이 있으며, 최근 아파트 레노베이션 프로젝트를 전담하는 세컨드 브랜드 3025(www.3025.kr)를 론칭했다.
- 공간 재편집이 돋보이는 105㎡ 아파트 3백65일 여행하듯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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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집’을 상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탁 트인 스튜디오 형태의 공간 구성과 자유로운 감성이 돋보이는 스타일링. 반려견 비비·리나와 함께 매일 여행하듯 사는 임명옥 씨의 싱글 라이프.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1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